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9(작성자; 손진길)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1958년이 되자 7살 꼬마인 차남 손진길을 다시 자신의 자전거 뒤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태우고 다닌다. 작년 여름에 뚝방길에서 떨어져 아들이 다리부상을 당하는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해가 바뀌자 다시 아들을 자전거 뒤에 태우는 것이다.
꼬마 손진길도 마찬가지이다. 몇 달이 지나지 아니하여 벌써 다리부상을 당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즐겨 부친의 자전거 뒤에 타고서 함께 여러 곳을 다닌다. 그해 여름과 가을에 선더말 아재는 아들 손진길을 자전거에 태우고 두차례 내남 너븐들에 있는 형제들의 집을 방문한다.
대지주인 손수석이 천 마지기에 이르는 자신의 전답을 고향에 살고 있는 형과 동생에게 소작관리를 하도록 맡겨 두고 있는데 차남인 손진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부친 손수석이 자신의 전답에 대한 소출을 가늠하기 위하여 그날 현지확인에 나서고 있다는 그 사실까지 모르고 있다. 그저 부친인 선더말 아재가 멀리 살고 있는 형제들과 친척들이 보고 싶어서 일과 후 남는 시간에 고향을 찾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고향을 방문하는 경우에는 선더말 아재가 큰형인 손수정 및 바로 밑의 동생인 손수권과 더불어 술잔을 나눈다. 그렇게 막걸리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이 좋게 소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꼬마인 손진길은 심심하다. 시골에 오면 별로 놀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심식사가 끝나고 사랑방에서 형제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아버지에게 빨리 경주 노동 집으로 가자고 조른다.
내남 너븐들에서 경주시내까지 30리길을 되돌아 가야하는 선더말 아재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빨리 가자고 조르는 것이 내심으로는 좋다. 왜냐하면 그도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해가 있을 때에 먼 길을 일찍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골 인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입장을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힘든 법이다. 마침 아들 손진길이 빨리 가자고 조르고 있으니 그것이 그가 작별을 고하기에 좋은 빌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선더말 아재가 그렇게 오후 일찍 내남에서 경주로 귀가길에 나서는 것은 좋은데 도중에 용장에 오게 되면 또 들르는 곳이 있다. 큰 방앗간인 신식 정미소이다;
손수석은 그곳 주인과 오래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는 탁배기를 서로 권하면서 그렇게 긴 시간 대화한다. 손진길은 그것이 부친의 사업의 일환인 것을 전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속절없이 방앗간 뜰에서 부친의 술자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따분할 따름이다.
사실 선더말 아재는 그곳 정미소 사장을 통하여 그 지역에서 가을에 생산이 되는 곡식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 그것을 그 정미소에서 전부 도정하여 강원도 탄광으로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업이야기가 제법 길 수밖에 없다. 그럴 때면 꼬마인 손진길을 상대하는 것은 그 집에 있는 또래들이다.
한번은 그 집 딸이 풀피리를 가지고 와서 부는 법을 가르쳐준다. 그 계집아이는 자기보다 나이도 적은데 풀피리를 잘 분다;
그런데 손진길은 열심히 불어보지만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그래도 무료한지라 풀피리를 다시 나름대로 불어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역시 어렵다. 자신은 음악에는 영 소질이 없는가 보다. 그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닫고 있는 꼬마 손진길이다.
한 시간 이상이 지나서야 얼큰하게 술에 취한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아들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다시 귀가길에 나선다. 아직 해가 있고 신작로가 잘 정비가 되어 있어서 그것이 다행이다. 만약 경주 서천내의 그 뚝방길이라고 하면 또 뚝방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나기 쉬울 것이다.
가을이 되자 선더말 아재의 식구가 전부 경주 서천내 다리를 건너 서악으로 간다. 그곳에 손수석의 사촌 누이인 손영옥이 살고 있다. 선더말 아재는 사촌을 통하여 그 지역에 전답을 상당히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소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의 전답을 매년 한차례 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7살 꼬마인 손진길은 따분하다.
