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40(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1. 1. 15:37

천년의 바람소리40(손진길 소설)

 

10. 연개소문의 등장과 재사 윤책

 

신라는 애초 서라벌을 중심으로 하여 살고 있던 6부족이 연합하여 하나의 왕국을 세운 것이다. 구체적으로, 6부족장의 의결기관인 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왕과 왕비를 결정하고 그들을 6부족에서 분리하여 성골로 만들어 줌으로써 왕정국가 신라가 성립된 것이다;

 

그에 따라 신라의 국왕은 세습제이며 국왕의 자식과 손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왕위 계승의 서열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이름하여 성골이다. 그 서열이 잘 지켜질 때에는 화백회의가 별도로 개입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두가지의 경우가 발생하면 화백회의가 열리게 되고 성골의 일에 관여하게 된다;

하나는, 서열을 무시하고 부마 집안이 득세하여 왕권을 차지하는 경우이다. 그때는 부마 집안과 화백회의 사이에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그 힘겨루기에서 부마가 승리하여 아예 왕가의 성이 바뀐 때도 있다. 박씨가 석씨로 그리고 나중에 김씨로 왕의 성씨가 교체가 된 경우가 그러하다.

또 하나는, 성골 내에서 국왕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화백회의의 귀족들에게 폐위를 의결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경우이다. 매우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윤책이 알기로는 제25대 진지왕이 대비와 전부인 미실의 요청으로 화백회의의 구 귀족에 의하여 폐위가 결정되고 마침내 피살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신라의 역사에 비추어 제26대 진평왕이 왕자가 아니라 공주를 자신의 후계왕으로 세운 경우는 특이하다. 그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평왕은 화백회의를 장악하고 있는 신라6촌의 수장들인 구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오랜 세월 근위파 신흥귀족을 육성하기 위하여 엄청난 공을 들인 것이다.

진평왕이 의도적으로 친위 정치세력으로 키운 신흥귀족은 본래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진골들이다. 예를 들면, 폐위를 당한 진지왕의 자손들이 그러하고 신라에 나라를 바친 가야왕의 후손들이 그러하다. 그들이 성골과 6두품 귀족 사이에 소위 진골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는 있지만 정치적인 관여는 애초 금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진평왕이 그들에게 높은 벼슬을 하사하여 6두품과 5두품이 장악하고 있는 화백회의에 참여시킴으로써 신라의 권력구조가 달라지고 있다. 그에 따라 신라6촌 가운데 세력이 강한 3부족의 집안이 6두품, 나머지 3부족의 집안이 5두품이라고 하는 경계도 허물어지고 만다.

신라 6촌의 후손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인 진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모두가 6두품이 되어 내부 결속력을 다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본래 신라 6촌이 아닌 다른 성씨들이 전공을 세우고 5두품의 자리까지 올라오게 된다. 서라벌 북쪽에 살고 있던 윤책의 집안이나 유강의 집안이 그러하다.

그리고 재사 윤책이 보기에 진평왕의 시대에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진골들이 이제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공주가 여왕이 되어 신라를 다스리고 있는 비정상적인 성골의 시대를 빨리 끝내고 남성인 자신들이 국왕이 되어 진흥왕 때와 같은 힘있는 신라를 다시 만들어 보고자 그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꿈을 꾸고 있는 인물 가운데 김비담김춘추 그리고 김알천이 있다. 과연 그들의 힘겨루기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신라의 재사인 윤책이 그 점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사정도 신라의 경우와 비슷한 점이 있다.

고구려의 출발 역시 5부족의 수장들이 모여 제가회의에서 연맹왕을 세움으로써 시작되고 있다. 그런데 신라와의 차이점은 상당기간 고구려는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왕성으로 사용하고 있는 국왕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연맹왕이 되어 5부족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연맹왕은 자신의 부족이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기에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부족의 성씨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5부족의 하나인 연노부에서 고구려의 연맹왕이 나타났다.

그러나 계루부의 힘이 강해지자 연노부를 제치고 연맹왕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스스로 고구려의 국왕임을 선언하였는데 초대 동명성왕이 그러한 인물이다. 그는 영리하게도 자신의 왕비를 세력이 강한 다른 부족에서 맞이함으로써 철저하게 연노부의 세력을 억제한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후계왕을 결정하고 세습을 실시했다. 따라서 고구려 왕조의 시작을 흔히 동명성왕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6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서기 642년에 갑자기 연노부 출신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100명이 넘는 대신들을 쳐죽이고 영류왕마저 살해하고 만다. 연개소문은 영류왕 고건무의 조카인 고장을 보장왕으로 세우고 실권은 자신이 대막리지가 되어 행사하게 된다.

