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5(작성자; 손진길)
신부 김영숙의 부친인 김기태는 장녀의 결혼식을 경주 포교당에서 신식으로 올리기를 원한다. 그는 경주에 아는 지인들이 많아서 그들이 모두 축하객으로 쉽게 올 수 있도록 시내 서부동에 있는 포교당 건물을 예식장으로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도 동의를 한다;
그래서 1956년 1월 중순에 선더말 아재의 막내동생인 손수태와 김기태의 장녀 김영숙의 신식 결혼식이 경주일원에 불교를 전파하는 중심지 포교당에서 있게 된다. 그날 많은 사람들이 신식결혼식을 구경하기 위하여 경주 포교당으로 찾아온다.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서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날 아침에 손수태는 새로 맞춘 신사복을 입고서 말끔한 신랑의 모습으로 형 손수석의 집에서 포교당으로 가려고 있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불러온 시발택시가 대문 앞에 도착을 하자 신랑인 손수태가 먼저 앞좌석에 오른다. 그리고 손수석 내외가 5살 꼬마인 손진길과 2살 아기인 손진학을 각각 무릎에 앉히면서 뒷좌석에 탄다. 그 옆좌석에 9살인 장남 손진목이 자리를 잡는다.
그날 선더말 아재의 가족은 처음으로 시발택시를 타본 것이다. 작년에 한국에서 처음 생산한 시발택시라 그런지 광이 번쩍번쩍 나는 것만 같다;
예식장으로 사용이 되는 포교당 건물의 본채에는 벌써 하객들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그날 신랑은 양복을 신부는 서양식 결혼 드레스를 입고 있다. 내남 너븐들 사람들은 신식결혼식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라 흥미롭게 예식을 지켜보고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신부는 일단 경주 쪽샘에 얻어 놓은 그들의 살림집으로 들어간다. 나중에 신혼여행을 갈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함께 살면서 벌써 주말마다 여행을 많이 다녔기에 별도의 신혼여행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신부의 배가 불러 있기에 더 좋은 여행의 기회는 나중으로 미루고자 하는 것이다.
경주경찰서에서 경비계장으로 1955년 12월 10일부터 근무하고 있던 손수석은 다음해 1956년 1월에 막냇동생 손수태를 장가보내고 봄이 되자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된다. 1947년 말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경찰생활을 하면서 손수석은 병석에 누워 본 적이 없다.
한국전쟁과 공비토벌에 참여한 경찰에게는 병석에 눕게 되는 호사를 기대할 수가 없다. 그렇게 몸을 혹사하며 살아온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지만 갑자기 소화가 안되고 몸에 황달이 심해지니 병석에 눕게 되고 만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손수석은 옛날에 모친 봉천 할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불현듯 생각난다. 경주 시내의 용한 점쟁이가 손수석의 사주를 보고서 요절할 운명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원인도 알 수 없이 몸이 약해지고 병석에 눕게 된 것일까?
그렇지만 그냥 병석에 누워있을 수가 없다. 손수석은 근근이 몸을 일으켜서 인근에 있는 ‘화생의원’을 찾아간다. 일찍이 오예준 의사가 운영하는 ‘회생의원’에서 수습의로 일한 바가 있는 원장은 손수석과 안면이 있다. 손수석이 모친 봉천 할매를 따라 그 ‘회생의원’에 간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봉천 할매의 절친인 간호사가 오예은이고 그 오라비가 의사 오예준이었다. 그래서 ‘화생의원’의 원장은 친절하게 손수석을 진료한다;
그는 며칠 후 병원에 들린 손수석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준다. 여러가지 검사를 한 결과 손수석의 병은 민물고기를 날것으로 먹어서 생긴 ‘간 디스토마’라고 한다. 옛날 같으면 엄청 위험했겠지만 요즘은 강한 주사약이 나와 있어서 그것을 정기적으로 병이 나을 때까지 맞으면 낫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주사를 맞게 되면 약기운이 너무 강해서 사람이 축 늘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환자의 체력을 보강시켜서 그 독한 주사를 맞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의사의 그 말을 남편에게서 들은 고복수는 그때부터 참으로 열심이다. 친척들에게 부탁하여 아예 검둥이 한 마리를 잡아 달라고 한다. 그 고기를 큰 솥에 넣고 푹 고아서 고기와 국물을 남편에게 계속 복용하게 한다;
일제시대부터 결핵에 걸린 환자나 몸이 허약한 병자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그 방법을 사용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고복수는 봄부터 겨울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아니하고 그렇게 남편의 몸에 힘이 빠지지 아니하도록 조치한다. 그러한 정성이 빛을 발한 것인지 겨울이 되자 손수석이 거뜬하게 건강을 회복한다. 그 동안 정기적으로 그 독한 주사를 계속 맞았던 것이다.
