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손진길 소설)

천년의 바람소리34(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1. 12. 26. 13:32

천년의 바람소리34(손진길 소설)

 

9. 선덕여왕 시대의 출범과 재사 윤책

 

공포분위기를 잔뜩 조성한 진평왕이 악착같이 한해를 버티다가 다음해 632년이 시작되자 허무하게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게 초조하게 차녀인 덕만공주를 신라의 국왕으로 세우고 싶어한 것이다. 그의 소원대로 덕만공주가 신라의 왕이 되어 제27대 선덕여왕의 시대가 시작된다;

되짚어 생각해보면, 진평왕은  결코 자신의 왕좌를 진골 출신에게 넘겨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의 일관된 생각은 단 한가지이다; “성골의 나라 신라이기에 비록 여자라고 하더라도 성골인 공주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

그와 같은 진평왕의 성골 지상주의가 언제까지 신라를 지배할 것인가? 장군 윤책은 그것이 궁금하다. 왜냐하면 천하의 재사인 윤책이 다음과 같이 사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골 귀족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신라의 국왕이 되어 삼한일통을 실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윤책 장군의 앞날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

 

한편, 여자의 몸으로 최초의 신라의 국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덕만공주는 고민이 많다. 부친인 진평왕이 일찍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국왕이 되어 50년 넘게 경험한 일들을 자상하게 영특한 공주 덕만에게 가르쳐주었다고는 하지만 현실정치는 그 이상의 어려움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평왕의 가르침을 덕만공주는 뼛속 깊이 명심하고 있다. 당장은 그것이 가장 소중한 선덕여왕 자신의 정치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그 주요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국왕의 자리는 외로운 자리이다. 충직한 신하들의 보좌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국왕 혼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정책의 실패에 대한 책임도 고스란히 임금이 책임져야만 한다. 만약에 그것을 피하려고 신하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되면 그때부터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는 간신배만이 조정에 들끓게 된다.

둘째로, 왕자가 아닌 공주가 신라의 국왕이 되는 것이 처음이다. 그러므로 주변의 나라들이 업신여기고 침략을 자행할 것이다. 그것을 보기 좋게 격퇴하여 여왕이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서는 유능한 사령관과 장군이 필요하다. 특히 김용수 도독과 김서현 도독 그리고 김유신 장군이 전투에서 승리를 많이 거두고 있으니 그들을 잘 활용하도록 하라.

셋째로, 25대 진지왕이 즉위한지 4년이 되지 아니하여 구 귀족이 지배하고 있는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당하고 끝내 의문의 살해를 당한 일이 있다. 당시의 구실은 황음하다는 논리였지만 지금은 연약한 여왕이기 때문에 신라의 국왕으로 적합하지 아니하다는 명분을 그들이 내세울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구 귀족의 세력을 제어하면서 여왕을 지지하여 줄 수 있는 신하들이 필요하다. 부왕인 진평왕의 경우에는 구 귀족에게 원한을 가진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결코 구 귀족에게 영입이 될 수 없는 신흥 가야계 귀족인 김서현 장군을 활용한 것이다.

다섯째로, 진평왕이 사촌인 김용수에게는 맏딸인 천명공주를 주어 사위로 삼았으며 그들 사이에 아들 김춘추가 태어나서 왕실과의 유대관계가 튼튼하다. 그리고 김서현에게는 당고모 또는 이부누이인 만명공주가 시집가서 아들 김유신을 낳았다. 지금은 유신과 춘추가 처남 매부 사이이므로 그들의 유대 또한 돈독하다. 더구나 김용수에게는 유능한 사위가 두 사람이 있는데 장군 윤책과 최추랑이다. 특히 최추랑과 김유신은 사돈사이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잘 활용하여 구 귀족의 세력을 제어하는 한편 국방을 튼튼히 하도록 하라;

 

고맙게도 부왕 진평왕이 선덕여왕을 위하여 사전에 그와 같은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다. 그렇지만 덕만공주가 여왕이 되어 서기 6321월부터 신라를 통치하고 보니 개인적으로 그 어려움이 보통이 아니다. 평소 지혜가 뛰어나고 예지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칭찬을 많이 들은 덕만공주이지만 막상 국왕의 자리에서 정사를 돌보게 되니 지혜와 지식도 부족하고 인간적으로 외롭기 한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선덕여왕의 나이가 적지 아니하다. 언니 천명공주가 당숙인 김용수에게 시집가서 김춘추를 낳았는데 조카인 춘추가 벌써 장군이며 나이가 30세이다. 그러니 언니 천명공주도 여왕으로 즉위한 덕만공주도 50대이다. 특히 자녀가 없으며 시집도 못간 덕만공주는 더욱 외로운 중년의 노처녀인 것이다.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견뎌야 할 것인가?...

따라서 선덕여왕은 통치 초기에 개인적으로 당숙이자 형부인 김서현 도독을 많이 의지했다. 그런데 서라벌에 좋지 아니한 소문이 퍼지고 있다. 김서현 도독을 두고서 여왕이 언니와 경쟁하는 모양새가 되었다고 하는 이상한 소문을 낳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그러한 오해를 사지 아니하는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그것이 김용수의 이복동생인 비담을 가까이 두는 것이다.

