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41(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2. 17:10

천년의 바람소리41(손진길 소설)

 

파주에 자리를 잡고 있는 신라의 칠중성은 고구려와 마주보고 있는 최전방이다. 그곳의 성주인 대도독 윤책은 639년 정초에 부임한 이후 성벽을 더욱 보강하고 군사훈련에 힘을 써 강군으로 만들고 있다.

그 일을 하느라고 바빠서 윤책은 640년에 스승이신 원광법사께서 서라벌 인근 금곡사에서 좌선을 하시다가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찾아가 보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6428월에는 합천의 대야성이 그만 백제군에게 넘어가고 말았다는 비보를 들었다.

그해 말에 서라벌에서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회담을 하겠다고 찾아온다. 그는 고구려와 동맹관계를 맺어 신라를 괴롭히고 있는 백제를 응징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643년이 되자 신라의 조정에서는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성주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일계급 특진을 시키고 있다. 따라서 칠중성주인 윤책이 유수가 된다. 아울러 낭비성주인 윤책도 유수가 된다.

그리고 김춘추는 진골이라서 그런지 단숨에 2계급 승진하여 군주의 벼슬을 가지게 된다. 642년에 벌써 2계급 특진하여 군주가 된 진골 김유신은 여전히 압량주를 다스리면서 백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있다. 그는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그 이듬해 곧 서기 6446월이 되자 윤책은 당 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소집한 50만 대군에게 요동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와 같은 당 태종의 명령은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발생한 최근의 전쟁과 무관하지가 아니하다.

644년 정월에 갑자기 고구려군이 남침한다. 동부전선으로 쳐들어와서 신라의 성 2개를 기습적으로 점령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신라조정에서는 긴급하게 당 태종에게 사절을 보내어 고구려가 점령한 성들을 반환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당의 사절이 고구려를 방문하였으나 코웃음만 사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당 태종이 요동정벌 명령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당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고 있다. 그 기회를 포착하여 신라의 군부에서는 김유신 군주에게 대야성을 비롯한 7개의 성을 백제로부터 수복하라고 명령한다. 김유신의 활약으로 빼앗긴 7성을 8월에 되찾게 되는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데 윤책이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전쟁에 관한 정보를 간자와 척후를 통하여 계속 수집하면서 분석을 해보니, 정작 당 태종 이세민이 장안을 떠나 낙양에서 원정군을 재정비하여 친정에 나서는 시점이 그 다음해 곧 서기 6452월이다;

당 태종이 작년 곧 6446월에 50만 대군에게 요동을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막상 고구려와 전쟁에 돌입한 시점은 작년 11월이다. 3개월간 전투가 계속되자 고구려의 군대가 후퇴하여 천리장성 이동지역으로 물러간다. 그것을 보고서 이세민이 30만 대군을 지휘하여 친정에 나선 것이다.

6454월에 천리장성에 도착한 당 태종 이세민은 3명의 선봉장에게 각각 6만명의 정예병을 주면서 천리장성 동쪽에 있는 고구려의 주요 성들을 정복하라고 명령한다. 그것이 북쪽에 있는 신성현도성 그리고 남쪽의 건안성인 것이다;

당시 사령관인 이세적마저 선봉장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 태종은 초전에 전방에 있는 주요한 고구려의 성들을 박살내고 손쉽게 점령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 다음 그는 질풍같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으로 쳐들어가고자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 태종의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1군이 전력을 다하여 북쪽의 신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제3군이 남쪽의 건안성을 공격하였으나 그것마저 점령하지를 못한다. 그 대신에 당의 군대가 그 사이에 있는 성들을 거의 정복한다. 그 가운데 평지성인 큰 성 요동성이 있는데 고구려가 사력을 다하여 수비하였으나 당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요동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서기 6456월에 인근 동쪽 들판에서 고구려군 15만명을 동원하여 약 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당 태종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밀리고 만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북쪽의 신성과 남쪽의 건안성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안시성으로 들어가서 수성작전에 매어 달린다.

