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25(손진길 소설)
보급부대장으로 보이는 장교가 비호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말한다; “우리는 기잠성에서 근무하고 있는 백제 병사들이요. 북쪽에 있는 큰 성 주재성으로 가는 길인데 그곳에 가면 물건을 많이 팔 수가 있을 것이요. 요즈음 병사수가 늘어나서 생필품이 많이 필요하지요. 그러면 소개비를 얼마나 줄 건데요?... “.
비호가 능글맞게 웃으면서 마치 능숙한 장사치처럼 말한다; “물건만 많이 팔린다고 하면 그만큼 두둑하니 챙겨 드려야지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1할을 수수료로 내놓지만 주재성은 처음 가는 성이니 저희들이 앞으로 팔릴 물건을 생각해서 귀하에게 특별히 2할을 떼어 드리겠습니다”;
좋은 조건이다. 그래서 그 장교가 웃으면서 말한다; “좋소, 2할이면 내가 발벗고 나설 만 하지요... 나는 기잠성 토박이인데 본래는 신라의 병사였다가 이제는 백제의 병사가 되어 있지요. 우리 같은 초급 장교들이야 성의 주인이 신라가 되었든 백제가 되었든 별로 상관이 없어요. 그저 밥벌이가 되고 이렇게 부수입이 많이 생기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내 이름은 지술입니다. 댁은 이름이 무엇이요?... “.
그 말을 듣자 비호가 금방 자신의 정체를 꾸며서 밝히고 있다; “나는 5인조 봇짐장사패에서 길잡이를 맡고 있는 임호입니다. 우리는 주로 신라군이 차지하고 있는 성들을 돌면서 물건을 팔았는데 이제는 백제군이 진을 치고 있는 성을 찾아가서 물건을 팔고 싶어요. 생필품과 방물이야 많이 팔면 장땡이지 성의 주인이 신라면 어떻고 백제면 어떻습니까? 하하하… “.
참으로 넉살이 좋다. 그래서 그런지 그날 함께 길을 가면서 백제의 초급장교 지술과 앵잠성의 척후인 조의 벼슬의 비호가 어느 사이에 친한 동무 사이가 되고 있다. 그 다음이 어떻게 되는 것일까?...
5인의 척후조는 백제의 초급장교 지술 덕분에 주재성에 무사히 들어가서 물건을 많이 팔게 된다. 주재성에 주둔하고 있는 백제의 군사들이 물건을 많이 사고 있다. 그리고 그 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성에는 갑자기 병력이 늘어난 반면에 성으로 들어오는 장사치가 그만큼 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의 주인이 갑자기 바뀌게 되면 전쟁상인들이나 봇짐장수들이 그 전처럼 충분한 양의 생필품과 기타 물건을 공급하기가 힘이 든다. 언제 전쟁이 터지고 전투가 또 발생할지 모르기에 그러한 고비가 넘어가기를 장사치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 대기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성내에서는 물품이 귀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군사적인 상황의 변화가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장사치들이 입성하여 생계품목을 우선적으로 공급하게 된다. 그 뒤를 이어 비로소 여유 있는 문화생활을 즐기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하는 상인들이 그 성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재성에서는 아직 그 마지막 단계의 장사치가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만큼 주민들의 삶이 불안하다.
언제 또 신라군이 쳐들어와서 그들의 주재성을 되찾을지 모른다. 따라서 백제군이 계속 증강되고 있으며 성문으로 출입하는 백성들과 장사치들에 대한 통제가 심하다;
하지만 앵잠성에서 출발한 윤책과 추랑이 인솔하고 있는 가짜 봇짐장수들은 욕심꾸러기 백제의 초급장교 지술의 신원보증으로 주재성에 머물면서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등짐으로 지고간 물건을 하루만에 다 팔아 치웠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졌기에 주막에서 하룻밤 봉놋방 신세를 지기로 한다. 임호로 위장하고 있는 비호는 너스레를 떨면서 기분 좋게 초급장교 지술에게 그날 장사하여 번 돈의 2할을 수고비로 떼어준다.
그러면서 걱정스럽게 말한다; “장교님 덕분에 운 좋게 오늘 물건을 하루만에 다 팔아 치웠어요. 이거 벌이가 재미나니 다음번에는 더 많은 물건을 지고 와야 하겠어요. 그런데 그때도 나리의 신세를 질 수가 있을까요?... 장교분의 신원보증이 없으면 성문출입이 어려운 것으로 보이던데?… “.
그날 엄청난 돈을 챙긴 지술은 욕심이 발동하여 그만 군사적인 기밀사항을 발설하고 만다; “5일마다 우리는 기잠성에서 건초를 가지고 와서 주재성에 넘기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니 그때를 맞추어 이번처럼 길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댁도 많은 물건을 구입하여 또다시 우리와 만나서 함께 성안으로 들어오면 되지요. 무엇이 어렵겠어요. 내가 그 정도는 언제나 신원보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요. 하하하… “.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그냥 흘러가는 간단한 관심사인 것처럼 비호가 속삭인다; “겨울철이라 건초가 많이 필요한 모양이군요. 그 많은 건초를 계속 공급하고 있으니 도대체 군마가 얼마나 많은 것이요? 거참 대단한 병력입니다. 병사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자면 다음 번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물품을 지고 오면 다 팔 수가 있을까요?... “.
