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00강(창36:31-3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19일(수)
에돔의 왕들의 이름과 그 도성의 이름을 등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창36:31-39)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의 이름만 등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창36:31) 그렇다면 그 이후의 에돔 왕들의 이름은 어디에 실려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세일 산과 그 주변의 들판을 모두 점령하여 강력한 부국을 만들겠다는 에서의 야망을 성취한 자는 그의 장남이었던 엘리바스로 보입니다. 그는 범과 같이 용맹스러운 여섯 명의 아들을 족장으로 거느리고 있는 대 족장입니다(창36:11-12, 15-16). 또한 손자 가운데에는 후계체제를 든든히 하고 있는 고라 족장과 같은 영걸이 장손입니다(창36:16a). 그러니 엘리바스 대 족장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 에서는 엘리바스만큼의 운신의 폭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세 아내 가운데 가장 힘이 있는 아내 오홀리바마가 바로 호리 족속의 권문세가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잇게 되는 장남 엘리바스는 다릅니다. 그는 에서보다 더 용맹한 자이며 지장(智將, very intelligent leader)으로 보입니다. 엘리바스가 얼마나 뛰어난 자인가를 일찍 눈치를 채게 된 호리 족속의 대 족장 로단은(창36:20) 얼른 자신의 누이동생인 딤나를 그의 첩으로 들여보내서 내밀하게 일종의 결혼동맹을 맺습니다(창36:12, 22). 마치 여리고 성읍의 기생 라합과 같이(수2:8-21, 6:25) 민첩하게 말을 갈아탔기 때문에 훗날 로단 대 족장의 집안은 딤나가 족장이 되고 그 슬하에서 모두 살아남게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창36:40).
에서의 경우를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는 친정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오빠가 모두 족장입니다(창36:20-21, 25). 호리 족속의 족장 전체 7명 가운데 무려 3명이 자신의 친정 집 식구입니다. 그러하니 당대에 오홀리바마의 위세가 에서의 집안에서 어떠했겠습니까? 마치 근세 조선의 창건자인 이성계 집안에서 후처 강씨의 위세를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강비는 그녀의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아서 감히 이성계의 뒤를 잇는 왕으로 세우고자 획책했던 여걸입니다. 물론 그녀의 꿈은 이복 형인 태종 이방원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에서의 집안에서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친정 집안 3명의 호리 족장의 세력을 등에 업은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가 자신이 낳은 세 아들을 모두 족장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창36:18). 그리고 나서 그녀는 에서의 집안과 호리 족속의 대 통합을 추진한 것으로 보입니다(창36:18, 20-21, 25). 한 마디로 오홀리바마 역시 당대의 여걸이며 포부가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영민한 에서의 장남 엘리바스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엘리바스가 그 낌새를 알아채고서 선수를 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복 동생 르우엘의 집안과 연합하여 불시에 7 호리 족장과 오홀리바마의 세 아들을 습격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따라서 호리 족속은 어이없게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 대신에 엘리바스는 서모 오홀리바스와 자신의 애첩인 딤나 등 호리 족속의 여장부들을 앞장 세워서 두 민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만드는데 박차를 가합니다. 그러한 탕평책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제36장 제40절 이하의 기록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쨌든 엘리바스의 가문이 중심이 되어 호리 족속을 에서의 집안에 흡수합니다. 정복자인 에서의 집안은 수가 적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인 호리 족속은 그 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왕정을 형성하기 이전에는 과도기적으로 탕평책을 사용합니다. 여러 집단의 이익을 집약하는 대 통합 족장회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모세가 신기하게도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창36:40-43). 그렇지만 모세는 그 이전에 왕정의 성립과 변천에 대하여 미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목이 ‘에돔의 왕들’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창36:31-39’절입니다. 그 특징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에돔 민족의 왕정의 수립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왕정의 형성에 비해서 무척 빠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왕정의 수립이 엄청 늦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본래 신정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그리고 아론과 같은 대 제사장이 백성을 이끌었으며 그 뒤를 이어서 모세와 아론의 권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대 사사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나서 국난을 극복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이스라엘 민족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열두 지파가 모두 족장과 장로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를 더 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긴 세월 사사 시대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주변의 왕국들이 강력한 왕을 내세워서 대군으로 계속 침략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파 별로 국론이 분열이 되고 국력이 분산이 되어 있어서 도저히 효율적으로 적의 침략에 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BC 1,446년경에 출애굽을 한 이후 400년 가까이 지나서 BC 1,051년경에 비로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삼고서 왕정을 운영하게 됩니다.
둘째로, 호리 족속을 흡수한 에돔 족속의 입장은 이스라엘과 매우 다릅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두 민족의 연합적인 성격으로 족장 대 통합의 시대를 지나지만(창36:40) 결국은 하나의 새로운 민족, 곧 에돔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합니다. 그 후 강력한 왕정을 수립합니다(창36:31). 물론 최초의 왕가는 대 족장 엘리바스의 후손 가운데서 나왔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모세의 기록에 따르면 에돔 나라 초대 왕의 이름이 브올의 아들 벨라입니다(창36:32a). 그리고 최초의 왕도의 이름은 ‘딘하바’입니다(창36:32b).
