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 할매(손진길 소설)

봉천 할매30(작성자; 손진길)

손진길 2021. 10. 1. 16:47

봉천 할매30(작성자; 손진길)

 

다음달 곧 1944년 2월이 되자 손수석이 예견한대로 ‘미쯔비시 비바이 석탄회사’에서 오래된 광부들의 임금을 조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급료를 깎는 조정안이다. 당시 일본은 군부가 내각을 완전 장악하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을 한창 수행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군국주의 일본군부의 지시를 받고 있는 방위산업체 석탄회사가 광부들의 임금을 깎는 일에 대하여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미쯔비시 탄광에서는 임금에 불만이 있는 광부들은 회사를 떠나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조선인 광부들이 일본말도 서툴고 또 일본에는 달리 연고가 없기 때문에 광산을 떠날 수가 없을 것으로 보고서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래된 조선인 광부들이 회사를 관두고 떠났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오래된 광부들은 연봉이 높기 때문에 회사가 더 이상 그들을 사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떠나더라도 신참으로 광부를 얼마든지 충원할 수 있는 방법이 군부와 조선총독부의 도움으로 이제는 확실하게 생긴 것이다. 참고로, 당시 조선에서 징용자를 태우고 내달리는 차량의 모습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징용대상자를 신체검사하고 있는 그림이 다음과 같다;

또 하나는, 일본인 인력회사가 조선총독부의 도움을 받아서 조선에서 강제 징용하여 온 인부를 석탄회사가 광부로 사용하는 경우 회사가 그들의 임금을 외상으로 처리할 수가 있다. 그것이 참으로 달콤한 유혹이며 탄광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인 것이다. 참고로, 징용된 조선인 광부들의 모습을 담은 단체사진이 다음과 같다;

다음은 당시 갱도 바깥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이 운반차량에 석탄을 적재하고 있는 노동현장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쯔끼모도가 나서서 자신이 고향에서 데리고 온 광부들을 은밀하게 탄광에서 빼내야만 한다. 그런데 고민이 있다. 그들을 퇴사하게 하여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는 경우 다시 징용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자진 퇴사를 하더라도 조선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일본 열도에 남아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난 달 1월초에 오사카의 배인근 형과 동경의 안춘근 형을 만나 그 문제를 이미 상의한 적이 있지만 막상 그 일을 실천하려고 하니 보통일이 아니다. 그래서 2월 중순에 매형인 이도성과 친형인 손수상 그리고 고향 출신 광부들 가운데 연장자인 가까운 친척 손수옥 및 손수관 등과 비밀리에 회의를 한다.

그랬더니 그들의 의견이 먼저 비바이의 광산을 그만두고 삿포로 인근에 있는 삼판에 가서 인부로 일을 하겠다고 한다. 사실 그들 가운데 희생자는 없었지만 1941년 3월에 조선인 광부 32명이 희생을 당한 탄광사고는 끔찍한 것이었다. 언제 그러한 사고가 재발할지 모른다. 돈도 좋지만 역시 목숨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그보다 안전한 삼판 일이 훨씬 나은 것이다.

그 다음에는 상황을 보아가면서 동경이나 오사카로 옮겨갔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일본의 군부가 지금은 강제 징용자들을 대거 탄광으로 보내고 있지만 멀지 않아 벌채현장에도 보낼 것으로 전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삼판 인부들에 대해서 정상적인 임금을 지불하지 아니할 것이 뻔한 것이다.

고향사람들도 전쟁지역이 자꾸만 넓어지자 일본제국이 일본과 조선의 젊은이들을 더 많이 징병하거나 징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방위산업체가 아닌 민간부문에서는 젊은 인력이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일본의 실정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단계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대응전략이 모색이 되고 합의가 되자 손수석은 그들을 통하여 광부로 일하고 있는 고향사람들에게 3차례로 나누어 석탄회사에 사표를 내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그들을 매형인 이도성이 일하고 있는 삼판으로 보낸다. 그곳에 벌목공으로 다시 취업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쯔끼모도가 사전에 삼판회사의 가토 사장을 만나 조선인 인부를 한꺼번에 많이 구했으니 그들을 채용해 달라고 벌써 부탁했다.