그렇게 남편의 병을 낫게 한 고복수는 그때부터 평생동안 자신이 죽어가는 남편을 살렸다고 말한다. 자신이 없었더라면 남편은 그때 죽고 요절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 말을 들은 자식들은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계속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독한 주사를 오래 맞고서 겨우 간디스토마를 극복한 선더말 아재는 그때부터 민물고기를 절대로 날 것으로 먹지를 않는다. 그는 전쟁통에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냇가에서 민물고기를 많이 잡아서 먹은 것이 사실이다. 수류탄을 하나 하천에 던지게 되면 그 폭발의 여파로 민물고기가 둥둥 물위에 떠오르게 된다. 그것을 건져 초장에 찍어서 먹는 것으로 단백질을 보충한 그들 전투경찰이다.
그러한 기억이 남아서 그런지 경찰생활을 오래한 자들은 민간인이 되어서도 자전거 발전기를 돌려서 그 선을 냇물에 연결하여 물고기를 잡기도 한다. 물을 타고서 전기가 흐르게 되면 물고기의 부레가 충격을 받아 물위로 둥둥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물고기를 잡아서 회로 먹는 습관이 어느틈에 민간에 널리 전파가 되고 만다.
하지만 손수석은 그때부터 민물고기를 결코 회로 먹지 않는다. 그 대신에 시장에 나가서 바다 생선 가운데 작은 가자미 종류를 횟감으로 사온다. 그것을 손질하여 초장에 찍어서 먹는데 그 맛이 민물고기보다 낫다. 경주와 포항 등에서 팔고 있는 그 작은 가재미를 흔히 ‘미주구리’라고 부르고 있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이 주말이면 수산시장이나 생선가게에 들러 아예 ‘물 가자미’인 ‘미주구리’를 상자 째 사온다. 그것을 그는 손수 손질하여 뼈와 함께 썰어서 맛있게 회로 먹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더말 아재의 아들들이 그 회를 즐긴다. 그러한 손수석의 습관은 아무래도 그가 청소년 시절 일본에서 고학을 하면서 값싼 생선을 구입하여 ‘사시미’로 많이 먹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956년 1월달에 결혼식을 올린 손수태는 8월이 되자 득녀를 한다. 그는 아내 김영숙과 함께 아기의 이름을 ‘손명희’라고 짓는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딸이 되라고 하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런지 교생실습을 무사히 마친 손수태는 울산에 있는 중학교의 교사로 정식 발령을 받는다. 처자식과 함께 울산으로 이사하면서 손수태는 그렇게 좋아한다.
선더말 아재의 둘째 형인 손수상 부부가 1957년 2월에 드디어 득남을 한다. 그동안 딸만 셋이다가 아들을 얻게 되니 너무나 기뻐한다. 양부모들이 살아 계셨더라면 손자를 보고서 참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대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그 장남의 이름을 ‘손진영’이라고 부른다. 집안에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면사무소에 가서 출생신고를 하는데 그만 면서기가 착각을 하여 ‘영광 가운데 광 자’로 표기하고 만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출생신고와 족보에는 ‘손진광’으로 표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집에서는 장남의 이름이 ‘손진영’인 것이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1956년 한해가 참으로 고난의 해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정기적으로 독한 주사를 맞고 겨우 ‘간디스토마’ 병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몸이 부실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계속 경찰서 경비계장의 직무를 수행했다.
