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195강(창35:28-29, 36:6-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2월 16일(주일새벽)
180세에 임종을 맞이하게 되는 이삭은 이스라엘의 자손과 몇 년을 헤브론에서 함께 살게 된 것인가?(창35:28-29a)
야곱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방법은 창세기에서 다음과 같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첫째, 요셉이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 풍년과 2년째 흉년을 맞이하고 있을 때에 가나안의 가족들이 이민을 오게 됩니다(창41:46, 45:6). 그 때의 야곱의 나이가 130세입니다(창47:9). 그러므로 당시 39세인 요셉과 아버지 야곱의 나이 차이는 91세입니다. 둘째, 요셉은 야곱이 가출을 하여 14년째 무료로 장인 라반의 머슴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태어난 아들입니다(창30:24-25). 그러므로 야곱의 가출 나이는 77세입니다. 셋째, 야곱은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고 가나안 아버지의 집으로 출발합니다(창31:41-42). 그러나 직행을 하지 아니하고 숙곳과 세겜에서 여러 해를 보내게 됩니다(창33:17-20). 그가 지체한 햇수를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그러나 대략 짐작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겜 사건을 일으키고 벧엘로 도망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4:25-35:5). 그 때의 장자 르우벤의 나이가 약관인 20세로 보입니다. 그의 동생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차고서 종들을 이끌고 세겜 성의 히위 족속 남자들을 습격하여 모두 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34:25).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7세 이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남행을 합니다(창35:16). 그러나 뜻밖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애처 라헬이 죽게 됩니다(창35:17-18). 그녀를 베들레헴 부근에 장사를 지내고 야곱은 그 서쪽 에델 망대 부근에서 한동안 목축을 합니다(창35:19-21). 그리고 나서 드디어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창35:27).
이상에서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만약 야곱의 장남 르우벤의 나이가 20세 정도되었을 때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 헤브론으로 왔다고 한다면 그의 나이가 산출이 됩니다; 장남 르우벤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7년 동안 무료로 머슴살이를 하고서 첫날 밤을 라헬이 아닌 레아와 잘못 치르고서 그 이듬 해에 얻게 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77세에 외삼촌의 집을 찾아온 야곱이 84세가 되자 합방을 합니다. 그는 85세에 장남 르우벤을 레아로부터 얻습니다. 르우벤의 나이가 20세쯤 되었을 때에 헤브론에 당도하여 아버지 이삭을 상봉합니다. 그러므로 그 때의 야곱의 나이는 105세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60세에 에서와 야곱 쌍둥이 아들을 얻은 이삭의 나이는 165세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이삭은 165세에 아들 야곱을 다시 만나고 15년 이상을 야곱의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헤브론에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창35:27-29).
부친상을 치르고 있는 상주의 이름, 그 서열 ‘에서와 야곱’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창35:29b)
고대사회에서 서열은 엄청 중요합니다. 신분사회이므로 서열이 뒤바뀐다고 하는 것은 혁명이 있었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그런데 부친 이삭의 초상을 치르고 있는 상주들의 이름을 보게 되면 에서와 야곱의 서열에 있어서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바라보자면 그들 형제에 있어서는 그 어떤 혁명적인 신분의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에서는 여전히 앞 서열이며 형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대를 계승하고 있는 새로운 족장입니다. 야곱은 그의 동생이며 신하와 같습니다.
벌써 15년 전에 야곱은 벧엘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이 ‘이스라엘’로 바뀐 사람입니다(창35:10). 그 뜻은 이미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부터 예언이 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는 타고난 운명과 신분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야곱인 이스라엘이 약속의 아들 이삭의 족장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는 변화가 발생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15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세상적인 성공과 권력만을 탐하고 있는 에서가 형이며 아버지 이삭의 족장의 지위를 승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사람들은 세상의 틀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으며 또한 갇힌 사고를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먼 훗날 유대인들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건축한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전에 하나님께서 늘 좌정하고 계시며 유대인만을 돌보고 계신다고 사고를 했습니다. 그와 같은 선민적인 종교가 바로 유대교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유대교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메시아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이스라엘의 구원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구원까지 차별이 없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요컨대, 유대교리와 전혀 다른 만민구원사상을 강조했으며 나아가서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본질이라고 강변했습니다. 그는 당연히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므로 만민과 만물을 차별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롭게 다루신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민이 이방인을 차별하며 하나님을 자신들의 특권만을 지켜주고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하나님으로 가두어버리는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배격한 것입니다(행7:47-50). 창조주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계십니다(사48:5-16, 55:8-9).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들만을 옳다고 지지해주고 있는 하나님을 원하고 있습니다(사48:1-4).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그와 같은 차이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록 야곱의 운명이 이스라엘로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에서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세상적인 족장의 지위를 이어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삭의 모든 재물과 지위는 에서에게 넘어갑니다. 장례위원장 역시 에서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는 무엇이 주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야곱이 이스라엘이 됨으로써 큰 변화가 두 가지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로, 야곱은 부모님의 세상적인 것을 상속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신앙심을 상속하고자 합니다. 