일본의 군부는 중동에서 계속 석유가 들어오지를 못하자 그 대신에 석탄생산을 늘리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에 따라 탄광의 수가 증가하고 동시에 탄광에 목재를 공급하고 있는 벌목사업이 북해도에서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러니 가토 사장이 벌목일꾼을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익히 알고 있는 쯔끼모도가 고향 출신 광부들을 순차적으로 빼내어 그 삼판회사의 일꾼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한 일련의 작업이 전부 마무리가 된 시점이 1944년 3월말경이다. 그들이 삼판에서 일하고 있는 그해 5월달에 ‘미쯔비시 비바이 탄광’에서 조선인 광부 71명이 사고로 죽게 되는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된다;

자신들의 퇴사가 2달만 지체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 사고로 죽어간 동료들에 대해서는 애통하지만 그러한 불행을 자신들이 겨우 피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지나가는 것이다. 참고로, 당시 살아 남은 조선인 징용자가 자신이 북해도로 끌려간 노선을 진술한 내용이 다음 지도와 같다;

그런데 1944년 가을이 되자 일본군부는 탄광에 목재를 공급하고 있는 삼판회사에 대해서도 조선인 징용자들을 사용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벌목공의 임금을 거의 지불하지 않도록 하여 일본제국이 인위적으로 목재 값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재정적으로 전쟁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일본의 군부는 탄광의 석탄을 헐값으로 가져가고 있다. 그 대신에 석탄회사가 계속 운영이 될 수 있도록 인건비를 줄여주고 있는데 그 방법이 조선인 징용자를 활용하여 외상으로 석탄을 생산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와 똑같은 정책을 이제는 삼판회사에 적용하고자 한다;

손수석이 삼판회사에서 조선인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매형 이도성과 부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충청도 출신 십장 고민달과 부산출신 십장 정동수를 먼저 만나 그들과 일차 상의를 한다. 그 다음에는 광부생활을 하다가 삼판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의 대표격으로 연장자인 친척 손수옥 및 손수관과 협의를 한다. 최종적으로 친형인 손수상과 형수 박재순을 만난다. 박재순은 임신을 하여 몸이 조금 무거워져 있다.

그 결과 두 차례로 나누어 그들이 북해도를 벗어나도록 계획을 세운다; 일차로 빠져나가는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의 수도인 동경으로 간다. 그곳 ‘쯔끼모도 쌀 상회’를 찾아가서 안춘근의 집에서 짐을 풀고 동경시내에서 일자리를 찾도록 한다. 그리고 동경에 형성이 되어 있는 조선인 마을에 정착하도록 유도한다.

그 조의 조장을 맡겠다고 나선 사람이 부산 출신 정동수이다. 정동수는 자신이 일본에 온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척이 동경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손수석이 주말을 이용하여 그를 데리고 동경으로 가서 안춘근에게 소개를 시킨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보니까 정동수의 본가가 고 안성기 교장의 집과 같은 동네이다. 안춘근과는 나이도 비슷하여 서로 금방 친해진다. 그 결과 정동수가 제1조의 조장이 된다.

두번째로 홋카이도를 벗어나는 조선인들의 조장은 이도성이 맡기로 한다. 손수석은 그 조에 자신의 고향 출신을 모두 포함시킨다. 그리고 오사카로 가서 정착하도록 한다. 이도성과 그와 동향인 경상도 예천과 문경 출신 7명은 과거 오사카 배인근의 저택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으므로 그 집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그들은 노동을 해본 경험이 있기에 손수석이 그들을 별도로 배인근에게 데리고 가서 소개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특이한 사항은 충청도 출신 노동자들을 제1조에 포함시켰더니 두사람이 자신들을 제2조에 넣어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사람은 충청도 십장을 맡고 있던 제주 고씨 고민달이고 또 한사람은 인동 장씨 장기동이다. 손수석과 이도성이 그들을 면담한다. 

그 결과 고민달은 이왕 충청도 음성에서 타향으로 와서 살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홋카이도에서 그동안 조선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손수석을 유심히 관찰하였는데 앞으로 그와 함께 행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수석의 매형인 이도성과 일단 행동을 같이 하겠다는 결심을 밝힌다.

장기동의 경우는 그 입장이 다르다. 그는 손수석보다 4살이 많다. 26살인 그는 고향인 구미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역시 손수석과 행동을 앞으로 같이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손수석과 이도성이 물어보니 그가 주저하면서 결국에는 입을 뗀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사실 저는 몇 달 되지가 않았지만 함바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손자옥과 사귀고 있어요. 저는 천주교인입니다. 그런데 손자옥과 저는 이곳 성당에 찾아가서 평생을 함께하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하여 저는 손자옥과 행동을 함께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옥이가 사촌 오라비인 손수석과 함께 움직이겠다고 하니 저도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26살의 노총각과 19살의 처녀가 서로 눈이 맞아 죽고 못사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니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손수석이 물어본다; “그렇다면, 장형은 손자옥과 살림을 꾸릴 만한 돈은 마련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오사카로 가면 자립할 때까지는 한동안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생활을 꾸려 나가야 할텐데요…”.

