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39강(창9:11-17)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10월 3일(목)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 그 무지개 언약의 내용과 의미는 무엇인가?(창9:11-17)
흔히 무지개를 ‘희망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비가 개이고 있으니 들판에 나가서 일을 할 수가 있고 새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언덕에 올라가서 멀리 ‘쌍 무지개’가 뜨고 있는 지평을 바라보게 되면 무엇인가 먼 미래 저 먼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영롱한 미래를 미리 보는 듯 합니다. 청운의 꿈은 그렇게 무지개의 이미지로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담기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처럼 미래의 희망을 가리키고 있는 무지개가 창세기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및 그의 세 아들에게 언약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시는 홍수심판을 일으키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하여 구름 속에 무지개를 숨겨두고자 하십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릴 때에 무지개가 마치 자동차 속에 내장이 되어 있는 ‘에어백’과 같이 작동을 할 것입니다.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즉시 진노를 거두시고 폭우를 멈추게 하십니다. 따라서 무지개는 하나님의 자기억제를 불러 일으키는 ‘안전변’(a safety valve)과 같다고 하겠습니다”(‘창9:11-17’말씀의 의미적 해석). 이상과 같이 그 무지개 언약을 풀이하고 보면 구체적으로 다음 사실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첫째로, 무지개는 하나님의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작용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무지개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노아 가족들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잘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더 확실한 방법으로 재삼 그 약속의 중요성을 다시 상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무지개를 바라보게 되면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언약의 내용을 반추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노를 거두십니다. 동시에 노아의 후손들은 폭우 가운데에서도 잠시 무지개가 구름 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보게 되면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서 조상님들에게 하신 언약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무지개가 떠오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심판을 멈추시고 구원의 기회를 다시 주실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기 통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무지개 장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자라고 하더라도 자만하지 아니하고 겸허하게 스스로 자기 구속의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인 능력밖에 가지고 있지 아니한 세상의 지배자가 제도적인 견제와 억제의 장치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통치행위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를 야기할 것입니다. 독재와 독점이 주고 있는 엄청난 폐해를 굳이 거론하지 아니하더라도 충분하게 이해를 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다’는 뜻은 완벽한 독단의 권력을 가졌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철저하게 자기를 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죽이고자 하는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로마의 군정당국을 모두 힘으로써 다스리지 아니하시고(마26:51-54) 그 대신에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선택했다고 하는 구원의 방법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심판보다 더 두렵고도 가슴이 떨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를 마주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제 더 물러설 곳이 없습니다. 더 우물쭈물 망설일 수도 없습니다. 절대자이신 창조주가 자신의 아들을 나를 대신하여 심판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 죄의 무게가 그것보다 가볍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심판보다 그 하나님의 자기절제와 인내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다는 의미로 두렵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남은 평생 한결같이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고 복음의 내용대로,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생애처럼 우리도 살아가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는 사실을 절감할 뿐입니다.
셋째로, 무지개 언약은 약속의 이행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반드시 약속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9:14-16).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자비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 모든 뜻을 담고 있는 히브리어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그 ‘헤세드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도 자기처럼 약속을 지키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 음성이 가장 강하게 울려 나오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말로만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의 증거가 여기서는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언약을 다시 한번 기억하시고 홍수를 멈추십니다. 따라서 홍수가 전면적인 세상의 심판으로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무지개를 보게 되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행하실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이제 다시 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살려주신다는 약속의 증거입니다.
개념을 확장해보면, 그 약속의 증거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전면심판을 보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의 억제의 장소가 바로 골고다 언덕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제물로 대신 처형함으로써 비로서 그 진노를 억제하고 계시는 두려우신 하나님의 모습이 그 언덕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한 자마다 회개하고 죄의 길을 떠나야만 할 것입니다. 계속 제 멋대로 살다가는 홍수심판보다 더 엄청난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의 심판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서 심판의 부활에 처하겠다는 예수님의 설명이 다음과 같이 복음서에 생생하게 실려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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