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305강(사63: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4월 10일(주일)
공의를 말하며 구원하는 능력을 지니신 창조주께서 온 세상을 돌아보시고 남쪽의 에돔을 거쳐 다시 예루살렘에 오시다(사63:1-4)
본문에서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에돔의 수도 보스라에서 가나안으로 입성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는 어떠한 의미가 깔려 있는 것일까요?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에 따르게 되면, 선민의 나라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고 난 후 그 진노의 큰 잔을 이방나라들이 차례로 마시도록 되어 있습니다(사33-34장, 사51:17-23, 렘25:29). 그 순서는 주변의 이방나라로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의 모든 나라에까지 이르게 됩니다(렘25:18-26).
한 차례 모두가 마신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본문에서 이사야는 다시 가장 가까운 에돔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고 있다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에돔에 대하여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유다 왕국의 이웃으로는 에돔 뿐만이 아니라 모압과 암몬 그리고 블레셋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에돔의 징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사34:5-15). 그 이유는 이사야가 당대에 유다가 에돔을 정벌하였으나(대하25:14, 26:1-15) 훗날에는 도리어 에돔의 후손인 이두매의 왕가가 오랜 세월 선민들을 지배하게 되는 치욕의 역사를 미리 예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에돔과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과의 악연은 그 뿌리가 깊습니다. 본래 에돔은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별명입니다(창25:30). 즉, 이스라엘로 불리게 되는 야곱과 쌍둥이로 태어난 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자손인 에돔 족속이야말로 선민 이스라엘 자손과 가장 가까운 혈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 왕가의 유대 통치 때문에 그 관계는 악연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들이 염해의 아래쪽 세일 산과 그 들판을 차지하면서 그곳의 호리족속(히위 족속의 한 갈래로 보임)과 하나의 민족을 이루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창36:6-43). 에돔 족속은 그 옛날 다윗 대왕 때 점령을 당합니다(삼하8:13-14). 그리고 이사야 시대에는 웃시야 왕에 의하여 또 정복을 당하고 맙니다(대하26:1-15). 그 후 다시 독립을 했으나 주전 2세기에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일부 에돔 사람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여 살아남게 됩니다. 그들이 바로 가나안 남부 국경지대에 살고 있는 이두매 사람들입니다(막3:8).
그 후 하스모니안 왕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us, 재위bc 103-76)는 하스모니안 왕조에 충성하고 있는 이두매 출신 안티파터(Antipater)를 이두매 총독으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안티파터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동진하여 하스모니안 왕조를 압박하자 얼른 로마의 편에 섭니다. 그 공로로 그는 로마의 도움을 받아 주전 55년경 이두매 왕가를 시작하고 스스로 안티파터1세가 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안티파터2세는 주전 47년에 시저의 도움으로 유다의 총독을 겸하게 되고 안티파터2세의 똑똑한 차남 헤롯은 갈릴리 총독이 됩니다. 그 후 헤롯은 주전 40년경 로마로 들어가서 유다 왕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는 주전 37년에 로마의 도움으로 유다를 점령하고 반대세력을 모조리 제거한 후 스스로 헤롯 대왕이 됩니다.
그 후 헤롯 왕조가 주후 93년에 종말을 고할 때까지 선민 유대인들에게는 이민족 왕조의 직접 통치라는 치욕을 안겨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민출신의 선지자인 이사야가 에돔을 심판하고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을 상세하게 하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는 본문의 내용을 검토하면서 더 깊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방법은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a)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 (b)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 (c)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63:1); 공의를 선포하며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신 이가 에돔에서 오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에돔에서 오는 이 누구며, 붉은 옷을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이 누구냐?”(사63:1a); 질문형식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독자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의 예언이 그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에돔에서 선민의 사회 예루살렘으로 누군가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이 매우 붉습니다. 에돔의 수도 보스라에서 붉은 옷을 입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특이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중동지역에서 붉은 옷을 입는 경우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제후나 왕이 홍포를 입습니다(마27:28). 물론 황제는 황금색이나 자주색 옷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상정한다면 황금색 옷을 말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홍포를 입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구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심판의 참상을 미리 알려주고 있는 일종의 실마리와 같은 것입니다.
(2) “그의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이가 누구냐?”(사63:1b); 여기서 이사야는 홍포 이야기를 빼고 있습니다. 단지 여호와 하나님의 의복은 본래 화려하며 그 능력은 탁월하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큰 능력은 당연히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행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입니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돔을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입성하신 다음에 선민들을 향하여 무슨 말씀부터 하실까요? 칭찬일까요? 아니면 질책일까요? 질책일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 이유는 에돔에서 흘린 사람들의 피가 너무나 애석하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이 에돔 족속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옛날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에 나섰더라도 에돔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63:1c); 이사야는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먼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니 공의를 말하는 이요, 구원하는 능력을 가진 이니라”(사63:1c). 창조주 하나님은 손수 만드신 피조물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살리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함부로 심판하고 살상을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 사람들이 창조주의 구원의 능력을 의지하여 용서함을 빌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진작에 달라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조차 그러하지를 않습니다. 구원하는 능력을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방 신이나 사람이 만든 우상에게서 구하고자 합니다. 과연 사람을 해치고자 하는 악한 영이나 피조물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마치 21세기의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것과 같은 난센스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 같으냐?”(사63:2); 공의를 선포하며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도대체 에돔에서 무슨 일을 행하신 것일까요? 그 의복이 붉은 것이 처음에는 화려한 색상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옷을 입은 채로 진홍색의 포도가 잔뜩 들어 있는 포도즙 틀을 밟을 때에 그 즙이 튀어 생긴 무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옷을 입으신 채로 그 포도즙 틀을 힘껏 밟으신 것일까요?
