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93강(창35:21-2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26. 02:30

창세기 강해 제193(35:21-2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214()

 

하나님은 야곱을 언제부터 이스라엘로 부르고 있는가?

얍복 시냇가에서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나 직접 현신하셔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신 곳은 벧엘입니다. 서원을 지키는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기록에서 언제부터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기를 시작하고 있는가?

 라헬만을 사랑하면서 인생을 살고 있던 야곱이 열두 아들을 모두 얻게 되고 애처 라헬을 베들레헴 근교에 묻고 나서 비로서 자녀들을 위하여 대 족장 이스라엘의 인생을 살아가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모세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에서 이길 자가 없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으며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열두 지파가 그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중시하고 계시는가?

세상적인 축복은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야곱에게나 에서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생을 의미하고 있는 천국의 축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족속인 열두 지파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세 지파씩 흩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입성을 시킬 것입니다.

 

위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는 창세기의 이야기들

 

하나님은 얍복 시냇가에서 자신의 사자를 통하여 야곱에게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준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32:28).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첫 번째 뜻은 하나님이 정한 처음의 운명을 새로 바꾸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의 뜻은 세상사람들과 겨루어서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타고난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주시고 있는 것일까요? 야곱와 에서의 운명이 과연 서로 바뀔 수가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형 에서의 힘에 밀렸습니다. 그렇지만 둘째가 되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이 어머니 리브가의 모태에 있으면서 서로 첫째가 되고자 계속 싸웠습니다(25:22). 태중에서 빠져나올 때에 역시 힘이 센 에서가 머리를 먼저 세상으로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형의 자리를 에서에게 빼앗기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에서의 발목을 잡고서 그가 먼저 태어나는 것을 막고자 온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모자랐습니다. 결국은 에서의 발목을 잡고서 태어나는데 그쳤습니다(25:26). 세상적으로는 야곱이 둘째로 자리매김을 하고 만 것입니다. 가부장 족장사회에서 이삭의 장남으로 태어난 에서 앞에는 모든 좋은 것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차기 족장이며 장차 이삭 가문의 왕이 될 자입니다. 반면에 차남인 야곱에게는 아무 것도 신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장차 에서의 신하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에서의 종이 될 운명입니다.

야곱은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40세에 두 아내를 얻어서 차기 후계자의 길을 마련하는 에서를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운명을 첫째로 바꾸어주지 아니하는 한 결혼을 하지 아니할 각오를 했습니다. 77세가 될 때까지 어머니 리브가의 장막에서 하나님께 그렇게 끊임없이 간구한 자가 바로 야곱입니다(25:27).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들었으며 그것이 실현되기를 끝까지 기다리며 기도한 자입니다. 한편 어머니 리브가는 다른 의미로 장남 에서를 싫어했습니다. 그 이유는 장남인 에서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밤낮 들로 산으로 쏘다니며 싸움과 사냥만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25:27). 더구나 하나님 신앙이 없는 이방여인을 제 마음대로 아내로 삼고 또 집안의 며느리로 데리고 오기 때문입니다(26:34-35). 하나님의 족장인 남편 이삭의 가문이 장차 큰 일입니다. 그래서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야곱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차기 하나님의 족장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27:6-10, 13).

 어머니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의 예언을 자신들의 수단으로 성취시키고자 노력을 했으나 그것은 모자간의 이별만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가 없다는 교훈만을 깨닫게 되었을 뿐입니다. 77세에 부모님의 집을 떠난 야곱이 20년만에 객지에서 자수성가를 하여 집으로 돌아오다가 얍복 시냇가에서 마침내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32:28). 야곱은 브니엘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32:30).

이스라엘 이름의 두 번째 뜻은 세상사람들과 싸워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세상에 우뚝 서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그 점을 모세는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야곱에게) 주고 내가 네(야곱의)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35:12), “내가 네게(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22:17), “(이삭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26:4), “내가(이스라엘이) 네게(요셉에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48:22). 하나님의 예언은 훗날 다윗 왕이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성취가 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지고 있는 놀라운 이름의 축복입니다.

