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기도(손진길 소설)

다윗의 기도15(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1. 10. 13:14

다윗의 기도15(작성자; 손진길)

 

다윗장군이 20세의 젊은 나이에 사울왕에게 쫓기어 왕도 기브아에서 도망자가 된다. 당시 사울왕의 나이가 70세인데 여호와신앙을 버렸기에 불행하게도 자주 악령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한 실정이므로 다윗은 몇 년 지나지 아니하면 사울왕이 미쳐서 생을 마감하고 자신은 도망자신세에서 일약 이스라엘 왕국의 차기 국왕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이 아니다. 사울왕은 세월이 갈수록 그 힘이 더욱 강해지는 것만 같다. 반면에 도망자 다윗에게는 위기가 계속 찾아온다. 자기 지파인 유다사람들조차 사울왕의 탄압이 무서워서 다윗의 은신처를 계속 사울왕에게 밀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울왕이 놉 땅에 이방인 에돔출신 장수 도엑을 보내어 그곳 성막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 85명과 그 가족을 학살해버린 사건이 레위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따라서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왕국에서 가까스로 살아서 돌아오자 아둘람 굴로 400명의 장정과 그들의 가족들이 몰려들어 하나의 저항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지만 다윗의 도피생활이 그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장장 10년에 이르게 된다. 그 긴 세월동안 다윗이 가장 위기를 느낀 곳이 블레셋의 가드왕국이다.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말도 되지 아니하는 미치광이 연기가 빛을 발하여 블레셋의 손을 벗어나게 된다.

그 다음에 곧바로 위대한 여호와의 도우심이 군사적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아둘람 굴에서의 일이다. 장정만 세어도 400명이나 되는 무리가 다윗을 자신들의 지도자로 모시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다윗이 지신의 군대를 조련하게 된다. 요컨대, 가드의 바로 동쪽에 아둘람이 있으므로 가장 큰 위기가 지나고 나니 비로소 자신의 발판이 마련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다윗은 자신에게 몰려든 백성들 가운데 장정들만 훈련을 시켜서 자신의 호위군대로 사용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국외로 탈출시켜 모압의 미스베에서 살도록 조치한다. 그 결과 다윗의 부친 이새의 가족과 장정들의 가족이 국외에서 안전하게 지내게 된다.

다윗이 장정들을 군사로 훈련하여 600명의 사병을 보유하게 되었을 때에 헤브론을 둘러싸고 있는 십광야에서 조직적으로 군비를 조달하게 된다. 그 방법이 용병으로 출전하거나 그 지역에 출몰하는 약탈족속을 쳐부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다윗의 사병활동이 지역주민들에 의하여 기브아의 사울왕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 결과 다윗에게는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다윗일행은 자주 거처를 옮기고 있다. 헤브론 북방의 십광야 헤렛 수풀에서부터 남방의 십 황무지와 마온 황무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울왕이 다윗을 쉽게 체포하지를 못한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사울왕이 수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지만 결코 그를 잡지 못하는 것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때와 같이 그것은 확실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다;

 

  그 점을 이스라엘의 역사서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십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4).     

 다윗일행이 십광야 수풀에 머물고 있을 때에 기브아 외곽의 요새에 있는 세자 요나단이 은밀하게 남하하여 다윗을 방문한다. 다윗과 요나단은 다시 한번 그들 사이의 맹약에 대하여 거듭 확인한다. 그 내용은 세자 요나단 대신에 젊은 다윗장군이 여호와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왕국의 차기 국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자 요나단은 그 다음 서열의 실력자가 된다는 내용이다.