셋째로, “(a)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 (b)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c)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63:3);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노로 에돔 백성을 심판하실 것임을 확정적인 예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선민들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역할을 담당하지 아니했음을 꾸짖고 있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 틀을 밟았는데”(사63:3a); 여기서 ‘포도즙 틀’은 이중적이 의미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포도주를 제조하기 위한 필수과정입니다. 또 하나는 짓밟아서 완전히 그 모양을 파괴해버리는 것입니다;
1) 천국잔치자리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포도주를 얻기 위해서는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막14:25).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살리고자 하시는 그 공의의 정신을 깨닫고 인생 가운데 철저하게 실천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는 길에는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큰 복으로 흘러 넘치게 됩니다(창12:3). 그리하면 물이 변하여 좋은 포도주가 되는 ‘가나잔치의 기적’이 창출이 됩니다(요2:7-9). 성도들이 스스로 성화의 과정을 밟으며 좋은 포도열매를 많이 맺어 최상품의 포도주를 생산하고 있으니 천국잔치자리에서는 그것을 맛만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홀로 좋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포도즙 틀을 밟지 아니하셔도 됩니다.
2) 선민들이 하나님신앙을 이방 땅에 전혀 전하지를 않습니다. 특히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장 가까운 혈족인 에돔 족속을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하늘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게 한 원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지를 않습니다. 중보의 기도도 드리지를 않습니다. 그저 에돔 족속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로 완전히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에돔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 심판이 얼마나 참혹한지 모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참조해보면 그 참상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숫양의 콩팥기름으로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를 위한 희생이 보스라에 있고, 큰 살륙이 에돔 땅에 있음이라”(사34:5-6),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은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나는 자가 영영히 없겠고”(사34:9-10).
3) 한편, 여호와 하나님은 에돔 족속에게 그토록 참혹한 심판을 행하시면서 그 속마음이 아프기 그지 없습니다. 그 참상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출19:5). 그리고 그들 선민들에게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신앙을 전하고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라고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무를 맡겼습니다(출19:6). 아브라함이나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했습니다(창18:23-32, 출32:11-14, 32). 그런데 선민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전혀 그 사명과 의무를 행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토록 참혹한 심판이 에돔 땅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선민들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실망이 크시다고 하겠습니다.
(2)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사63:3b); 에돔 족속의 조상인 에서는 약속의 아들 이삭의 장자입니다(창25:25). 그는 하나님신앙이 특출한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 사이에서 탄생한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신앙을 멀리 하고 스스로 들과 산으로 뛰어다니면서 칼로써 성공하기를 도모한 야인입니다(창25:27-28). 에서의 모범을 쫓아서 에돔 족속들이 대대로 칼로써 가나안 남부 에돔 들판을 호령하고 있습니다(창36:8-43). 따라서 우상문화가 극심합니다(대하25:20).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그 땅에(창14:8, 왕하14:7) 똑 같은 황금만능사상과 우상문화를 탄생시키고 있는 에돔 족속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가 극심하십니다.
(3)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사63:3c); 에돔 족속을 위한 속죄의 제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중보기도도 없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실로 가혹합니다.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고 그 피가 여호와의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 옷을 그대로 입으신 채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민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 옷에 묻은 피가 에돔 족속의 피이기 이전에 선민들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사명을 등한시한 결과임을 눈으로 똑똑히 보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넷째로,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사63:4); 구속할 그 해 가운데 원수 갚는 날이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1) 역사적으로, 구속할 그 해는 이사야 시대로부터 700년 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 대속의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만민구원의 해가 밝아오기 때문입니다(마27:49-54, 행2:30-42). 그 십자가 사건이 바로 자신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구속의 제사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그 인생 가운데 구속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롬8:1-15).
(2) 그런데 그 사실을 믿지 아니하고 자신의 힘과 지혜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할 수가 있다고 장담하거나 이방 신이나 우상을 의지함으로써 아주 손쉽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철저하게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하는 능력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최종적으로 이사야가 동족인 선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예언은 한 가지입니다; “부디 에돔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라는 것입니다”(마5:43-48, 롬12:19-21). 그리하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고 그 피가 그대로 묻은 홍포를 입으신 채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사63:1-4).
그 다음에 어떠한 일이 예루살렘에서 발생할까요? 구원일까요 아니면 심판일까요? 모세가 창세기에서 그 해답을 다음과 같이 벌써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창44:30-31).
야곱의 자손과 에서의 자손의 생명이 모두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약속의 아들 이삭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모두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식처럼 만드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두 구원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지 아니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극히 슬퍼하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시고 아무쪼록 만민구원을 위하여 끝까지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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