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28(손진길 소설)
윤책도 놀랐지만 그 백제 장수도 엄청 놀랐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쏘아낸 화살을 검으로 튕겨낸다고 하는 것은 내공이 대단한 극소수의 인물만이 시전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검으로 쳐내는 것이 아니라 검이 일으키고 있는 바람 곧 검풍(劔風)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는 기술인 것이다.
다음 순간 백제의 장수가 더 크게 놀란다. 말머리를 돌린 윤책이 등에서 활을 꺼내어 자신을 향하여 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력이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피할 사이도 없이 자신의 배를 뚫고 있다. 그렇게 죽어가는 그 백제의 장수가 그 다음의 장면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윤책이 화살 하나를 더 쏘아서 반대방향으로 날리고 있다. 그것이 추랑을 상대하고 있던 백제의 사걸 대장군에게 날아가서 그의 목을 단숨에 꿰뚫고 만다. 사걸 대장군을 맞상대하고 있던 추랑은 단지 ‘휘익’하는 미세한 소리만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사걸이 순식간에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추랑이 얼른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본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윤책이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있다. 윤책은 자신의 진면목을 아래 동서인 추랑에게 조차 보이지 아니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추랑은 전장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많은 화살 가운데 하나가 그만 사걸에게 중상을 입힌 것으로 판단하고 만다. 그것은 사걸에게는 엄청난 불운이지만 추랑에게는 다시 없는 행운이다.
다음 순간 추랑은 자신의 검으로 단숨에 사걸의 목을 벤 후에 그것을 칼 끝에 꽂아서 높이 쳐들고 크게 소리친다; “백제군은 들으라. 너희들의 사령관 사걸이 이렇게 목이 잘렸다. 이제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 그 말을 듣자 적병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치고 있다;
윤책과 추랑의 기마대가 도망가는 백제군을 뒤쫓아가면서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있다. 그에 따라 무사히 백제의 영역으로 도망친 적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아니하다. 그런데 그날 밤에 윤책과 추랑이 대승을 거두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입맛이 쓰다. 그래서 속으로 한탄한다; “말과 글이 같은 동족들이 이렇게 서로 적이 되어 언제까지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해야만 하는가?... “;
그들이 백제의 패잔병들을 포로로 삼아 가잠성으로 개선한다. 그러자 성주인 유강 대장군이 추랑과 윤책의 전공을 크게 치하한다. 추랑은 백제의 사령관 사걸의 수급을 베어 왔으며 윤책은 야간공습을 계획하여 대승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유강 대장군이 두가지 조치를 취한다; 하나는, 상세한 장계를 작성하여 서라벌의 군부에 올리면서 논공행상을 요청한 것이다. 또 하나는, 침략군이 태워버린 들판의 참상을 알리고 주민들의 생계를 위하여 양곡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서라벌의 조정에서는 오래간만에 속 시원하게 백제의 원정군을 물리친 유강 대장군의 공로를 크게 치하하면서 일계급 특진을 시킨다. 따라서 대장군 유강이 졸지에 도독이 되어 한강 유역에 있는 큰 성 곧 아차성의 성주로 발령이 난다;
동시에 윤책과 추랑에게도 승진이 찾아온다. 두 사람 모두 11관등 나마에 임명이 된다. 나마의 벼슬을 가진 자를 당시 신라의 군부에서는 ‘부(副)장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 바로 상위의 관등이 대나마인데 그것이 별칭 ‘장군’이기 때문이다.
지금 윤책과 추랑이 얻고 있는 11관등 ‘나마’는 두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4두품에 불과한 윤책을 5두품으로 그 신분을 바꾸어 준 셈이다. 따라서 4두품의 최고 벼슬인 12관등 대사를 차제에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오늘날의 대령에 해당하는 나마가 되었기에 부하병사의 수가 2천명이나 된다. 한 등급만 더 승진하면 장군에 해당하는 10관등 대나마가 될 수 있다. 그때는 5천명의 군대를 독자적으로 거느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윤책은 대장군 유강이 아차성주인 도독으로 진급하는 것을 보고서 이상한 생각이 들고 있다. 자신이 알기로는 유강 대장군의 고향이 서라벌 북쪽의 기계(杞溪)로서 윤책과는 동향이다. 그는 윤책과 마찬가지로 신라 6촌의 후예가 아니다. 따라서 신진 귀족으로 편입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5두품에 불과하다.
신라에서 5두품의 품계의 상한선은 10등급인 대나마 곧 장군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째서 유강은 대장군에 이어 이제는 도독으로까지 승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유강 장군은 애초 5두품이 아니라 6촌의 후예인 6두품에 버금가는 신분이라는 의미이다. 어떻게 그러한 골품제도의 파행이 가능한 것일까?...