요나단이 돌아간 다음에 십 사람들이 왕도 기브아로 사울왕을 찾아가서 다윗의 거처를 밀고하는 사건이 발생한다(삼상23:19). 그렇게 밀고자가 발생하는 이유는 만약 사울왕이 스스로 정탐꾼을 통하여 다윗의 은신처를 알아내고 공격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지역의 주민들이 몰살을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헤브론을 넓게 에워싸고 있는 십광야에는 유다지파의 백성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파출신인 다윗장군을 보호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다윗을 보호하다가 사울왕의 미움을 사서 가족들이 몰살을 당하는 것을 진정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다윗일행을 빨리 사울왕에게 넘겨주고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윗은 밀고자를 색출하거나 그들을 처형하지 않는다;

 

그들도 전부 자신의 지파이며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왕의 경우에는 그 반대이다. 자신에게 다윗의 거처를 일찍 고하지 아니한 주민들은 괘씸죄와 반역으로 몰아서 모조리 학살하고 만다;

그것이 생명을 사랑하는 다윗장군과 생명을 경시하는 사울왕과의 차이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장군의 편이지 결코 사울왕의 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에 따라 사울왕이 도망자 신세인 다윗장군을 잡아서 죽이려고 무려 10년간이나 대군을 몰고 추격했지만 결코 그를 죽이지 못하게 되고 만다. 그것이 경이로운 여호와의 역사섭리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섭리가 일방적으로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도망자 처지인 다윗이 매사를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로 말씀을 드리고 그 응답을 받아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평소에도 그는 여호와의 뜻과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그러한 다윗의 기도와 하나님말씀에 대한 묵상이 놀라운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윗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훗날 그가 작은 이스라엘왕국을 중동의 지배자인 이스라엘제국으로 만든 비결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밀고자들이 나타나자 사울왕이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더욱 자세하게 다윗의 거처를 확인하여 내게 알려 달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대군을 몰고가서 반드시 다윗을 잡아서 처단하고 말 것이다. 그가 이스라엘왕국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있는 한 내가 그를 잡아서 죽이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밀고자들이 고향에 돌아와서 다윗일행의 거처를 찾았더니 그 사이에 다윗의 부대가 십광야의 남쪽에 있는 마온광야로 이동하여 아라바 계곡에 진을 치고 있다. 정확한 정탐의 결과가 나타나자 사울왕이 서두른다. 수천명의 기마병을 동원하여 은밀하게 남진한다.

도망자 신세인 다윗은 파수꾼을 사방에 풀어놓고 있다. 그 덕분에 사울왕의 기마병이 추격하고 있음을 알고서 아라바 계곡에서 다시 마온 황무지로 먼저 이동을 실시한다. 그때부터 사울왕의 기병대와 다윗의 사병들 사이에 쫓고 쫓기는 게임이 발생한다. 그것은 마치 빨치산 전투와 같다.

그런데 나중에 사울왕의 추격군의 수가 자꾸만 늘어나면서 아예 마온 황무지 전체를 둘러싸고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 다윗 일행이 비록 이 산과 저 산을 옮겨 다니면서 사울왕의 정밀한 공세를 피하고는 있으나 역시 한계가 있다.

그러한 위기를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신다. 그 결과 블레셋의 군대가 대거 이스라엘 왕국의 국경을 침입하여 왕도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왕국의 존립에 큰 위기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사울왕의 군대가 황급하게 전선으로 되돌아 간다;

 

그러한 위기는 사실 사울왕이 무리하게 다윗을 잡아서 죽이려고 많은 군사를 동원하였기에 발생한 것이다. 블레셋의 침입을 막고 있는 아세가와 라기스 요새의 전방군대까지 마온 황무지로 동원하였으니 그 틈을 엿보고 블레셋의 대군이 침입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승자박이라고 하겠다.  

이제 다윗왕은 깊이 생각한다. 자신의 군대가 유다지파의 백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머무르고 있으면 그들에게 사울왕의 보복이 가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백성들이 거의 살지 아니하는 지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리고 사울왕과 블레셋이 전쟁을 치고 있는 지역에서 멀어져야 한다.