군부 강경파의 세력을 규합한 연개소문은 정변의 명분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유부단한 영류왕과 그의 신하들로서는 당 태종의 침략을 막아낼 수가 없다. 부득이 정권교체가 필요했다. 나는 강력한 고구려를 만들어 당나라의 침략을 사전에 저지하고 말 것이다”. 그때가 서기 642년 음력 10월이다;

 

그런데 그해 말에 신라에서 이찬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고자 고구려로 들어온다. 김춘추가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인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만나러 간다고 하므로 신라에서는 그의 벼슬을 임시로 좌의정에 해당하는 제2관등 이찬으로 올려준 것이다.

하지만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만나서 동맹의사를 타진했더니 그가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다. 그의 강경한 말이 다음과 같다; “나는 당나라의 침입을 막고자 정변을 일으켰으며 지금 반당(反唐)세력을 규합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는 내가 보기에 친당(親唐)세력이다… “;

연개소문이 사색이 되어가는 김춘추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위협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내가 있는 한 신라와 동맹할 이유가 없다. 나는 백제와 동맹하여 당 태종의 동진을 막을 것이다. 그러니 편히 신라로 돌아가고 싶으면 우리 고구려에게서 뺏아간 성들을 내놓도록 하라. 조령과 죽령 이북지역을 내놓지 않으면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

김춘추가 연금상태에 있다가 천우신조로 탈출하여 고구려와의 접경에 있는 칠중성으로 들어온다. 윤책을 만나서 김춘추가 연개소문의 답변을 이야기했더니 그때서야 재사 윤책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춘추공,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사실 신라가 아니라 백제가 더 필요한 국가입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백제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구려는 영토가 넓지만 생산성이 낮은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비옥한 백제의 농산물이 고구려 백성들에게 당장 필요하지요. 그리고… “;

 

김춘추가 경청을 하자 윤책이 이어서 말한다; “백제는 고구려와 뿌리가 같다는 동족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라는 그러한 의식이 별로 없지요. 결국 신라는 고구려를 버리고 당나라와 연합할 수 있지만 백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차이를 영리한 연개소문이 벌써 인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

듣고 보니 옳은 말이다. 따라서 김춘추가 고개를 끄떡이면서 이왕 재사 윤책을 만난 김에 그의 의견을 묻는다; “윤공께서는 연개소문이 당 태종 이세민과 전쟁한다면 누가 이길 것으로 보십니까?... “. 윤책이 잠시 김춘추를 응시한다.

그 다음에 무거운 입을 떼고 있다; “연개소문과 이세민은 당대에 대영웅들이지요. 그러니 서로 싸운다면 누가 이길지 개인적으로는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을 살펴보면 크게 어렵지도 않습니다. 두가지 점에서 이세민이 유리하지요; 하나는, 이세민이 626년에 벌써 대당의 황제가 되어 입지를 굳혔지요. 그와 달리 연개소문은 최근 642년에 비로소 대권을 쥐었어요. 그러니 전쟁의 준비기간으로 보아 이세민이 유리합니다. 또한… “;

 

또 무엇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 김춘추가 윤책의 입만 쳐다본다. 그러자 윤책이 분명하게 말한다; “당 황제인 이세민의 영향력과 고구려의 막후실세인 연개소문의 영향력은 차이가 납니다. 이세민은 황제이면서 동시에 군부의 최고통치자이지요. 그러니 국내에서 그를 반대할 인물이 없어요. 하지만 최근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한 연개소문은 다릅니다… “.

윤책이 잠시 숨을 쉬고서 이어 말한다; “비록 숨을 죽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반대세력인 온건파가 여전히 존재하고 또한 허수아비 국왕이라고 하더라도 왕당파가 그 주위에 몰려들 수가 있지요… “. 그 말을 듣자 김춘추가 여러 번 고개를 끄떡인다.

김춘추가 잠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본다; “내가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고자 앞뒤를 가리지 아니하고 북으로 올라가서 연개소문을 만난 것이 경솔한 행동이었구나. 그러나 이제라도 연개소문의 내심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길은 하나뿐이다. 당으로 건너가서 태종 이세민을 만나 함께 백제를 치자고 설득하는 것이 정답이구나!... “. 그렇지만 이세민이 워낙 신중한 인물이라 김춘추도 나름대로 철저한 준비를 사전에 하고자 한다.

연개소문과 회담을 한 경험을 가지게 된 김춘추는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그러하지가 못하다. 당장 백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당나라 군대의 힘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듬해 곧 선덕여왕 통치 13년인 서기 643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 이유는 뻔하다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사를 끌어 모으고 있는지라 별도로 신라를 도와줄 군사가 없는 것이다… “. 따라서 당 태종은 그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를 괴롭히지 말라고 별로 실효성이 없는 요청만 할 따름이다.

드디어 서기 645년에 당 태종 이세민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떠나기 전에 그는 필요에 의하여 신라와 동맹관계를 수립하고 있다. 그에 따라 신라는 당과 고구려와의 전쟁에 어떻게 휘말리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