그 의문이 나중에 풀리게 된다. 왜냐하면, 윤책이 산동성 신라소에서 만난 적이 있는 진골 출신 도독 김용술을 우연히 서라벌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때 윤책은 김용술 도독의 모친과 유강 장군의 모친이 친(親)자매 사이로서 옹주의 신분인 것을 알게 된다. 그에 따라 유강의 형제들이 모계의 영향으로 신분이 한단계 상승하여 6두품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라의 골품제는 부계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세월이 지나갈 수록 모계의 혈통이 또 하나의 변수가 되고 있다. 그 영향으로 4두품이 5두품이 되거나 5두품이 6두품이 되는 약간의 신분의 변화 정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윤책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나는 미실 궁주의 여동생인 미도 옹주의 큰 사위이다. 그러므로 아내 가소 덕분에 4두품이 5두품이 되는 변화가 발생하고 있구나. 그리고 본래 6두품인 추랑의 경우에는 그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되겠구나. 그것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
진평왕 50년인 서기 628년 5월에 가잠성주였던 유강 대장군이 도독으로 승진하여 한강유역에 있는 큰 성 아차성의 성주로 떠나가고 만다. 그 다음 3달 동안 나마 벼슬을 하고 있는 윤책과 추랑이 가잠성에서 계속 근무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9월이 되자 서라벌 남쪽에 있는 고허성으로 발령이 난다;
그곳에서 윤책과 추랑은 오인회의 인물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김유신 형제와 김춘추가 두사람을 엄청 반긴다. 그들도 벌써 나마 벼슬에 올라 있다. 따라서 나마 계급의 오인회 5명이 장군 계급인 대나마를 목전에 바라보고서 서라벌 남쪽 고허성에서 웅거하고 있다. 그들 앞에 과연 어떠한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그 변화의 서곡이 서쪽에 있는 백제와의 관계가 아니라 북쪽에 있는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부터 발생하고 있다. 일찍이 진흥왕 시절인 서기 550년경 신라가 욱일 승천하여 당항성을 위시한 한강 유역의 성들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진평왕 25년인 서기 603년에는 아차성을 탈환하고자 남하한 고구려의 원정군을 뒤쫓아 도리어 동북쪽 철원의 들판까지 신라가 점령하게 된다.
그러자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작은 나라 신라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다. 중원에서 몰려오는 대국 수나라와의 전쟁이 아니라고 한다면 진작에 고구려가 한강유역의 아차성까지 탈환하였을 것인데 그것이 여의치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기 618년에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다시 중국대륙을 통일하였지만 금방 고구려로 쳐들어오지를 못하고 있다. 한숨을 돌린 고구려의 군부가 이제는 신라에게 빼앗긴 성들을 되찾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은 철원지역은 물론 그 남쪽에 있는 포천지역까지 수복하고 있다.
신라의 진평왕이 백제 무왕의 연 이은 공격으로 말미암아 서부전선에서 10여년간 헤매고 있는 동안에 북쪽 국경지대에서는 그러한 변화가 벌써 발생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진평왕이 마침내 칼을 빼 들고 있다; “군부에서는 짐의 조부인 진흥왕이 어렵게 차지한 한강 유역의 땅을 자주 침략하고 있는 북쪽의 고구려의 군대를 응징할 계획을 수립하세요”.
왕명이 떨어졌지만 군부의 실세인 구 귀족들이 움직일 기미가 없다. 그들은 소국인 신라가 대국인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다고 하는 사실을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고 있다. 잘못하면 그 옛날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시절처럼 신라가 다시 고구려 왕에게 굴종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부자는 매사 몸조심을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자신의 부를 지키고 가문을 보전하는 비결인 것이다. 그와 같이 기득권의 유지만 생각하고 있는 구 귀족과 달리 신흥 귀족인 김용수와 김서현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고구려가 비록 수나라의 군대를 여러차례 물리쳤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타격을 입은 호랑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차제에 아차성에서 출발하여 다시 북동쪽으로 쳐들어갈 필요가 있다. 포천에 있는 낭비성을 치고 가능하면 다시 철원의 들판까지 점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게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수복하는 것이 신라의 국력을 키우는 방법이며 고구려의 남침을 사전에 차단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한마디로, 공격이 수비보다 낫다는 것이 전략론의 기초가 아닌가!... ;
따라서 진평왕 51년인 서기 629년 6월에 김용수 대장군과 김서현 대장군이 은밀하게 오늘날의 포천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낭비성 점령계획을 수립한다. 신라국왕의 허락을 얻자 원정의 준비를 단단히 하여 드디어 그해 8월에 북진을 감행한다.
그 원정군에 부장군이 3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나마 벼슬을 하고 있는 김유신과 최추랑 그리고 윤책인 것이다. 그들이 낭비성 공략에 있어서 큰 전공을 세우게 된다. 그 자초지종이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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