그 집에서 저녁식사까지 하고 선더말 아재의 가족이 전부 걸어서 서천내로 오고 있다. 멀리서 보니 서천내 건너 경주시내의 불빛이 보인다. 전부가 집집마다 켜고 있는 백열등이다. 그러니 붉은 색을 띠고 있다. 그 불빛이 꼬마 손진길의 눈에는 얼마나 정겹고 동경의 대상인지 모른다. 깜깜한 적막 가운데 그 경주시내의 불빛이 먼발치에서 따뜻하게 자신들의 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꼬마 손진길은 가족들과 함께 먼 불빛의 포근함을 느끼면서 그곳 한복판에 있는 노동의 집을 향하여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부모님과 형과 동생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것이 참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게 자신에게 가족과 불빛이 있는 집이 없다고 하면 세상은 정말 ‘적막 강산’일 것이라고 어린 꼬마가 감히 그러한 주제넘은 생각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해가 바뀌어 1959년이 되자 8살이 된 꼬마 손진길에게 ‘아동 취학통지서’가 날라 든다;
봄이 시작되기 전 2월 하순에 먼저 학교 운동장으로 소집이 된다. 손진길은 모친과 함께 처음으로 월성국민학교에 간다;
작년 겨울에 한번 개인적으로 수업하는 광경을 창밖에서 본적은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처음이다. 학교에서는 아동들에게 학부형들과 함께 먼저 강당으로 가서 자신의 번호와 이름표를 받아서 가슴에 달라고 안내한다.
그것도 요령이 있다. 학교당국에서는 번호와 이름표를 손수건을 접어서 그 위에 부착하라고 지시한다. 당시로서는 손수건 위에 이름표를 달고 있는 아동들이 바로 새로 입학하는 국민학교 1학년 신입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연령은 1월부터 12월말까지가 아니라 3월부터 2월말까지이다. 3월에 새 학년이 시작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정하고 있다.
같은 학년이라고 하더라도 양력으로 말하자면 8살짜리와 이른 생일인 7살짜리가 함께 입학을 하고 있다. 그에 따라 반에서 학생들이 다툼이 있을 때에 서로 자기가 나이가 많다고 말하면서 우세를 차지하고자 한다. 그렇게 되면 생일이 1월과 2월인 학생들은 괜히 주눅이 든다. 양력으로 따지면 영락없이 한살이 적은 동생들이기 때문이다.
번호와 이름표를 받은 취학대상 아동들이 선생들의 인도를 따라 운동장에 운집을 한다. 선생들이 ‘1학년 몇 반’이라고 하는 깃발을 세우고 있다. 그 깃발에는 번호가 ‘몇 번부터 몇 번까지’라고 역시 적혀 있다. 그것을 보고서 아동들이 자신의 반을 찾아간다. 깃발을 든 선생들이 아동들을 두 명씩 일렬로 줄을 세운다;
그렇게 정렬이 끝나자 먼저 학교교장이 단상에 올라 학부형들에게 인사말을 한다. 그 다음에는 교감선생이 1학년 담임선생들을 학부형들에게 소개한다. 그리고 각 담임선생이 자신에게 할당이 된 아동들을 인솔하여 학부형들과 함께 교실로 들어간다. 그때 손진길 학생은 자신의 담임선생이 ‘박분도’라고 하는 나이가 좀 있는 여선생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3월이 되자 학교수업이 시작되는데 온종일 운동장에서 율동을 가르친다. 꼬마 손진길은 그것이 낯이 설고 챙피하다. 계집아이들과 함께 율동을 하자니 그것이 부끄럽고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몸치’인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아채고 있다. 그 다음에는 간단한 노래를 신입생 전체를 모아 놓고 젊은 여선생이 단상에서 가르친다.
