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36강(창9:1-3)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년 9월 30일(월)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는데 왜 여자들은 빠져있는가?(창9:1)
고대사회는 족장사회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족장들입니다. 하나님의 방백이라고(창23:6) 부를 수 있는 그들은 모두가 남자들이며 자신들의 가족과 가문을 대표하고 있는 족장들입니다. 비록 사라, 리브가, 레아 등 3대를 이어온 족장의 부인들이 하나같이 남편보다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뛰어난 신앙을 선보이고 있지만(창12:13-15, 24:58, 26:7, 29:35)그들은 결코 가문의 대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열두 명의 남자제자들에게만 사도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1:21-26). 생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닌 수많은 갈릴리의 여자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마27:55-56, 눅8:1-3) 남자 제자들만을 사도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 누가가 조심스럽게 열두 사도에 추가하고 있는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 역시 남자들입니다(행13:4, 9, 43, 14:3).
본문에서 현대인류의 조상이 되고 있는 노아가족의 경우에도 동일합니다.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은 모두 빠지고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만이 하나님의 복을 인류의 대표로 받고 있습니다(창9:1). 생각을 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똑 같이 복을 주셨는데(창1:27-28) 어째서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그들의 대표자가 되고 있는 것일까요? 창세기의 말씀을 더욱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닮도록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복수의 하나님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과연 하나님의 가문이 지니고 있는 형상과 모양은 어떤 것일까요?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져 있는 그것을 하나로 합치면 그 해답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창1:27, 2:24). 그와 같은 의미에서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3-25)는 가정의 탄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어서 이루고 있는 그 가정에 비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고백, 그리고 영과 혼과 육의 하나됨, 나아가서 자신의 생명을 자녀들에게 나누어주는 것 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특징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모세가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의 기록은 여자가 남자를 보완하고 있다는 의미를 강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사실에서 그 점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아담이지만 그가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인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여자가 남자를 보완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디까지나 모든 갈빗대를 가지고 있었던 존재는 남자인 아담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담은 아직 가정이 없으며 옆구리가 허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서 아내로 데려다 줌으로써 그가 보다 완전한 인생을 살도록 조치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합니다. 사람이 지니고 있는 형상과 모양의 본체인 하나님은 외로워하지 아니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물려받고 있는 아담이 외로워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사람을 만들 때 사용한 소재의 탓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땅에서 흙이라는 소재를 취하여 사람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흙이 하나님의 생기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서 움직이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람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있지만(요4:24), 반면에 흙에서 취함을 얻은 인간의 몸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토양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동질감을 느끼도록 흙으로 각종 동물을 지으시고 그에게 동무로 삼도록 선물했습니다. 그것은 짐승과 새 가운데에서 특별히 구별이 되어 사람을 잘 따르는 가축과 애완동물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담이 여전히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하나님이 특별한 여자 하와를 창조하여 아담에게 함께 살도록 데려다 줍니다. 아담이 하와를 만나자 너무나 만족하여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그들은 부부가 되어 한 몸을 이루고 드디어 가정생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창세기 제2장을 보면, 아담이라고 하는 남자가 본래 하나님과의 대화의 상대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가정을 이루자 아내에 대한 책임까지 하나님 앞에서 지도록 조치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아담만을 에덴동산에 데리고 와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도록 조치를 했습니다(창2:7-8). 그런데 아담이 허전해하고 쓸쓸해하자 비로서 그의 갈빗대를 하나 뽑아서 하와라고 하는 여자를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소 불완전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담이라고 하는 남자가 본래 하나님과의 대화의 상대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부부가 죄를 범하고 동산의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부르시고 있습니다(창3:9).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경위를 심문할 때에도 아담에게 먼저 묻고 있습니다(창3:11). 또 하와에게 다음과 같이 판결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책임을 먼저 져야만 하는 자가 아담입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책임도 하나님은 그 남편에게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가정과 가문의 대표자가 되었다고 남자들이 마냥 좋아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 책임이 그 이상으로 큰 것으로 보입니다.
육식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하나님의 사전조치(창9:2-3)
홍수심판의 결과는 처참한 것입니다. ‘아라랏’이라고 불리게 되는 산이 얼마나 높아진 것인지 모릅니다(창8:4). 홍수 전에는 땅의 모양이 거의 평평했는데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고 지하수가 그 이상으로 분출이 되자 그 모습이 변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지하수의 분출을 초래한 해저지진의 발생과 화산의 폭발은 지층의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지구상에는 8천 미터가 넘는 높은 봉우리가 생겨나고 해저 3천 미터나 되는 웅덩이가 파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홍수 전에 평평한 땅을 달리던 짐승들이 새로운 땅에서는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조심스럽게 타고 다니면서 가까스로 생존을 해야만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동시에 기후의 극심한 변화는 식물이 자라나는데 큰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식물성만으로는 먹거리가 부족해진 동물들은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합니다.
홍수 전에도 사람이 사람을 해치고 짐승들이 약육강식을 하는 흉포함을 보여서 하나님이 심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창6:4-6, 11-13). 그런데 홍수심판의 결과 초래된 새로운 세상의 환경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형편입니다(창8:22). 그래서 하나님께서 긴급조치를 발하고 있습니다; 첫째, 육식을 정식으로 허용한다는 것입니다(창9:3). 둘째, 약한 육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짐승들에게 사람을 무서워하도록 프로그램을 내장하고 있습니다(창9:2). 사람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짐승들에게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주셨던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복을 재삼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9:1). 덧붙여서 더욱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창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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