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더말 아재(손진길 소설)

선더말 아재1(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6. 00:39

선더말 아재1(작성자; 손진길)

 

1.    휴전협정을 전후하여 발생하고 있는 일들;

 

봉천 할매 정애라가 별세를 한 때가 1953년 6월 11일이다. 그녀의 셋째 아들인 선더말 아재 손수석은 6월 13일에 모친의 발인과 매관행사에 참여를 하고 곧바로 직장인 경주경찰서로 되돌아온다.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어 경찰이 비상근무를 하고 있는 시국이라 보안계장인 그가 오래 자리를 비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5일이 지나자 뜻밖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6월 18일 자정을 기하여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통하여 거제, 영천, 대구, 부산, 부평 등 8개 수용소에 갇혀 있던 3만 7천명의 포로 가운데 약 2만 7천명의 반공포로를 일시에 석방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고 만다;

당시 포로수용소의 전경이 다음과 같다;

그리고 반공포로들을 격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반공포로의 석방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보안계장의 입장에서 손수석 경사는 그 일의 전말을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다;

첫째로, 1953년 4월부터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 측과 북한 인민군 및 중공군 사이에 휴전을 위한 협의가 크게 진전이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을 더 분명하게 표명한다. 그 방법이 세가지이다;

(1)첫째, 한국의 국방장관의 성명서를 통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외국군대가 모두 철수한 상태에서 북한군이 무장을 해제하고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2)둘째, 한국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이 주장하고 있는 휴전반대와 한반도 통일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의결한다.

(3)셋째, 한국민들은 휴전협정을 반대하며 남북한의 통일을 원한다는 군중집회를 계속하여 개최하는 것이다;

둘째로, 빨리 휴전을 하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유엔군과 중공군은 그 입장이 서로 맞아 떨어지고 있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민의 요구를 아예 무시한다. 자국의 군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조차 유엔사령관에게 넘기고 있는 한국정부이므로 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등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자 이승만 대통령은  5월에 보다 현실적인 요구를 제시한다. 그 내용이 세가지이다;  

(1)  첫째, 포로의 송환을 위한 협의에 한국의 대표가 필히 참석을 해야 한다.

(2)  둘째, 휴전협정을 하기 전에 반드시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한국을 지킨다고 하는 방위조약을 체결해야 하며 동시에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시켜주어야 한다.

(3)  셋째,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파괴가 된 대한민국의 모든 시설을 복구하여 준다는 약속을 해야만 한다.

 셋째로, 그와 같은 현실적인 이승만 대통령의 요구가 무시된 채 6월에 들어서자 양진영 사이의 휴전협상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조치를 통하여 강력하게 휴전협상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다.

  미국측에서는 설마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강력한 반발을 할 것으로는 미처 생각하고 있지 아니하다가 호되게 당한 후에 즉시 국무차관보를 한국으로 파견한다. 그 결과 한미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이 한국의 전후복구를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전부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한미간의 갈등을 봉합한다.

넷째로,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태도이다. 그는 유엔군사령관인 미국의 장군에게 위임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되찾지 않는다. 그리고 휴전협정에 일체 참여하지를 아니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점에 대하여 손수석 계장은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이해를 하고 있다; 

(1) 첫째,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이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한다고 하면 미군과 유엔군은 반드시 참전을 해야만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한 상태이므로 북한군이 남침을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이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만약, 북한이 재침을 했을 때에 미국이 군사작전에 나서지 아니하면 어떻게 되는가? 작전지휘권이 없는 한국의 대통령은 무엇을 할 수가 있는가?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물러난 이후의 한국지도자들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다.

(2) 둘째, 자국의 안보를 강대국에게 위임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주적인 국가라고 볼 수가 없다. 그 옛날 명나라와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긴 조선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한 사대주의를 싫어하는 손수석은 그 점이 참으로 마음에 들지가 않는 것이다.

(3) 셋째, 휴전협정에 서명을 하지 아니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고 남북한의 통일을 소원한다고 하는 자신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국제무대에서 외교적으로 고립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당당하게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의 수반으로서 휴전협정에 참여하고 그 다음에 북한이 협정을 위반할 때에는 그에 대한 징계를 해야만 한다. 그러한 모든 판단과 대응조치를 오로지 미국과 유엔에 맡겨버리고 있는 것은 일종의 책임회피로 보인다.

