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33강(창8:6-12)(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0. 18. 00:20

창세기 강해 제33(8:6-12)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3928()

 

노아 시대 홍수심판의 전개과정과 정찰이 필요한 이유(8:1-8)

 

일단 홍수심판이 시작되자 40일 동안 하늘에서 폭우가 계속 쏟아져 내렸습니다. 땅속에서는 지진과 함께 용암과 지하수가 계속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땅과 가장 높은 산들까지 모두 물속에 잠기었습니다. 그렇지만 물은 지속적으로 불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방주에 타고 있는 사람과 동물들을 제외하고서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코로 숨을 쉬는 존재는 모두 멸절되고 말았습니다. 물이 계속 불어나고 있으니 이제는 방주에 타고 있는 생물들이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됩니다. 목숨에 위협을 받게 된 노아의 가족들이 그들과 방주의 생물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물이 최고도로 치솟고 있음과 노아가족의 기도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음을 보시고서 다음 단계의 구원계획을 실시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억하심입니다(8:1a). 하나님의 영이 역사를 하시자 바람이 불게 됩니다(8:1b). 드디어 물이 줄어들기를 시작합니다(8:2-3). 그 결과 홍수심판이 시작된 지 꼭 150일만에 가장 높은 산 아라랏이 나타나고 가까스로 노아의 방주가 그 곳에 정박을 할 수 있게 됩니다(8:3-4). 홍수심판의 개시일이 노아 600 2 17일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을 할 수 있게 된 날은 정확하게 5달이 지난 그 해 7 17일입니다(8:4).

물이 75일 동안, 2달반동안 계속 줄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해 101일이 되자 여러 산들의 봉우리들이 보였습니다(8:5).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봉우리가 아니라 산꼭대기인 정상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the tops of the mountains became visible”(8:5). 방주가 가장 높은 산 아라랏에 계속 정박을 해 있는 관계로 노아 가족은 마치 소방서의 높은 망대에서 도시 전체를 관찰하듯이 그렇게 저 멀리 산들의 높은 정상들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다시 세상이 그 모습을 모두 드러낸다면 새로운 세상에서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조하게 40일간을 매일 관찰을 했습니다(8:6). 즉 그 해 11 10일경이 되자 이제 제법 산들의 봉우리들이 육안으로도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봉우리들만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산기슭과 편편한 지면이 어느 정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전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장차 그들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기 위해서는 들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초지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과연 들판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 그리고 식물이 다시 자라나고 있는지 궁금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거의 열 달이나 지난 시점이라 그 동안 물속에 계속 잠기어 있었던 땅에서 과연 식물이 다시 싹을 띄우고서 자라나고 있는지 의문인 것입니다. 만약 대지에서 자라날 수 있는 식물들마저 멸절이 되고 말았다면 앞으로 땅에서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현재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아라랏에 정박해있는 노아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 진위여부를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잘 날 수 있는 새들 가운데 선별하여 정찰을 하게 할 생각입니다.

 

노아의 전령인 까마귀와 비둘기의 차이점(8:6-12)

 

노아는 왜 그 많은 새들 가운데 유독 까마귀와 비둘기를 전령으로 선택하고 있을까요? 하늘을 높이 날고 그리고 빠른 속도로 비행할 수 있는 새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대부분 사냥에 능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길들이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 주위에서 친근하게 살고 있는 새들이 아닌 것입니다. 실제로, 동네 어디를 가든지 흔하게 볼 수 있는 새들이 까마귀이며 비둘기 종류입니다. 그들은 사람이 주는 사료를 먹기도 하고 명령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특히 비둘기는 예로부터 전령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집비둘기는 성경에서 제물로 사용이 되기도 하고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15:9),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3:16). 그리고 특이하게도 까마귀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장면이 구약에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여기서 떠나 동쪽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는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왕상17:2-6). 그래서 그런지 노아는 매와 같은 맹금류를 선택하지 아니하고 사람과 친근한 까마귀와 비둘기를 정찰병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비둘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까마귀는 죽은 동물의 사체를 파먹고 사는 새입니다. 반면에 비둘기는 새싹과 곡식을 먹고 사는 새입니다. 그 때문인지 까마귀는 성격이 다소 사납고 비둘기는 온순합니다. 그와 같은 차이가 본문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약간의 풀이를 하면서 알기 쉽게 그 내용을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먼저 정찰병으로 방주에서 내보냅니다. 까마귀는 제 세상을 만났습니다. 지면에 아직 물이 가득한데 죽은 동물들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습니다. 그것을 배불리 파먹고서 아예 방주로 되돌아 갈 생각을 아니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답답하여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죽은 동물의 사체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새싹만을 찾고 있습니다. 발견하지를 못하자 다시 방주로 되돌아 왔습니다.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파송했습니다. 이번에는 올리브나무의 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먹을 거리는 있는데 쉴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7일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이제는 먹을 것과 쉴 곳이 모두 육지에 나타났으므로 되돌아오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지면의 상당부분이 물위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8: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