이제 당 태종은 천리장성 동쪽 전방에 있는 3개 성을 포위만 해놓고 남하하여 평양성을 점령하느냐? 아니면 안시성부터 정복하고 차근차근 남진을 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때 금방 남하하는 정책이 위험하다는 것이 제장들의 주장이다; “지금 신성과 건안성에는 각각 10만명의 고구려 병사들이 호시탐탐 우리의 허실을 엿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

신중론이 다음과 같다; “만약 그들을 가볍게 여기고 포위만 한 채 우리가 남하를 한다면 그들이 포위망을 뚫고서 우리의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우리는 평양성에 도달하기도 전에 큰 낭패를 당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안시성을 먼저 치고 그 다음에 신성과 건안성을 얻은 후 남하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전략입니다

 제장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하므로 당 태종 이세민은 우선 가파른 산성인 안시성부터 점령하고자 한다. 기껏해야 10만명 정도의 고구려 병사가 지키고 있는 성이므로 심히 간단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성주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끈질긴 인물이다. 75일부터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한달이 지나도 도무지 무너지지가 않는다. 그것을 보고서 810일에 당 태종이 전군을 동원하여 토성을 계속 크게 쌓아서 반드시 안시성을 점령하라고 강력하게 명령한다;

그러나 공성작전과 토성건설작업 도중에 고구려군의 화살과 뜨거운 공격에 쓰러지는 당나라의 군사들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다. 910일이 지나 병사의 수를 계산해보니 50만 대군 가운데 20만명이나 사상자가 되고 만다.

이제 추위가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당 태종 이세민이 결단을 내린다; “전군 철수한다. 고구려군의 추격을 막아내면서 재빨리 당나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와 같은 상황의 전개를 간자와 척후의 보고를 통하여 받아본 윤책은 머리속이 복잡하다.

당 태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금년 5월에 신라군 3만명이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들이쳤지만 그것도 허사였다. 그만큼 고구려군이 강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저토록 강력한 고구려의 군대를 이기고 삼한일통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며칠을 고심한 끝에 윤책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고 있다;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두가지의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는, 고구려에서 내분이 발생하여 군부가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해야 한다. 그때 기습적으로 고구려를 공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

윤책이 당 태종의 원정실패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또 하나는, 공성작전이라고 하는 것이 수성작전보다 3배나 어려운 것이 맞다. 그러므로 50만명의 고구려 군사가 지키고 있는 성들을 얻기 위해서는 150만명의 군대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아무리 당나라가 대국이라고 하더라도 그만한 정예병이 없다. 따라서 정상적인 전쟁을 통해서는 도저히 고구려를 정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645년에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나섰지만 성공하지를 못하고 만주지방의 추위가 닥치기 전에 요동지방을 거쳐서 철수를 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큰 피해를 보고 만다. 늪지대를 통과하면서 후퇴가 늦어지자 그만 고구려의 추격군이 뒤를 쫓아와서 허기와 추위에 지친 당나라의 군사를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것이다.

 그 결과 무사히 당나라로 돌아간 군사의 수가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를 않는다. 그것을 보고서 고구려 정복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여론이 크게 형성이 되고 만다. 28세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고 동()돌궐과 토번을 정복하여 국토를 크게 넓힌 대()영웅 당 태종 이세민이다;

 

그렇지만 결코 정공법으로 고구려를 쳐서 정복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2년후 곧 서기 647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재침하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소모전에 불과하다. 그저 고구려의 국력신장을 방해하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하여 지치도록 만들고자 하는 고도의 심리전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전쟁의 후유증으로 이세민은 서기 649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의 뒤를 잇게 되는 당 고조는 결코 부황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싶지가 않다. 그와 같은 당 고조를 김춘추는 어떻게 설득하여 백제를 치고 또한 삼한일통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인가?...

선덕여왕 시대에 신라의 최북단 칠중성에서 오랜 세월 성주로 지내면서 재사 윤책은 그 점을 깊이 생각한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 지나고 마침내 선덕여왕의 말기인 서기 646년 말이 다가오고 있다;

 

 신라의 서라벌에서는 어떠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