셋째로, 모세가 에돔의 초대 왕인 벨라를 비롯하여 8명의 왕의 이름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창36:32-39). 그의 기록을 참조하여 유다의 역사가들은 히브리 정경 역대상에 에돔 왕들의 이름을 또한 적고 있습니다(대상1:43-51). 그런데 특이한 점이 두 가지 발견이 됩니다; “첫째, 무사히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있는 에돔 왕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죽고 나면 다음 왕이 들어서는데 그들은 왕의 아들들이 아닙니다. 그 만큼 하나의 왕가가 2대를 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창36:32-39). 둘째, 아예 왕도까지 옮기는 천도가 두 번 있습니다(창36:32, 35, 39). 그것은 왕조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왕도의 귀족인 기득권층에서 새로운 왕이 나온 것이 아니라 지방 귀족출신이 혁명을 일으켜서 왕이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넷째로, 8명의 왕들이 죽을 때까지 에돔 왕국이 지속이 되었다고 하면 그 기간은 200년이 넘습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에돔 왕국의 존속기간을 대략 BC 13-11세기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더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통치기간은 BC 1,051-1,011) 즉위 초기부터 주변의 적대국들 곧 모압, 암몬, 에돔, 소바의 왕들과 전쟁을 했습니다(삼상14:47). 그런데 묘한 것은 ‘소바의 왕들’이라고 표현을 하면서 구태여 ‘에돔의 왕’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둘째, 그 점은 다윗 왕의 일대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염해에서 에돔 사람 일만 팔천 명을 죽입니다(삼하8:13). 그리고 군대를 주둔하여 아예 에돔 땅에 군정을 실시합니다(삼하8:14). 그 때에도 에돔 왕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의로 그렇게 누락을 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전에 다윗이 에돔에 있을 때에 군대 지휘관 요압이 가서 죽임을 당한 자들을 장사하고 에돔의 남자를 다 쳐서 죽였는데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애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6달 동안 그곳에 머물렀더라.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의 아버지 신하 중 에돔 사람 몇몇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 하여 미디안을 떠나 바란에 이르고 거기서 사람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서 애굽 왕 바로에게 나아가매 바로가 그에게 집과 먹을 양식을 주며 또 토지를 주었더라. 하닷이 바로의 눈 앞에 크게 은총을 얻었으므로 바로가 자기의 처제 곧 왕비 다브네스의 아우를 그의 아내로 삼으매”(왕상11:14-19). 다윗 시대에도 에돔에는 왕이 있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에돔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인종청소의 현장에서 왕손인 하닷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에돔의 왕인 아버지의 신하들의 도움으로 에돔을 탈출하여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애굽의 황제인 바로가 하닷을 우대하고 있습니다. 하닷이 왕자의 신분이므로 기꺼이 그의 망명을 허용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제를 그의 아내로 줍니다. 이웃 나라 왕에 대한 대우를 망명한 에돔의 왕손에게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교적인 전략적 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에돔의 직계 왕손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대접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비추어보자면, 다윗은 에돔의 왕가를 전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에돔 왕들의 흔적까지 없애버린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유다의 조상인 야곱 곧 이스라엘의 형이 되는 사람이 에서입니다. 그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 족속입니다. 그러므로 친척 집안을 완벽하게 인종청소하고 있는 다윗이 과연 하나님 앞에 의인일까요? 역사적으로 많은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대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기록도 그 점을 건너뛰고 있습니다. 에돔의 왕들이 통치하던 시대는 정확하게 ‘이스라엘의 왕이 있기 전’이라고 못을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6:31). 곧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BC 1,390-1,050)에 에돔의 왕들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언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이 에돔의 왕가를 끝장내었거나 아니면 에돔 자체 내에서 왕조가 내부분열을 일으키고 사라졌다는 뉴앙스를 크게 풍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 왕에 의하여 저질러진 에돔 족속과 그들의 왕가에 대한 무자비한 인종청소를 감추려고 하는 기록으로 보입니다.
만약 모세의 창세기 기록이 특히 본문이 정확한 기술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서에 훗날 에돔의 왕가의 이야기가 한 번쯤은 더 기록이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오로지 창세기 제36장 본문과 그것을 재 인용하다시피 하고 있는 역대상의 기록만이 전부입니다(대상1:43-51). 그것도 거의 복사를 하고 일부는 왕의 이름이 조금 발음이 틀리도록 수록을 하고 있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해서 무신경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정통성만을 내세우고 있는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에돔과 애굽 그리고 앗수르 등 모든 이방의 땅과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에 비추어볼 때, 처음부터 예정이 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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