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람소리1(손진길 소설)
1. 윤하선이 조상 윤책의 비망록 ‘천년풍음’(千年風音)을 만나다.
주후 2,029년 여름 여전히 한성고등학교에서 국사선생으로 근무하고 있는 윤하선이 여름방학을 맞이한다.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된 윤하선은 사랑하는 아내 유끼꼬와 함께 종로구 가회동에서 살고 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 윤장천이 벌써 초등학교 3학년이다.
윤하선은 이번 여름방학 기간에 특별히 지난 봄부터 생각해오고 있던 한가지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그것은 서울에 살고 있는 파평 윤씨의 조상들의 문집이 보관되어 있는 경북 포항시 기계면의 종가를 한번 방문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포항시에 편입되어 있는 기계면은 경주시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안강읍과 이웃하고 있다. 본래 기계(杞溪)라는 지명은 그 옛날 운주산 아래 구기자가 많이 자라고 있는 맑은 계곡이 있어 그로부터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기계면은 산과 계곡 그리고 들판이 두루 자리잡고 있어 그 산천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다.
역사적으로 20세기초까지만 하더라도 기계면은 월성군 또는 경주군에 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면이 이웃의 흥해군으로 편입되고 나중에는 북쪽의 흥해군이 남쪽의 포항시에 흡수됨에 따라 그러한 행정구역상의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주사람들은 아직도 친근하게 안강 기계라고 그 이름을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안강읍이 북쪽의 기계면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천년의 수도인 경주와 가까운 고장이 바로 기계면인 것이다;
그 옛날 신라시대에 기계 지역에는 유씨와 윤씨가 많이 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윤씨 집안에서 똑똑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가 윤책이다. 윤책은 천하를 정복하고 경영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책략을 잘 세웠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보는 혜안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비망록 형태의 문집인 ‘천년풍음’(千年風音)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우리 기계 지역의 윤씨들은 천년의 왕도 신라의 기운이 쇠하게 되면 미리 한반도의 중부지역으로 이주하도록 하라. 비록 신라가 한반도에서 예맥족의 왕국들을 통합하여 통일신라의 영광을 구가하고 있지만 그 시대가 오래 가지를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왕도인 서라벌이 너무 동남부에 치우쳐 있으며 왕족과 귀족들이 서라벌에 있는 그들의 기득권에 너무나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후손들만이라도 미리 중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왕국이 탄생할 때를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윤하선이 문중에서 얻어 듣고 있는 내용은 그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는 그 원본을 한번 포항시 기계면의 종가를 방문하여 차제에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 왕도가 동남부에 크게 치우쳐 있어 한반도를 전부 경영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 무리라는 사실을 신라시대에 벌써 지적하고 있는 책사 윤책이다. 그는 그 외에 어떠한 국가발전의 방책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주후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는 예언을 남기고 있지는 아니한 것일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상인 윤책이 후손들에게 미리 중부지역 파주로 가서 살고 있으면 나중에 발흥하게 되는 나라에서 크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예언이 적중한 것이다. 고려시대의 윤관이 그러하고 조선시대에 왕비족으로 크게 명성을 날리고 있는 파평 윤씨들이 그러한 것이다.
조상 윤책의 유훈에 따라 그 후손인 윤신달(尹莘達)이 신라 출신으로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고 있다. 윤신달은 한때 경주를 다스리는 유수가 되었는데 그때부터 옛 고향 기계면에서 남은 세월을 지냈다;
윤신달의 자손을 제외하면 기타 윤책의 후손들은 전부 경주와 흥해를 떠나 진작에 파주와 송악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집안의 내력을 한참 생각하다가 윤하선이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 고속열차 안에서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그때 젊은 시절부터 윤하선에게 발생하고 있는 기이한 현상 곧 시간과 공간 이동 사건이 다시 발생한다.
어느 사이에 윤하선이 삼국을 통일하고 있는 격변의 시대에 서라벌의 변방인 기계 지역의 젊은 선비 윤책으로 그 정체성이 바뀌고 있다. 그 결과 우리가 익숙한 윤하선은 사라지고 신라의 책사 윤책이 자신의 사랑방에서 여름 낮의 오수를 즐기다가 눈을 비비면서 고즈넉하게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윤책은 따가운 태양이 아직 천공에 걸려 있음을 보고서 눈을 들어 멀리 사방의 산천을 살펴본다. 동쪽에는 바다로 통하는 흥해가 보이고 북으로는 내륙의 청송과 바다 쪽의 영덕으로 이어지는 산천이 마치 그의 눈에 담기듯이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영천과의 사이에 운주산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남하하면 건천에서 내남으로 통하는 단석산이다. 더구나 윤책의 고향 기계면의 남쪽으로는 안강읍과의 사이에 봉좌산이 솟아 있다;
그 산이 더욱 진행하면 비학산으로 연결이 되고 있다.
그와 같이 윤책의 고향은 서쪽과 남쪽의 산지로 말미암아 신라의 화랑들이 낭도들을 이끌고 합숙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들 가운데 뛰어난 화랑들은 그 지역의 숨어 있는 선비이며 책사인 윤책의 명성을 암암리에 듣고서 은밀하게 집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때로는 신라의 권력자들이 그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 가운데 한사람이 김유신이고 또 한사람이 지체가 높은 김춘추이다. 바야흐로 성골의 마지막 공주인 진덕이 여왕이 되어 신라를 다스리고 있는 시대이다. 그녀는 여러 명의 남편을 두고서 후사를 얻고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식이 없다. 그러므로 성골의 시대가 끝나게 되면 진골 가운데 가장 지체가 높은 김춘추가 후사를 이을 가능성이 크다.
그와 같은 비상한 시국에 김춘추를 비롯하여 그의 손위 처남인 김유신이 일부러 은거인 윤책을 은밀하게 찾고 있으니 그것이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주로 묻고 있는 것이 어떻게 신라가 국력을 신장하여 예맥족의 나라들을 일통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재사 윤책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사항에 대하여 그들이 은근히 묻고 있는 것이기에 그는 조국의 앞날을 위하여 충언의 말을 아끼지 아니하고 있다. 그래서 하품을 길게 하면서 윤책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다; “오늘은 여름 날씨가 대단히 후덥지근하구만… 오늘도 유신이나 귀골인 춘추가 나를 찾아오려나…”.
마당 한 켠에 심어져 있는 소나무 위에 숨어서 여름 매미가 끊임없이 울고 있다. “맴맴… 맴맴맴…”. 그 소리를 들으면서 윤책이 마당을 한바퀴 돌고서 다시 사람방으로 들어간다. 그는 읽다 만 서책을 다시 손에 집어 들고서 소리 내어 읽고 있다. 그 책의 이름이 당나라에서 건너온 ‘사마천의 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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