그러자 장기동이 ‘씨익’ 웃으면서 답한다; “저는 그동안 제가 고생해서 번 돈을 십일조는 성당에 내고 절반은 고향의 부모님께 보냈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제 자신의 앞날을 위하여 저축했지요. 그러므로 오사카로 가더라도 방을 얻어서 손자옥이와 살림을 꾸릴 자신은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이도성이 파안대소를 한다. 그리고 얼른 나가서 손수상 내외를 데리고 방으로 온다. 그 뒤를 손자옥이 마치 죄인처럼 따라서 들어오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손수석이 모두 방안에 앉도록 한 다음에 형 손수상에게 말한다; “형님, 알고 계셨습니까? 여기 장형이 손자옥이와 백년해로를 하자고 성당에서 맹세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옥아, 그 말이 사실이냐?”.

손수상 내외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렇지만 손자옥이는 고개를 숙이면서 두 뺨이 붉어진다. 그러면서 조용히 말을 한다; “오라버니, 그 말이 맞아요. 저는 장기동 씨와 평생을 함께 천주님을 모시고 한가정을 이루어 잘 살고 싶어요.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제가 한 약속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싶어요. 그러니 저를 도와주세요. 오라버니들…”;

그러자 손수석이 결단을 내린다; “자옥아, 너를 이곳으로 데리고 올 때에 나는 백부님과 백모님에게 약속을 했다. 그분들을 대신하여 내가 너를 이곳에서 잘 돌보아주겠다고… 그런데 너는 장기동 씨와 백년해로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다. 나에게 먼저 그것을 말하지 아니한 것은 섭섭하지만 청춘남녀가 이국에서 그렇게 어려운 결정을 하고 또한 서로 그 맹세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의사를 존중해주마. 그렇다면, 자옥이 너는 혼례를 어떻게 할 것이니?. 그리고 언제 내가 고향 부모님께 그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니? 너의 생각을 말해다오”.

그러자 손자옥의 말이 딱 부러진다; “오라버니, 저희들은 성당에서 천주님 앞에서 부부가 되겠다고 서원하고 맹세한 것으로 충분해요. 정식 혼례식을 올리는 대신에 한 푼이라도 더 아껴서 일본에서 가정을 꾸릴 거예요. 그리고 이제 북해도나 오사카 어디에서 계속 살아갈지 모르잖아요. 그러니 자식을 낳은 다음에 고향 부모님께 편지를 드릴 거예요. 오라버님들 부디 그렇게 허락을 해주세요, 네?...”.

그 말을 듣자 손수상과 손수석은 더 할말이 없다. 조선이 아니라 일본 땅에서 그들 두사람이 한마음으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장차 살아가겠다고 하는데 누가 말릴 것인가? 또 말려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서 두사람이 장기동에게 말한다; “자옥이의 결심이 굳건하니, 장서방도 그 말을 고맙게 생각하고 평생 고생을 시키지 아니하도록 최선을 다해 주세요. 우리는 자옥이의 뜻대로 할 테니까요…”.

장기동이 비록 연장자이지만 그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석과 손수상에게 큰절을 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이는 제가 조금 많은지 몰라도 이제 여동생을 저에게 아내로 주셨으니 제가 두 분을 손위 처남으로 대접하겠습니다”. 반절을 하면서 손수상과 손수석이 말한다; “서로 앞으로 돕고 한가족으로 살아가 봅시다”. 그러자 그 옆에서 이도성이 말한다; “허허, 장기동, 그대는 어찌하여 이제 윗동서가 되는 나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 게야? 이거 군기를 잡아야 하겠는걸…”.

그러자 장기동이 얼른 이도성에게 큰절을 하면서 말한다; “아이구, 제가 급해서 그만 빼먹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앞으로 도와 주셔야 할 사촌 동서인 형님께서 그렇게 저를 나무라시면 제 처지가 참 곤란해 집니다. 앞으로 부디 많이 지도 편달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듣자 손수석과 손수상이 ‘허허’라고 웃는다. 그 옆에서 박재순이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시누이 손자옥을 힐끗 쳐다본다. 그렇게 모두들 웃고 있는 사이에 바깥에서는 1944년 홋카이도의 가을이 자꾸 깊어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