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31(작성자; 손진길)
이스라엘왕국의 초대왕인 사울은 요단강 동편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레위인의 성읍인 마하나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군사령관인 아브넬은 요단강 건너의 군사기지인 마하나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아브넬은 이스르엘 평원에서 벌어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사울왕과 세자 요나단 그리고 두 명의 왕자를 보호하지 아니하고 그 대신에 패잔병을 수습하여 얼른 왕도인 기브아로 들어간다. 그는 수도를 마하나임으로 옮기고 무신정권을 세우고자 획책한 것이다.
길보아산으로 피신한 사울왕과 세자 그리고 왕자들이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게 된 수도 기브아의 이스보셋 왕자와 귀족들은 살길을 찾아 군사령관 아브넬의 제안에 따라 마하나임으로 천도를 하고 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울왕의 막내왕자인 이스보셋을 신왕으로 옹립한 것이다;
그와 같이 군사령관 아브넬과 군부의 보호 아래 세워진 이스보셋왕의 조정이므로 군부의 실세인 아브넬의 눈치만을 보고 있다. 그런데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다윗왕을 찾아가서 민족의 화합과 통일의 방안을 논의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암살이 되고 말았다;
다윗왕이 아브넬의 죽음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발표하면서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어 주었지만 그것은 믿을 수가 없는 해명이다. 따라서 마하나임의 조정에서는 유다지파의 왕인 다윗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러나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스보셋 왕의 조정은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적으로 다윗의 유다왕국이 이스보셋의 이스라엘왕국보다 더 강성하므로 마하나임의 이스보셋 왕과 귀족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재빨리 다윗에게 잘 보여서 자신들의 보신책을 마련하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깃다임에 살고 있는 장수들인 레갑과 바아나 형제이다.
군부의 직급으로는 동생인 바아나가 더 높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바아나와 레갑’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집에서는 형이 레갑이므로 ‘레갑과 바아나’라고 달리 불리고 있다(삼하4:2,5).
집에서 레갑이 동생인 바아나에게 말한다; “동생은 나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아라. 본래 우리 집안은 베냐민 족속으로서 기브온과 기브아 사이에 있는 브에롯에 살고 있었지만 지금은 동북쪽으로 이주하여 깃다임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본래 조상은 베냐민 지파가 맞지만 지금은 에브라님 지파의 땅에 살고 있으며 무늬만 베냐민 지파이다. 그러니 내 말은… “;
레갑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은밀하게 말한다; “우리가 죽도록 베냐민 기브아 출신 사울왕의 아들을 우리의 왕으로 섬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니 차제에 사울왕가를 버리고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 헤브론의 다윗왕을 섬기는 것이 훨씬 낫다고 보는데 너의 의견은 어떠하냐?’.
그 말을 듣자 동생인 바아나가 마치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한다; “형님의 생각이 저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냥 다윗에게 투항하면 별로 큰 자리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스보셋의 수급을 가지고 다윗에게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왕 말을 갈아타자면 큰 공을 세워서 투항하는 것이 맞지요… “.
무서운 음모이다. 형제는 의기투합하여 아침 일찍 ‘두개의 포도주틀’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마을 깃다임의 집을 떠나 말을 타고서 요단강을 건너 새로운 도성인 마하나임으로 들어간다. 레갑과 바아나는 먼저 자신들의 부대가 있는 군영에 들러 나귀를 두 마리 끌고 나온다.
백부장과 오십부장인 그들은 한달에 한번씩 나귀를 끌고 궁궐에 있는 창고에 가서 양식을 실어오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기 때문에 그들이 거사일로 택한 것이다. 그렇게 세상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형제가 바로 레갑과 바아나이다.
형제는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을 궁궐 바깥 주막에 맡긴다. 그리고 나귀만 끌고서 궁궐로 들어간다. 별다른 의심을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통과한다. 두사람은 나귀를 끌고서 일부러 왕의 대전이 있는 곳을 빙 둘러본다. 햇살이 따가운 정오 무렵이라 대전 주위가 조용하다.