겉으로 보면 장사치의 욕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실제내용은 주재성의 보병과 기마병의 수를 짐작하고자 하는 속셈이다. 그런데 초급장교 지술이 돈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그만 그 간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답한다; “기마병와 보병이 반반인데 모두 합쳐서 만명이나 되니 그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자면 댁 같은 봇짐장수가 한 백명은 있어야 할 것이요... “;
지술이 자신에게 들어올 수수료가 많아질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성은 갑자기 군사가 늘어나서 지금 생필품 값이 천정부지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장사치에게는 이만한 좋은 시장이 없을 것이요. 하하하… “.
그 말을 듣자 비호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척하면서 말한다; “나는 나리만 믿겠습니다. 다음번에는 두배의 물건을 지고 올 터이니 부디 한번 더 도와주세요. 덕분에 돈 좀 벌어봅시다. 이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 아닙니까? 하하하… “.
다음날 주막에서 아침식사를 한 다음에 윤책 일행은 재빨리 성문으로 빠져나온다. 그리고 앵잠성으로 돌아가면서 다음 번 기잠성에서 오는 지술 일행을 만나면 어떠한 공작을 해야 할지 깊이 생각한다. 그 결과를 가지고 앵잠성 참모실에서 작전을 짠다.
먼저 윤책이 모두에게 질문한다; “주재성에서는 5일마다 그 정도의 건초더미를 군마에게 먹이고 있다고 하는데 그 먹이에 약을 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군마들이 배탈이라도 나야 우리 기병이 쳐들어가서 쉽게 적들을 제압할 수가 있을 것인데?… “.
큰 해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비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방법이 있지요. 제가 소싯적에 말 사육장에서 일꾼으로 지내봐서 잘 알지요. 독초를 잘못 먹게 되면 말이 일어나지를 못해요. 그러니 그 풀을 먹이에 섞어주면 되지요. 독초를 물에 끓인 다음 그 물을 건초더미에 조금씩 부어 놓으면 동일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필요하면 한번 시험을 해볼 수도 있어요”;
기가 막힌 방법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비호의 형인 비룡이 말을 보탠다; “동생은 마구간에서 인부로 일을 했지만 저는 사실 봇짐장수가 되어 떠돌이 생활을 했지요;
그런데 한번은 길에서 주는 공짜술을 얻어 마셨다가 그만 잠에 떨어지는 바람에 보따리를 털린 적이 있어요. 그러니 다음번에 백제의 보급대에 공짜술을 제공하면 됩니다. 물론 잠을 자게 되는 약을 술에 타서 먹이면 되지요. 하하하… “.
그것 참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매사 철저한 윤책이 추랑과 비룡 형제 그리고 태평의 도움을 받아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시험해본다. 먼저 독초를 끓인 물을 건초에 슬쩍 뿌려서 말 두 마리에게 먹였더니 아예 힘이 빠져서 일어나지를 못한다. 그 다음에는 수면효과가 강력한 풀을 끓여서 그 물을 술에 조금 타서 마셨더니 두 식경이 지나도 깨어나지를 못한다.
이제 남은 일은 치밀한 작전이다. 그래서 작전계획을 다음과 같이 세운다;
첫째, 봇짐장수의 인원수를 배로 늘린다. 정예병 가운데 5명을 선발하여 기존 5명에 합류시킨다. 물론 봇짐장수로 위장하지만 무기는 각자 지팡이 안에 감추어서 지니고 간다.
둘째, 비호가 일전에 백제의 초급장교 지술을 만난 그 장소에서 작전을 개시한다. 수면제를 탄 술을 충분히 준비하여 그들에게 먹이고 자는 사이에 건초더미에 독초 끓인 물을 골고루 뿌린다. 깨어나면 시침을 떼고서 함께 주재성 안으로 들어간다.
셋째, 주재성 안에서 물건을 팔고 머무르는 동안에 동문을 급습하여 성문을 활짝 열도록 한다. 바깥에 은밀하게 숨어 있던 신라의 기병이 즉시에 쳐들어와야 한다;
그 시간을 맞추기 위하여 사전에 성안에 불을 놓아야 한다. 적들이 불을 끄는 사이에 동쪽 성문을 공격하여 개문하는 것이 상책이다.
넷째, 앵잠성에서 동원할 수 있는 기병의 수는 1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보병 2천 정도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적들의 수는 1만명이나 되니 그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다섯째, 부대장들에게는 사전에 제작하여 둔 지도를 공급한다. 그 지도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부대별로 안내병을 붙여준다. 그들 안내병들은 사전에 그 길을 답사하도록 한다. 그래야 은밀한 부대의 이동이 가능하다.
만약 성공하게 되면 백제가 힘들게 점령하고 있는 신라의 주재성을 다시 되찾게 된다. 그러면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적의 위협으로부터 상당히 벗어나게 된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윤책과 추랑은 앵잠성주 가현 장군과 함께 신중하게 작전을 개시한다.
그 결과 참으로 운이 좋게도 작전 계획 그대로 순조롭게 일이 진행된다. 다만 3천의 군사로 적군 1만명을 치는 큰 모험이기에 그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두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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