그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이름을 야곱이 사용할 수 있도록 벧엘에서 하나님이 직접 현신하셔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35:10).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야곱의 일대기를 이스라엘의 일대기로 보시기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초월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언제나 사람과 마주하실 수 있지만 동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꺼번에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하시기에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야곱의 운명이 이스라엘의 운명으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이 되는 것은 조금 늦습니다. 일종의 시간적인 지체현상(time-lag)이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라헬이 베냐민을 출산함으로써 열두 지파의 조상들이 모두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35:18). 동시에 야곱의 애처 라헬이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은 라헬의 묘를 베들레헴 근교에 마련하고 있습니다(35:20). 라헬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자 드디어 라헬만을 바라보고 인생을 살고 있던 야곱이 그 때부터 달라집니다. 요셉과 베냐민을 자신의 양팔로 삼고서 가나안 지역에 지배자 이스라엘로서 우뚝 서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에 걸맞게 대 족장이 되고자 합니다. 많은 목초지역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열두 아들들을 모두 족장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모세가 그 분깃점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 모세가 바로 그 분수령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드디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서 기술하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35: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친 이유(35:21)

 

  지난 삼일 동안 야곱은 무척 바빴습니다. 라헬의 죽음과 장례는 정신적으로 약곱을 정신 없이 지내도록 했습니다. 베들레헴 근교에 라헬의 묘를 만들고나서야 야곱이 정신을 차리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신의 품 안에는 라헬 대신에 그녀의 두 아들이 남아 있습니다. 열서너 살이 된 요셉과 갓난아기 베냐민입니다. 야곱은 그 두 막내 아들을 족장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남은 세월을 가나안의 지배자인 대 족장 이스라엘로 살아가고자 결심합니다. 그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재산을 불려야만 합니다. 좋은 목초지를 베들레헴 근처에서 찾고 있습니다. 드디어 서쪽에서 넓은 초지를 발견합니다. 열명의 아들에게 종들과 함께 나누어서 가축을 치도록 명령합니다. 자신은 넓은 목축지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망대를 높은 지대에 설치합니다. 그곳이 베들레헴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고지대로서 에델 망대입니다(35:21). 이스라엘은 그 망대 아래쪽에 자신의 장막을 쳤습니다. 한 동안 자신의 가축들이 충분히 살이 찔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 것입니다.

 

그곳에서 야곱이 만나게 되는 두 번째 사건, 장남 르우벤과 야곱의 첩 빌하와의 육체적 결합이 시사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35:22)

 

 야곱은 애처 라헬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라헬이 죽은 다음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이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두 아들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그녀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을 잘 키워서 모두 훗날 족장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재산이 필요하고 더 넓은 목초지가 필요합니다. 이제는 에서처럼 칼과 활을 들고서 가나안 원주민들과 전쟁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가나안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는 열두 아들을 모두 족장으로 만들고 자신은 대 족장 이스라엘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 족장 이스라엘의 칭호는 장차 요셉에게 물려주고 싶어합니다(37:3).

 그런데 장남인 르우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차기 대 족장 이스라엘은 자신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생각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대 족장의 지위는 힘과 세력이 강한 아들이 차지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차지하자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우호적인 세력을 규합을 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에 르우벤의 힘이 필요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라헬의 몸종 출신인 야곱의 첩 빌하입니다(30:4-8). 그녀의 뒷배는 항상 라헬이었습니다. 라헬의 도움으로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자신의 지위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라헬이 주고 나서부터는 매사가 순조롭지가 못합니다. 남편 야곱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라헬의 비호를 받아서 같은 첩인 실바를 업신여기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것이 역전이 되고 있습니다. 권력의 상실이 신분의 불안까지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호적인 세력과 결탁을 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눈에 야심이 만만한 야곱의 장남 르우벤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녀는 혈기가 왕성한 르우벤을 유혹했습니다. 에로스의 사랑을 갈구하는 준수한 청년 르우벤은 마다하지 않습니다(29:32). 그것이 율법을 어기고 패륜의 길인 줄 알면서도 르우벤은 정욕과 권력에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20:11).

  그 비극적인 패륜과 권력의 야합 소식을 이스라엘이 듣게 됩니다(35:22). 부자의 귀가 밝다는 사실을 아직 젊은 르우벤 그리고 정염에 불타는 첩 빌하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결탁과 잘못된 야합을 추구하던 그들은 훗날 이스라엘의 축복에서 그만큼의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르우벤아 네는 내 장자요 내 능력이요 내 기력의 시작이라. 위풍이 월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 네가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49:3-4),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49:17),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49:21). 요약해보자면, 르우벤은 출중한 장남이지마는 정욕과 권력욕을 억제하지 못하였기에 결코 이스라엘의 후계자가 되지를 못한다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빌하의 소생인 단은 광야의 마적 떼 아말렉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지파가 된다는 예언입니다(17:8-16). 마지막으로, 단의 친 동생인 납달리는 고삐를 풀고서 도망을 친 발정난 암사슴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지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위에서 부은 물이 계속 아래로 흘러내린 것만 같습니다. 그들의 운명을 누가 하나님 자녀들의 운명으로 바꾸어 줄 수가 있을까요? 이스라엘의 예언 가운데 다음과 같이 해답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49:18). 이스라엘이 임종 전에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주님의 구원하심을 그들과 우리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소망해야만 할 것입니다(47:29-31, 8:56, 11:13-1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