레갑이 동생 바아나에게 말한다; “대전이 조용한 것을 보니 날이 뜨거워서 왕과 대신들이 낮잠을 자러 집으로 간 것 같애. 그러니 이스보셋 왕이 틀림없이 침소에 있을 거야. 부근에 나귀를 두고 그곳으로 한번 가보도록 하지?... “.
바아나가 고개를 끄떡이자 형인 레갑이 앞장을 선다. 평소에 이곳 지리를 잘 파악해둔 모양이다. 레갑의 발걸음에 거칠 것이 없다. 침소 앞을 두명의 친위병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레갑의 짐작이 맞는 것 같다.
슬며시 두명의 호위병에게 접근한 레갑과 바아나가 뒤에서 두 병사의 입을 틀어막으면서 순식간에 단도로 목을 깊이 베고 만다. 갑자기 벙어리가 된 병사들을 소리가 나지 않게 땅바닥에 조용히 눕힌다. 그리고 병사들의 옷자락에 피가 묻은 단도를 닦은 다음에 왕의 침소로 들어선다;
41세의 이스보셋 왕이 침소에서 곤히 낮잠을 즐기고 있다. 레갑이 단도로 왕의 복부를 깊이 찌르자 동생 바아나가 순식간에 수급을 취하고 만다. 형제는 옷 속에 숨기고 간 검은 자루에 왕의 수급을 넣고서 태연하게 궁궐을 벗어난다.
그들은 말을 타고서 남쪽으로 달린다. 모압평지까지 남하를 한 다음에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로 들어간다. 그 다음에 여부스를 지나 곧장 헤브론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헤브론 성문을 통과한 시점이 이튿날 아침이다.
레갑과 바아나 형제는 의기양양하게 다윗왕에게 알현을 청한다. 그날의 수비대장인 아마사가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또한 이스보셋 왕의 수급을 확인한다. 두사람을 데리고 다윗왕을 알현한다. 다윗왕이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레갑과 바아나의 생각은 다윗왕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높은 자리와 재물을 상급으로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고 만다. 이스보셋 왕의 수급을 본 다윗왕이 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레갑과 바아나의 귀에 분노에 찬 다윗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희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고서 나에게 바치고자 이스보셋 왕의 수급을 들고 왔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다”.
다윗왕의 짤막한 설명이 이어진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부하의 손으로 이스보셋 왕의 목을 쳐서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 종이 주인을 치는 하극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신다. 그것은 패륜이며 반역이기 때문이다”.
바아나와 레갑의 귀에 다윗왕의 심판의 말이 들려온다; “여봐라, 이 간악한 역적 두 놈을 끌고가서 참하라. 일찍이 사울왕의 수급을 취하여 내게 달려온 아말렉 청년의 목을 벤 것처럼 이들의 목도 베도록 하라. 이스보셋 왕을 죽인 악인들이 마땅히 그 죄의 벌을 받도록 하라”.
다윗왕이 레갑과 바아나를 체포하여 끌고 나가는 친위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더 지시한다; “이 두 악인의 사지를 잘라서 헤브론 못가에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매달도록 하라. 그리고 이스보셋의 수급은 가지고 나가서 아브넬의 무덤에 함께 안장하도록 하라”.
그렇게 조치를 끝내고서 다윗왕이 속으로 탄식한다; “이제 어이없이 이스보셋 왕이 암살을 당하고 말았으니 사울왕가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구나. 그렇다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민족통일을 논의하여야 하는가? 이스라엘 11지파는 다시 사사기 시대로 돌아가고 말겠구나… “.
그 소식을 듣고서 입궁한 문무백관들에게 대전에서 다윗왕이 다음과 같이 왕명을 내린다; “나는 앞으로 군사력으로 동족들인 이스라엘 11지파를 절대로 핍박하지 아니할 것이요. 민족을 해치는 동족상잔은 여호와의 뜻이 아니므로 일체 군사적인 충돌을 금지하는 바이요. 이것은 왕명이니 거역하는 자는 일벌백계로 다스릴 것이요”.