꼬마 손진길이 그 노래를 열심히 따라서 해보지만 영 혀가 돌아가지 않고 제대로 숨이 쉬어 지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앞과 옆에 있는 학생들은 잘 따라 부르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손진길은 그들이 미리 연습을 해서 입학했는가 하고 생각한다. 사실은 자신이 ‘몸치’에다가 ‘음치’인데 그것을 아직 확실하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것들만 배우게 되면 학교생활이 낭패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운동장에서의 율동과 노래 그리고 줄 맞추기 훈련은 그리 오래하는 것이 아니다. 한주가 지나자 교실에 들어가서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한글을 익히는 것이다. 첫 시간에 담임선생이 국어교과서를 스스로 읽을 수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한다. 손진길이 깜짝 놀란다. 대다수 학생이 손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손을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학생은 자신을 포함하여 열명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이 까막눈이다. 그것을 보고서 박선생이 말한다; “오늘부터 한글의 자음과 모음, 그리고 그것을 붙여서 글을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줄 터이니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학생들은 열심히 배우도록 하라”. 손진길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로 알아 듣고서 힘차게 ‘네’라고 대답한다.
한달 남짓 배웠을 뿐인데 한글을 읽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이제는 ‘만화 책을 읽을 수가 있겠구나’고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그래서 손진길은 학교에 갔다가 집에 오면 이웃집에서 빌려 놓은 만화책을 큰소리로 읽어본다. 속이 시원하다. 지금까지 정확한 뜻을 모르고 그냥 그림만 보고 나름대로 짐작을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다음시간부터는 학교에서 계속 받아쓰기를 한다. 처음에는 국어책을 베끼는 작업이다. 그 다음에는 선생님이 읽어주는 단어를 공책에 적는 시험이다. 한글 맞춤법이 상당히 어렵다. 담임선생은 1학년과 2학년은 주로 국어시간에 읽고 쓰고 그리고 받아쓰기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봄이 무르익자 담임선생은 1학년 학생 전원이 내일 모레 ‘봄소풍’을 갈 것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와아’하고 소리를 치면서 즐거워한다. 경주시내에서 가까운 ‘오능’으로 소풍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각자 도시락을 맛있게 싸서 학부모와 함께 학교에 와서 그날 ‘오능’으로 전원이동을 한다는 지시시항이다;
손진길이 집에 와서 모친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고복수는 마침 노동 딸네집을 방문하고 있는 친정 모친 전혜숙에게 부탁한다; “어머니, 수고스럽겠지만 내일 제가 김밥 도시락을 두개 싸고 과일을 함께 보자기에 싸줄 것이니 길이를 데리고 함께 봄소풍을 좀 다녀오시지요. 제가 함께 가면 좋겠지만 집안에 일이 많아서 그러하지를 못합니다. 어머니 그렇게 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전혜숙이 말한다; “그것이 무어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하냐?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내일 길이를 데리고 봄소풍에 다녀오마, 나도 오래간만에 ‘오능’ 구경도 하고 좋지…”. 그래서 손진길은 처음으로 국민학교에 들어와서 소풍을 간다. 그것도 예쁘게 늙은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오능’으로 간다.
외할머니 전혜숙이 젊은 시절에는 그 인물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전혜숙의 딸인 고순옥도 보통 미모가 아니다;
꼬마 손진길이 한번은 막내 이모 고순옥과 함께 ‘대보뜰 방천길’로 외가로 가는데 멀리서 젊은 총각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단들이다. 처녀인 막내이모가 참으로 미인이라서 그들이 그 인물을 보고서 서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휘파람소리를 손진길은 경주극장에서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다. 남녀배우들이 사귀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면 그것을 부러워해서 그런지 총각들이 극장안에서 서로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국민학교 화장실에 적혀 있는 그 많은 ‘얼레레 꼴레레’ 또는 ‘누구와 누구가 사귄다더라’ 라고 하는 낙서와 같은 의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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