반면에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어 있는 에서는 아버지의 재산과 족장의 지위를 상속하고서 지극히 만족을 합니다. 이제 권리를 모두 차지했으니 빈집을 떠나려고 합니다(창36:6). 더 큰 이권을 노리고 세일 산으로 가버립니다(창36:8). 에서는 장차 장인 아나의 온천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창36:24). 이스라엘이 된 야곱은 에서와 반대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이 남긴 생애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왜 브엘세바에서 헤브론으로 이사를 왔는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머니 사라가 왜 헤브론 막벨라 굴에 안장이 되어 있는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모두 이 땅에서의 영광과 장수함을 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영생을 누리고 싶어서 그곳 막벨라 굴로 들어가신 것입니다(창21:33, 신30:19-20, 히11:15-16). 그곳에서 마치 벧엘에서 하늘로 통하는 문이 열리듯이 장차 천국으로 가는 차원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창28:12-13). 야곱은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창49:29-33). 그것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사실이 훗날 애굽에서 밝혀집니다. 그의 아들 애굽 총리 요셉에게 이스라엘이 간절하게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47:29-31)
둘째로,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로 그 운명과 신분이 변화가 된 사람은 이 세상의 것에 연연해하지를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영생과 천국에 관심이 먼저 갑니다. 그리고 인생 가운데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삶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게 됩니다. 결코 장례식장에서의 서열에 미련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의 재물과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가를 다투는 자들이 아닙니다(눅17:20-21, 요18:36-37). 그 대신에 천국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입성을 하게 되는 일에 최대의 관심을 둡니다(마7:21).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합니다. 자신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까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으로 새로워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자들입니다(롬11:33-36, 12:1-2). 그러한 자들이 성도들이며 여기서는 야곱이 변화하여 얻게 된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삭의 장례식장에서 위원장이 에서이며 야곱이 그 다음이라고 하는 것은 큰 깨달음을 주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상전이며 족장은 여전히 에서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성도들이 모든 세상적인 권력과 지위를 차지해야만 된다고 사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적인 모습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역시 세상적인 가치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렇게 그냥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남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추구하고 있던 천국을 꿈꾸고 있습니다. 온 세상에 창조주의 영광과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민을 복음으로 새롭게 하여 하나님 자녀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단12:3, 마28:18-20).
에서가 고향을 등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예언은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는가(창36:6-7, 32:3, 6)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모든 재물을 독차지하고서 크게 만족합니다(창35:28-29). 그는 동생 야곱에게 모든 장자의 명분과 축복을 빼앗겨버렸다고 실망을 했는데 그 결과는 그러하지 않습니다(창27:36-38, 36:6). 하나님은 역시 장자인 에서 자신의 편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모든 재산과 족장의 지위를 하나도 남김없이 자신이 차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헛고생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한없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제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아버지의 집과 가나안 남부를 떠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아무런 미련이 없이 떠나가버립니다. 그는 더 큰 이권을 찾아서 세일 산 처가동네로 이주를 하고 맙니다(창36:6-8).
그런데 그 때부터 참으로 신기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스라엘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조카 롯이 아브라함을 버리고 소돔으로 떠나가버리자 하나님의 역사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과 동일한 현상입니다(창13:8-18). 기이하게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세상을 이기는 자 이스라엘로서의 독자적인 행보를 가나안에서 시작하게 됩니다(창22:17).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 땅의 중심도시인 세겜 성을 그의 칼과 활로써 정복을 하게 됩니다(창48:22). 가나안 남부 헤브론에서 중부 세겜 지역까지 이르는 드넓은 목초지역의 지배자가 됩니다(창37:14). 몇 년 후에 요셉이 17세가 되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영토는 세겜에서 더 북방으로 넓혀져 있습니다. 20km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단 땅까지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목축지역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창37:17).
이스라엘의 성공은 근본적으로 에서의 성공과 다릅니다. 그 이유는 에서는 아버지 이삭의 재산을 상속하고 장인 아나의 재산을 또 노리는 하이에나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창35:29, 36:6-8, 24).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혀 다른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가(守家)에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수성가(自手成家)를 하고 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 신앙뿐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하나 하나 정복하고 있는 땅들은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새로운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부모님의 것이거나 동족의 것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요컨대, 세상사람과 하나님 사람의 행동양식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해 제197강(창36:4-9)(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8 |
---|---|
창세기 강해 제196강(창36:1-3)(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8 |
창세기 강해 제194강(창35:23-27)(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7 |
창세기 강해 제193강(창35:21-22)(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6 |
창세기 강해 제192강(창35:16-20)(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