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3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1. 12. 29. 14:30

천년의 바람소리37(손진길 소설)

 

서기 635년은 덕만공주가 신라의 국왕으로 즉위한지 4년째가 되는 해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은 즉위하였을 때 벌써 50대의 중년여성이다. 덕만은 결혼하지 아니하고 독신으로 지낸 공주인데 부친 진평왕은 그녀를 총애했다. 똑똑하고 예지의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기에 자신의 왕좌를 그녀에게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전례에 없는 일이라 화백회의를 장악하고 있는 구 귀족들의 반대가 만만하지 아니할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진평왕은 진작부터 그 대책을 마련하여 시행한 것이다. 그것이 구 귀족에서 소외되고 있는 가야계 진골 김서현 장군을 끌어들이고 구 귀족의 세력에게 폐위를 당한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수 장군을 중용한 것이다.

게다가 김용수의 아들 김춘추와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 형제에게도 관심을 두었다. 나아가서 김용수의 사위인 윤책과 최추랑도 근위파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러한 진평왕의 계책이 덕만공주를 신라의 국왕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단 덕만공주가 신라의 여왕이 되고 보니 국정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유경험자의 도움이 절실하다. 따라서 윤책의 견해를 수용한 김용수 장군의 건의를 참고하여 선덕여왕은 상대등 을제공을 자신의 배우자로 삼고 그의 도움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을제공의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진작에 사직의 의사를 내부적으로 밝히고 있다. 선덕여왕이 남모르게 고민하고 있다; “을제공이 물러나게 되면 나는 누구와 국사를 상의해야 하는가?... “.

그때 선덕여왕의 고민을 간파하고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슬쩍 묘책을 제공하고 있는 대담한 인물이 있다. 그가 근위파의 수장이 되고 있는 김용수 대도독의 이복동생 비담이다. 나이가 선덕여왕보다 2살 많은 비담은 머리가 좋고 천성적으로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감히 여왕에게 접근하는 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다.

김용수 도독이 수년 전 윤책이 데리고 온 비담을 시험한 후에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부관으로 삼았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지 아니하여 비담이 여왕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신임을 얻고 비선실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김용수와 김서현이 깜짝 놀라고 있다. 그렇지만 비담 역시 폐위를 당한 진지왕의 아들이므로 구 귀족과는 어울릴 수 없는 인물임을 알고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그런데 선덕여왕이 즉위한지 4년이 되자 비담은 더 이상 비선실세가 아니라 표면에 나타나서 신라의 왕궁과 조정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그가 진골 신분임을 밝히고 또한 선덕여왕의 새로운 배우자라는 위세를 내세워 5관등 대아찬 군주의 자리를 단숨에 차지하고 만 것이다;

수십년간 전장에서 살아온 김용수 대도독과 김서현 대도독은 그것을 보고서 기가 막힌다. 자신들보다 2단계나 높은 관직을 단숨에 차지하고 있는 비담의 처세가 눈에 거슬리는 것이다.

그래서 김용수 대도독이 하루는 서라벌을 방문한 맏사위 윤책에게 넋두리 삼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담이 서라벌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야. 갑자기 여왕의 배우자가 되고 군주의 자리를 꿰차고 말다니이제는 나보다 관등이 높아져 있어. 앞으로의 일이 나는 걱정이야… “.

그 말을 듣자 잠시 생각을 하더니 윤책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인어른,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저의 사제이기도 한 비담은 영리하고 기회를 포착하는 재주가 비상하지요. 하지만 그는 지지세력이 많지 않아요. 게다가 그는 구 귀족의 편이 결코 될 수가 없지요… “.

잠시 숨을 쉬고서 윤책이 천천히 설명을 계속한다; “문제는 그러한 비담을 자신의 배우자로 맞이하고 또한 조정에 높은 자리를 마련하여 주고 있는 여왕의 생각이 더 중요하지요. 제가 판단하기에 여왕은 일종의 견제와 균형의 장치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이 무슨 말인가?... ’ 의아한 듯이 김용수가 윤책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때 윤책의 분명한 말이 들려온다; “장인어른과 김서현 대도독이 여왕을 지지하고 있지만 그것은 군부에서의 일입니다. 그에 따라 조정에서는 문신 가운데 마땅히 의지할 만한 근위파가 드물지요. 게다가… “.

김용수 대도독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떡이는 것을 보고서 윤책이 이어서 말한다; “사실 두 분의 세력이 너무 커지는 것도 여왕으로서는 걱정입니다. 국왕의 자리는 권신을 견제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여왕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결코 조정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가 없는 비담과 같은 인물이 절대 충성파로서 필요하지요… “.