손수석이 동의하든 아니하든 상관이 없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그 정전협정으로 인하여 3년이상 끌어온 한국전쟁이 일단은 휴전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그 휴전협정은 북한의 인민군, 중공의 지원군,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 등 3자 사이에 체결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세 무리의 군대를 대표하는 사령관들이 휴전협정에 서명을 하고 있는데 그 자들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 중공의 지원군사령관 팽덕회 그리고 북한군 사령관 김일성이다. 또한 양진영의 수석대표들이 역시 서명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해리슨과 남일이다. 참고로 그들 5명이 서명한 ‘정전협정서’가 다음과 같다;

그 휴전협정의 장소가 경기도 파주시 문산에 있는 유엔기지 내 ‘문산극장’의 무대이다. 그 장소의 바깥에서 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있는 모습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서명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참고로, 본문 5개조와 구체적인 63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는 휴전협정의 주요 내용이 다음과 같다; (1)첫째, ‘DMZ’로 불리고 있는 ‘비무장지대’의 설치 (2)둘째,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의 설치 (3)셋째, 포로교환 및 고위급 정치회담에 관한 규정 등이다.

일단 휴전이 되었으므로 그때부터 대한민국에서는 전후의 복구사업이 시작된다. 그 일은 주로 미국의 지원과 원조로 이루어지고 있다. 유엔에 가입하고 있는 나라들이 돕고는 있으나 그것보다는 미국의 지원이 월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을 잘 알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적인 역량이 전후복구에 있어서는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손수석이 볼 때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은 우선 배고픈 한국민들에게 미국의 밀가루를 양식으로 받아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부수어진 것을 다시 재건한 것이다.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이 대통령이 너무 나이가 많고 또한 자수성가의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이다.

참고로, 미군정 때부터 한국전쟁기간 동안 계속 한국에 원조한 미국의 밀가루가 다음과 같다. 그것으로 배가 고픈 한국사람들이 허기를 달랜 것이다;

다음은 생계를 위하여 한국백성들이 미국의 구호 밀가루를 받기 위하여 줄을 서고 있는 광경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5년부터는 밀가루가 아니라 미국의 밀을 원조 받아 그것을 가공하여 국민들에게 배급한다. 그러한  사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당시 밀가루 포대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더구나 미국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미국의 옷가지 등 구호물자가 역시 한국의 교회를 통하여 제공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사실들은 전후 한국의 정부는 배가 고픈 국민들을 먹여 살리는데 정신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승만 정권에 대하여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기대한다고 하는 것은 애초부터 시기상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언제 경제개발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더 나은 삶을 한국민들이 누리도록 만들 수가 있을까? 동시에 자주, 자립, 자강의 시대는 언제 눈앞에 다가오게 될까? 그때를 기다리면서 손수석은 계속 경찰에 남아 있고자 한다. 그 기다림의 세월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당장은 다음달 곧1953년 8월 19일에 손수석은 백모 이신자 여사가 별세를 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3일째가 되는 21일에 3일장으로 발인을 한다고 하므로 손수석은 그날 하루 휴가를 얻어 급히 자전거를 타고서 내남 너븐들로 간다. 상주가 된 둘째 형 손수상이 조문객들의 조문을 받고 있다.

그날 손수석은 삼베로 된 망건을 쓰고서 함께 상주가 되어 선산이 있는 안심으로 향한다. 그곳에 백부인 손영한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선산에 부부가 이웃하여 묘택을 얻고 있다;

그런데 이신자는 손아래 동서인 봉천 할매 정애라가 6월달에 먼저 별세를 하고 나자 온 가문에 어른으로서는 자신이 혼자 남은 것과 같은 쓸쓸함을 느낀다. 나이가 5살이나 더 많은 자신은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손아래인 정애라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무척 외로움을 타고 있던 이신자가 갑자기 면역력이 크게 떨어졌는지 8월 중순이 되자 덜컥 병석에 눕고 만다. 양아들인 손수상 내외가 며칠간 병구환을 열심히 해도 차도가 없다. 며칠 견디지를 못하고 밤사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어른들이 하나같이 70세를 넘기지 못하고 일찍 별세를 하고 있으니 자손들이 할 말이 없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 36년과 해방 후 3년간의 전쟁을 겪은 후유증 때문으로 보인다.

험한 세월을 살아 왔으니 어떻게 장수함을 바랄 수가 있을까? 그러한 어른들의 짧은 향년을 보고서 그 자손들이 자신들도 장수를 누리기는 힘들지도 모른다고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들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전개가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