비담은 50세가 될 때까지 마치 고아처럼 세상을 떠돌면서 고생을 많이 한 인물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에게 좋은 말벗이 되고 때로는 세상물정에 밝아 기발한 정치적인 견해도 피력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여자를 위로할 줄도 알고 비위도 잘 맞추고 있다. 그 때문에 선덕여왕이 비담을 가장 가까이에 두고서 때로는 사내로 때로는 정치적 자문역으로 잘도 활용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비담을 그토록 총애하고 아끼고 있기에 비담의 지위가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선덕여왕이 16년간 통치하는 동안에 비담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상대등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자리는 화백회의의 수장을 의미하며 모든 귀족의 우두머리이다.

여왕의 통치가 끝나면 스스로 화백회의의 결정으로 국왕이 될 수도 있는 신분을 의미한다. 그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선덕여왕 말기의 치세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선덕여왕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윤책 장군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하나씩 해보고자 한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때는 서기 632년 정월이다. 여왕은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신하들로부터 신뢰를 받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나이가 벌써 50대이므로 신하들은 여왕이 오래 통치하지는 못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즉위 초부터 선덕여왕은 한가지 사실에 몰두하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 나의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 그래야 서라벌의 정치가 안정이 된다”. 그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그녀가 은밀하게 근위파인 김용수와 김서현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다.

김용수 도독은 그 문제를 가지고 재사인 윤책 장군에게 도움말을 요청한다. 그때 윤책이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신하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다. 국왕이 여자이면 정치력이 있는 대신을 남편으로 삼으면 되지요. 욕심이 크게 없으며 행정능력이 탁월한 그런 인물이 없을까요?... “.

그 말을 듣자 김용수 도독이 자신의 무릎을 손으로 치면서 말한다; “그렇지, 아주 쉬운 방법이 가까이 있었구만. 적임자가 한사람 있고 말고지금 상대등을 맡고 있는 을제공이야 말로 딱 그러한 인물이지. 됐어, 됐구 말구… “.

김용수가 사전에 그 방법을 김서현과 상의한다. 참으로 좋은 방안이라고 찬성한다. 따라서 그 방안이 여왕에게 보고가 되고 그대로 다음달 곧 6322월에 시행이 된다. 그때부터 을제공이 선덕여왕의 배우자가 되어 힘있게 최고의 벼슬 상대등으로서 국정전반을 총괄하게 된다;

 

화백회의의 수반이 여왕의 남편이 되고 국정을 총괄하고 있으므로 구 대신들도 불안감을 덜 수가 있다. 그렇게 좋은 출발을 보이고 있는 신라 27대 선덕여왕이다. 그녀는 국정이 안정되는 것을 보고서 그해 12월에 사신단을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보낸다;

 

 놀랍게도 30세의 젊은 장군 김춘추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에 공주가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통보하는 한편 우려되고 있는 백제나 고구려의 침입을 대당 황제 태종 이세민이 억제하여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산동성 신라소의 책임자인 김용술 도독이 사신단과 함께 당태종을 알현하고 그와 같은 선덕여왕의 뜻을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김춘추는 같은 진골인 김용술 도독이 신라소의 책임자로 오래 근무하고 있어서 그런지 중국말과 문화에 정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새삼 놀라고 있다. 그리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 일가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숙부라고 부르면서 그와 친하게 지내고자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다음해 3월에 김용술 도독이 고허성주로 발령이 나고 그 대신에 고허성주 알천 도독이 산동성 신라소의 책임자로 떠나고 있다. 알천 도독이 워낙 성실한 인물이라고 서라벌에서 정평이 나 있어서 그러한 인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보고서 장군 윤책이 다음과 같이 속으로 생각한다; “신라소에는 유성 장군이 있으니 신임 알천 도독을 잘 모실 것이야. 괜찮은 인사로군. 그리고 김용술 도독이 김춘추 장군의 마음에 대단히 들었던 모양이군. 이것을 계기로 하여 처남 춘추가 대당 외교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이는군. 잘됐어… “.

윤책은 개인적으로 8년전에 원광법사님을 모시고 진평왕의 특사로 당나라에 들어갔을 때에 산동성 신라소의 신세를 진 적이 있어 일부러 고허성으로 가서 김용술 도독에게 인사를 드린다. 김 도독이 엄청 반가워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 그래도 내가 서라벌 인근 고허성주로 가게 되었다고 말했더니 유성 장군이 자네에게 꼭 안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어. 내 이종인 유성이 언젠가 자네를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 “;

그 말을 듣자 윤책이 대답하면서 더불어 한가지를 질문한다; “저도 유성 장군을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유성 장군이 진골이신 성주님과 이종 사이라고 하시니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지요?... “.

윤책이 알기로는 김용술 장군은 왕족에서 갈라져 나온 진골이고 유성의 집안은 신라6촌이 아닌 그저 평범한 신흥귀족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사이에 이종관계가 성립이 되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김용술 성주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사실은 내 어머니와 유성의 모친이 자매간이야. 진골인 자매가 한사람은 진골 집안에 또 한사람은 5두품이 될까 말까 한 집안으로 시집을 간 것이지. 그것은 한때 서라벌에서 유명한 애정 사건이었다고 하더군. 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