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39(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1. 12. 31. 07:37

천년의 바람소리39(손진길 소설)

 

서기 63811월 중순에 알천 유수와 윤책 도독이 파주의 칠중성에서 고구려의 대군 4만명을 단 2만명의 신라군으로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장계가 서라벌에 도착하자 조정과 군부에서는 크게 환호성을 발하고 있다.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친 진흥대왕과 진평왕의 시대를 선덕여왕의 시대에 다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정치적인 의미를 재빨리 깨닫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는 인물이 바로 김비담이다. 그가 선덕여왕에게 진언한다; “폐하, 이것은 국가적으로 큰 경사입니다. 폐하의 치세에 이와 같은 놀라운 승리가 주어지고 있으니 대내외적으로 널리 선전을 해야 합니다… “.

선덕여왕이 경청하자 비담이 신이 나서 말한다; “우선 큰 전공을 세운 김알천 유수와 윤책 도독에게 특진의 상급을 내리셔야 합니다. 특히 5두품 귀족인 윤책 도독이 대도독으로 승진하게 되면 군간부들의 사기진작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을 크게 물리치면 비록 5두품의 신흥귀족이라고 하더라도 6두품의 혜택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

그 말을 듣자 선덕여왕이 고개를 크게 끄떡이면서 말한다; “좋은 생각입니다. 사실 군 지휘관의 대부분이 신흥귀족으로서 5두품과 4두품들이지요. 그들이 전공을 크게 세우면 6두품인 신라 6촌 구() 귀족들이 진급할 수 있는 상한선 제6관등 아찬 유수까지 오를 수가 있게 되니 그것이 골품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 신라에서는 실로 대단한 혜택이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시행하세요”.

그 결과 선덕여왕 통치 7년인 서기 63812월초에 진골 출신인 김알천이 제5관등 대아찬이 되어 군주의 칭호를 얻게 된다. 그리고 5두품인 윤책6두품이 얻을 수 있는 제7관등인 일길찬 대도독의 자리를 얻게 된다. 그것이 윤책과 함께 군생활을 시작한 기타 오인회 구성원들에게 진급의 기회를 일찍 가져오는 도화선이 된다.

따라서 다음해 서기 639년 정초가 되자 김유신, 김춘추, 최추랑이 모두 도독에서 대도독으로 승진한다. 그에 따라 근무지변경이 함께 이루어진다; 윤책 대도독이 낭비성에서 칠중성의 성주로 이동이 된다. 최추랑 대도독이 주재성에서 칠중성 가까이 낭비성주로 오게 된다. 김유신 대도독이 대야성을 떠나 당항성주로 부임한다;

 

군주로 진급한 알천공이 서라벌 조정으로 가게 되자 그에 발맞추어 조정에서 근무하고 있던 용수공서현공이 모두 제6관등인 아찬 유수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 군주로 승진하게 된다. 그리고 비담도 덩달아 승진하고 있다. 비담공이 제4관등 파진찬에서 제3관등 잡찬이 되어 일약 우의정에 해당하는 벼슬을 얻고 있는 것이다.

칠중성주로 부임한 윤책 대도독은 가장 먼저 그 지역의 정찰에 신경을 쓰고 있다. 지난 해 12월에 그곳에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기는 했지만 파주지역은 그에게 있어서는 생소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 지리에 밝은 길사 함윤을 앞장세워 10명의 척후조와 함께 그 지역을 철저하게 탐사한다;

그 결과 윤책은 깊은 산도 있고 넓은 들판도 있으며 또한 임진강과 그 지류가 풍성한 파주지역이 마음에 든다. 따라서 윤책이 내심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지역은 북으로는 고구려로 달려갈 수 있고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로 다리를 뻗고 있어 이른바 삼한의 중앙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장차 예맥족의 중심으로서의 이익을 능히 향유할 수가 있을 것이야… “.

윤책의 판단이 그러하기에 훗날 그는 칠중성이 있는 파주지역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자 한다. 윤책은 아예 가족을 솔거하여 파주로 이주하여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재사인 그의 생각으로는 신라가 삼한일통을 이루게 되면 서라벌을 떠나 파주지역으로 천도하는 것이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좋은 출발이 될 것이다.

따라서 윤책이 먼저 그곳에 자리를 잡는 것이 후손을 위해서 좋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예지하고 있는 미래의 중심권역으로 자신의 가문이 이주하는 큰 결단을 내리고 있다;

 

 그에 따라 그는 칠중성주를 오래 지내고자 한다. 그 결과 윤책은 훗날 그 지역의 지방군주로 봉직하게 된다.

단지 먼 훗날 신라가 고려에 병합되고 나자 윤책의 자손 가운데 뛰어난 인물 윤신달이 서라벌 유수가 되어 옛 고향을 찾아간다. 윤신달이 노후를 그 옛날 조상들이 살던 기계에서 보내게 되면서 그의 자손 일부가 경주 인근 기계에서 살게 될 따름이다;

윤책 대도독이 서기 639년 정월에 파주의 칠중성주가 되어 3년간 지내는 동안에 별다른 적의 침입이 없다. 신라로서는 639년에서 641년까지의 3년간이 평화를 누린 좋은 시기이다. 선덕여왕은 모처럼 재위 8년부터 10년까지 평안을 누리면서 나름대로 두가지의 큰일을 하고 있다; 하나는, 오늘날 강릉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하슬라 주를 크게 키우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는, 첨성대를 건립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먼저 하슬라 주의 중앙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하고 있다;

 

 여왕은 서라벌이 너무 동남쪽에 치우쳐 있어 전국을 통치하기에 애로가 있으므로 그것을 조금이라도 극복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선덕여왕은 영특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국왕이다.