그 결과 다윗은 엔게디 요새에 둥지를 틀게 된다. 그 지역은 사해 중간의 서편지역인데 급격한 골짜기이다. 그러므로 그곳으로는 대군이 진입하기가 어렵다. 높은 산을 타고 넘어와야 하는데 그 길이 매우 험한 것이다. 참고로 엔게디가 표기가 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지형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사울왕은 집요하다. 블레셋의 침입을 어느 정도 막게 되자 이번에는 3,000명의 소수 정예병을 이끌고 엔게디 광야에 있는 다윗 일행을 추적한다;

 

 다윗이 그 지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을 본 소수의 유다지파의 사람들이 사울왕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자꾸만 사울왕의 군대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다. 다윗이 자리를 잡고 있는 엔게디 요새가 험한 지역이 아니라고 한다면 진작에 토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다윗이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자신이 직접 정탐에 나선다. 당시 다윗을 바로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장수가 그의 조카인 아비새이다.

사울왕이 들염소 바위가 있는 지경에 이르자 70세가 넘은 고령인 그가 너무 험한 산지를 넘어오느라고 힘을 많이 사용했는지 갑자기 속이 쓰리고 배가 아프다. 그래서 측근만 데리고 근처에 있는 굴을 찾아서 볼일을 보고자 한다. 굉장히 깊은 굴이다. 그곳이 컴컴하여 누가 숨어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급한 김에 화장실로 사용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굴속에는 직접 척후에 나선 다윗과 그의 호위장수들이 은신하고 있다. 그들이 바위 위에서 멀리 사울왕의 군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울왕이 다윗이 있는 쪽으로 급히 이동한다. 다윗일행이 급하여 그 굴속으로 피신한 것이다. 그런데 그 굴을 지나치지 아니하고 사울왕이 한두 사람의 호위병만 데리고 들어선다.

다윗과 그의 부관들이 숨소리조차 죽이고 굴속에서 숨어 있는데 마침 사울왕이 크게 볼일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놀라운 행운이다. 옆에서 아비새를 비롯한 다윗의 호위무사들이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셔서 늙은 사울왕의 목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즉시 해치우고 그 목을 가지고 나가서 승리를 선포하시지요. 이제는 이스라엘왕국이 주군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과 수년간 동행하는 피신생활 가운데 크게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기름을 부으신 종은 하나님이 직접 처리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의 종을 또다른 종이 죽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며 반역이다.

그렇게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악행을 저지르면서 왕국을 얻는다고 하면 그것은 횡재가 아니라 불행의 씨앗이다. 당사자의 영혼이 파괴가 되고 여호와의 신실한 종의 자리에서 이탈이 되고 만다. 그때부터 여호와의 은총이 사라지고 그 왕국은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로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진리를 이미 깨치고 있는 다윗이기에 절대로 안된다고 강하게 신하들에게 강조한다(삼상24:6-7). 그 결과 그는 사울왕의 옷자락만 뒤에서 슬쩍 베고 만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윗의 신하들은 사울왕과 자신들의 주군인 다윗장군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여호와의 신앙으로 정확하게 알게 된다.

사울왕은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이거나 레위인이거나 가리지 아니하고 학살하고 있는 살인자이다. 그리고 정적인 다윗이 속하고 있는 유다지파를 정치적으로 억누르면서 차별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장군은 그 반대이다. 지파 간의 차이를 두지 아니하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고자 한다. 특히 여호와의 종에 대해서는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치리를 하시도록 그 손에 맡겨 드린다. 그것이 신실한 종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스라엘왕국을 다윗장군의 손에 맡기실 것이다. 결코 불의한 종인 사울의 왕가가 오래 가지를 못할 것이다. 그와 같이 믿고 있기에 다윗의 10년 도피생활 가운데 그 절반이 쉽게 지나가게 된다.

끝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신앙이 위대하지만 한번의 시험으로 그것을 확정하지 아니하신다. 그래서 재차 그 신앙을 확인하고자 하신다.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