그때서야 김용수 대도독이 아하하고서 긴 숨을 내쉬고 있다. 선덕여왕의 내심을 알 수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맏사위 윤책에서 하나를 더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복동생 비담을 앞으로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을까?... “;

 

윤책이 빙긋 웃으면서 즉시 대답한다; “장인어른, 어차피 비담은 이복동생입니다. 그리고 진지왕의 서자가 아닙니까? 적장자이신 장인께서 그를 포용해야지요. 그저 매사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적당한 거리만 유지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비담도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니 결코 장인어른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할 것입니다”.

서기 635년 가을 어느 날 선덕여왕이 자신의 애인이 되어 있는 비담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을제공이 사직을 청하고 있어. 게다가 군부에서 용수공과 서현공의 세력이 너무 커지고 있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

영리한 비담이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폐하께서는 상대등 을제공의 사직을 허락하고 그 자리에 이찬 수품공을 승진시켜 앉히면 됩니다. 이찬의 벼슬을 오래한 수품공이므로 상대등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 자리를 허락해준 여왕에게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

 

 여왕이 경청하자 비담이 자신 있게 말한다; “군부에서 상호견제를 하도록 만들자면 또 하나의 근위파가 필요하지요. 따라서 산동성 신라소에 나가 있는 알천공을 귀국하게 하여 대야성주로 임명하고 앞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서 군부의 인사를 시행하면 됩니다. 더구나… “.

비담이 신이 나서 계속 설명한다; “알천공은 귀족들의 신임이 두텁고 굉장히 꼼꼼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가 대야성주로 있는 한 백제가 쉽게 동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고허성주인 김용술 대도독을 산동성 신라소의 책임자로 다시 보내고 지금의 대야성주인 일품 대도독을 고허성주로 임명하시면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 신라가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선덕여왕이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한마디로, 탁견이기 때문이다. 애인 비담에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이 엿보이고 있다. 그래서 여왕이 비담을 자문역으로 삼아 그의 의견을 자주 청취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일의 진행을 보면서 김용수 대도독과 김서현 대도독이 다시금 걱정이 된다. 나이 50이 될 때까지 천하를 떠돌다가 뒤늦게 신라의 조정에 발을 붙인 비담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덕여왕이 비담을 지나치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장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는 묘수가 없다는 것이 고민이다. 그래서 그대로 두고 보고 있는 사이에 자꾸만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드디어 서기 63512월에는 알천 대도독이 귀국하여 대야성주로 부임한다;

그리고 다음해 곧 서기 6361월에는 을제공이 조정을 떠나고 이찬 수품공이 상대등이 되어 조정의 일은 물론 화백회의의 일까지 챙기고 있다. 그렇게 선덕여왕의 치세 5년째를 맞이하고 있는데 갑자기 서부전선에서 이상징후가 발생하고 있다. 은밀하게 백제군이 5월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한 조짐을 알아챈 인물이 두사람이다. 앵잠성주인 윤책 대장군과 대야성주인 알천 대도독이다. 먼저 움직인 사람이 알천 대도독이다. 그는 기잠성의 백제군의 숫자가 갑자기 증가하더니 일부가 은밀하게 북진하고 있는 것을 첩보를 통하여 인지하고서 자신도 대야성의 정예병을 지휘하여 비밀리에 옥문곡에 매복한다.

한편 앵잠성의 윤책 대장군도 그 기미를 알고서 3천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은밀하게 옥문곡을 지나 독산성 남쪽산지에서 매복한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남쪽에서 백제군과 신라군 사이에 백병전이 전개되고 있다. 백제군을 지휘하고 있는 자는 우소 장군이다.

우소 장군은 백제의 소수 정예병으로 대담하게 옥문곡을 통과하여 신라의 독산성을 기습적으로 차지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기잠성에서 출발한 백제군의 이동이 신라진영에 포착되어 옥문곡 근처에서 알천 성주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척후를 통하여 윤책은 그 전투가 알천 성주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상상외의 사건이 발생한다. 어떻게 전장을 벗어났는데 백제군의 일부가 은밀하게 북진하여 독산성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 백제군의 복색이 이상하다. 경장차림으로 산을 타고 있는데 그 속도가 대단하다. 특수훈련을 받은 참수조가 틀림없다. 백제가 자랑하고 있는 인자(忍者)들이다. 따라서 윤책이 신중하게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일망타진을 시도한다. 그들을 놓치게 되면 독산성주가 살해당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다행히 2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백제의 특수부대원을 전원 처리한다. 그들은 도저히 윤책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게 되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원 독약을 삼키고 죽고 만다. 참으로 대단한 참수조이다. 그것을 보고서 윤책이 백제의 무서움을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러한 한차례의 전투가 벌어진 후에 모든 전선이 한해동안 조용하다. 백제의 무왕도 이제는 늙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신라를 계속 괴롭히던 그가 한동안 숨 고르기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수순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