또한 여왕은 서라벌에 첨성대를 건립하고 있다. 당시의 수학과 천문학의 발달을 첨성대에 담도록 여왕이 지시하고 있는데 그 대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먼저 신라의 학자들이 첨성대의 기단을 일년 12달을 상징하는 12개의 큰 돌로 쌓기 시작하고 그 높이를 27개의 돌을 쌓아 선덕여왕이 신라 제27대 왕임을 표현하고 있다.

(2)  그리고 정남쪽에 창을 내어 방향을 알 수 있도록 하면서 출입구로 사용하고 있다. 가장 상층부는 동서남북을 알 수 있도록 4개의 돌을 사각으로 쌓고 있으며 첨성대는 도합 365개의 돌을 사용함으로써 일년이 365일임을 나타내고 있다.

(3)  전체 모양은 우아한 치마형태로 하여 선덕여왕 때에 건립이 된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와 같은 과학선진국 신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여왕이 선덕인 것이다. 한마디로, 신라는 당대에 있어서 세계의 가장 선진문명을 지니고 있던 고대국가라고 말할 수가 있다.

(4)  물론 당시의 선진문물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당나라가 각각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당나라와 선진문물을 교류하는 데에 있어서도 적극적이다. 더 많은 신라의 스님을 당나라로 보내고 있으며 또한 똑똑한 젊은이를 당나라로 보내어 그곳의 국학에서 공부하도록 만들고 있다. 소위 대당 유학을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 통치 10인 서기 641년이 되자 신라에서는 경축분위기이다. 비담공의 건의로 선덕여왕은 조정대신과 군부의 지도자들에게 승진의 기쁨을 주고 있다. 그에 따라 윤책최추랑 그리고 김유신김춘추가 모두 유수가 된다. 그들은 이제 지방의 군단위를 다스리는 통치자 집단에 속하게 된다.

그런데 다음해 곧 6428월이 되자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그 전해 곧 641년에 백제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자왕이 윤충에게 대군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침공하게 한다. 그런데 유능한 윤충이 기여이 대야성을 점령하고 만 것이다.

신라의 대야성주로 봉직하고 있던 진골 김품석은 장인 김춘추의 권력을 크게 의지하여 그만 포악한 성주가 되고 만다. 부하의 아내를 겁탈하는 일도 서슴지 아니하였기에 원한에 찬 부관 검일이 그 보복으로 백제군을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백제군에게 변변하게 대항해보지도 못하고 성주 김품석은 제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항복한다;

 

 그 비겁한 모습을 보고서 백제의 충신 윤충이 그 목을 치도록 수하에게 명령하고 만다. 그에 따라 성주부인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도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 비보를 들은 김춘추가 식음을 전폐하고 스스로 칩거에 들어간다. 신라의 조정에서는 사후처리가 급하다. 따라서 유수 김유신을 승진시켜 급히 군주(軍主)로 삼아 오늘날의 경산인 압량으로 보낸다. 왜냐하면, 백제군에게 압량 지역마저 뚫리게 되면 그 다음은 서라벌이 위험한 것이다.

독자적인 압량 지역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군주가 되자 김유신이 금성, 고포성, 우곡성 등 관내 3성의 방어태세를 철저히 한다;

 

 따라서 백제군이 김유신의 방어막을 뚫지 못하고 낙동강의 서편에서 공격을 멈추게 된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자 서기 645년에 김유신이 마침내 대야성을 수복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한편 서기 6428월에 백제 의자왕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가 지키고 있는 수원화성의 당항성을 공격한다;

 

 의자왕은 당항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7월에 벌써 한강유역에 있는 신라의 작은 성 40개를 점령하고 있다.   

그와 같은 국가적인 위기를 보고서 칩거하고 있던 김춘추가 대문을 열고 나와서 경산지역 압량주의 김유신을 만나고 그 다음에는 파주지역으로 가서 칠중성의 윤책을 방문한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백제와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치고 백제 의자왕에 대한 자신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걸음이다.

윤책이 김춘추에게 말한다; “우리 신라가 화랑제도를 더욱 활성화하고 국력을 막강하게 신장하여 자력으로 삼한일통을 이루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장기적인 대책에만 매어 달릴 여유가 없군요. 따라서 춘추공이 고구려와 당나라를 방문하여 최고지도자를 만나 백제의 줄기찬 공격만이라도 막아낼 수 있는 군사적인 동맹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김춘추가 크게 고개를 끄떡이면서 전적으로 동감을 표현한다. 그렇게 되자 김춘추가 다시 압량주의 김유신에게 말을 달려가서 그와 상의한다. 그 결과 최근 서기 642년 음력 10월에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의 최고지도자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부터 만나보고자 한다. 과연 춘추공의 고구려에 대한 외교가 성공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