헤브론에서 들려오는 유다왕 다윗의 결정사항을 전해 듣게 된 이스라엘 11지파의 장로들이 다윗왕의 이스라엘왕국 사랑과 동족사랑의 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마음이 벌써 사울왕가도 떠나고 다윗왕도 떠나 있다. 왕정시대보다는 사사기 시대가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블레셋에게 영토를 빼앗겨서 그들의 땅이 그림에서 보듯이 크게 축소가 되어 있다;
더구나 그들의 여호와신앙이 회복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가나안 원주민들처럼 우상을 섬기며 음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부유한 자는 여럿 아내와 첩을 두고 살고 있으며 가난한 자는 하루의 끼니를 걱정하면서 노예와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남쪽에 있는 유다왕국은 군사력이 강성하므로 주변의 이방민족들이 감히 침범하지를 아니하고 있다. 하지만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11지파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니다. 지경을 침입하는 외적들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그들을 상대하는 군사력이 지파별로 흩어져 있으므로 그렇게 강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어려움을 5년 이상 겪다가 마침내 11지파의 원로들이 회의를 한다. 다시 왕정을 선택해야 안보를 유지할 수가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를 의제로 여러 달에 걸쳐서 논의한다. 그 결과 그들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보다는 유다왕국의 다윗왕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어째서 그러한 결론을 얻고 있는 것일까? 여호와깨서는 어떻게 그들 11지파의 장로들의 마음을 그렇게 돌아서게 하신 것일까?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첫째로, 다윗왕은 적장 아브넬과의 담합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을 구현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요압 사령관의 만행으로 저지되고 마는 것을 보았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러한 역사섭리를 하고 계시는지를 다윗이 기도로 물었다. 그 결과 그가 깨달은 것이 그 근본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전쟁을 통하여 동족의 피를 흘리더라도 민족통일을 이루려고 했던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장 아브넬과의 친목과 이기적인 담합을 통하여 손쉽게 흡수통합을 하려고 했던 자신의 정책도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동족인 이스라엘 11지파의 동의를 근본적으로 배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결과 부하에 의하여 이스보셋 왕이 암살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다윗왕 자신이 군사를 일으킨다고 하면 진정한 민족통일이 성취가 될 것인가? 겉으로는 무력에 의하여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여호와신앙인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범법행위이다.
금수만도 못한 악인이 주군을 암살하고 말았는데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고 하는 다윗 자신이 그것을 절호의 기회로 활용한다고 하면 자신 또한 악인이 되고 말 것이다. 만약 다윗 자신이 군사력으로 이스라엘 11지파를 정벌한다고 하면 누가 진심으로 그러한 정복자를 제사장나라의 왕으로 섬길 것인가? 어림도 없는 가설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여호와께서 역사를 섭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통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로 맡겨 드리고 다윗 자신이 충실한 여호와의 의로운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유다왕국을 다스리고 있으면 반드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여 주실 것이다. 그것을 믿고서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5년 이상 끊임없이 기도한 다윗왕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다윗장군이 유다지파의 왕으로 헤브론에서 즉위한 날로부터 7년 6개월이 지났을 때에 기적과 같은 일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스라엘 11지파의 장로들이 수차례 회의하여 얻은 결론을 가지고 헤브론으로 다윗왕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유다왕 다윗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를 섬기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왕국의 국왕으로 기름을 붓고 싶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그들과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수도를 북쪽으로 옮길 준비에 나선다. 헤브론이 베들레헴에서 55리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스라엘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에 이스라엘 11지파의 장로들이 다윗왕에게 말한 내용을 히브리정경 사무엘하 제5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삼하5:1-2);
그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첫째, 사울왕 시절에도 이스라엘 12지파의 장로들은 다윗장군을 의지하여 여호와신앙을 지켰다는 것이다.
둘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왕 다윗에게 여호와의 백성들을 전부 돌보도록 목자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왕국의 주권자로 세우신 사실을 이제서야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그러한 확신을 얻을 때까지 지난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동안 유다왕 다윗의 행동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여호와신앙에서 이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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