물론 본서에서는 입사동기들과 후배들이 벌써 상관으로 근무를 하고 있어서 경비계장인 손수석의 편의를 많이 보아주고 있다. 고참 경사로 복무를 하고 있으니 개인적으로 그런 혜택도 보고 있다.
손수석은 동기들이 모두 자신의 상관이 되고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나중에 그들이 가는 길과 자신이 가야할 길이 다르다고 그가 내심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비계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가운데 1956년이 저물고 1957년이 된다.
1957년 봄이 되자 하루는 남산에 살고 있다는 도인 한사람이 손수석의 집을 방문한다. 경주에는 남산에 절이 많이 있어서 스님들이 동네에 시주를 받으려고 자주 가가호호 방문을 하지만 도인이 방문을 하는 경우는 없다. 의아해서 집을 보고 있던 고복수가 물어본다; “어째서 도인께서는 저희 집을 방문하셨습니까?”.
그 도인이 대답한다; “제가 골목에서 뛰어 놀고 있는 아이들 가운데 제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어서 물어 보았더니 이집의 둘째아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 아이의 상을 보니 저희들에게 맡겨 주시면 훗날 큰일을 할 길상으로 보입니다. 그 아이가 도학을 배우고 금석지문을 해석하게 되면 댁에도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 부모님의 의향을 여쭈어 보고자 찾아 왔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와 같은 말이다. 그렇지만 고복수는 당장 그 도인을 집 바깥으로 쫓아내지를 못한다. 그 이유는 그녀가 한가지 짚이는 것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아기를 임신했다가 유산을 하고나서 그녀는 백일간 지성을 드렸는데 마지막 일주일은 경주 남천내를 찾아가서 하늘에 득남의 복을 빌었다.
그때 남천내와 경주 남산에 어리는 서기를 그녀가 보고서 다시 아들을 임신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차남 손진길이 6살이 되는 봄에 한사람의 도인이 남산에서 자신의 집을 찾아오고 있다. 분명히 남산의 정기와 관련이 있는 아이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아들을 도인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그래서 그녀는 그 도인에게 마루에 앉아서 저녁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기이한 것은 그 도인이 아무 말도 없이 툇마루에 앉아 그 집의 가장인 손수석 계장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그 도인을 보고서 깜짝 놀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고복수가 차분하게 설명을 한다.
그러자 손수석은 먼저 그 도인을 신기하게 구경하고 있는 아들 손진길에게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나서 선더말 아재가 그 도인에게 정중하게 말한다; “도인 양반, 나를 오래 기다려준 것은 고맙소. 하지만 나는 내 아들을 남산의 도인들이 머무는 곳에서 키울 생각이 전혀 없소. 어떤 인연을 내 아들이 선계와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틀림이 없는 내 아들이오. 그러니 나는 아들이 부모의 집에서 자라 자신의 길을 가게 할 것이요”.
그렇게 딱 부러지게 거절하는 것이 좀 미안한지 손수석이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나중에 인연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게 될지 그것은 나도 모르겠소. 그러니 편한 마음으로 단념을 하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도인은 ‘허어’라고 한숨을 쉰다. 무척 아쉬운 모양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들과 함께 그 아이가 도를 닦으면 큰 일을 할 수가 있는 재목인데 그 인연이 우리와 바로 연결이 되지가 않으니 그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면 잘 키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분명 이 집에 좋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도인은 그 저문 시간에 남쪽으로 길을 잡아 휘적휘적 골목길을 벗어난다. 그와 같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 1957년 봄 선더말 아재 손수석의 집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 도인의 방문의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손수석 내외는 아들을 키우면서도 그 일이 한편으로는 궁금하다. 그러나 세월이 상당히 지나자 그 일을 잊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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