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86강(사59:9-12)

손진길 2021. 9. 20. 13:00

이사야 강해 제286(59:9-12)

작성자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주후 2016 3 22()

 

이사야가 동족들을 대신하여 선민들의 잘못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다먼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은 물론이요 정의사회구현조차 못하고 있는 선민사회의 현실에 대하여 진솔하게 고백하다(59:9-12).

 

흔히 서구의 중세시대를 암흑의 시대(the Dark Ages)라고 부르고 있습니다그 이유는 종교적인 권력이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이성을 모두 가려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만약 올바른 종교적인 권력이라고 한다면 창조주 하나님의 종이 되어 주인의 뜻을 구현해야만 합니다왜냐하면종의 뜻보다 주인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법도(法度)이며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26:5, 15:25, 18:16, 20, 18:4-5, 15:16, 4:1, 33:21).

근본적으로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그 말씀의 뜻만을 실천할 때에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 돌볼 수가 있습니다왜 사람의 뜻으로는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그 생명을 살릴 수가 없는 것일까요그 이유는 사람의 안목과 교훈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좁고 제한적이어서 도저히 모든 피조물을 살리고 돌볼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의 경지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실제로 사람들은 인생 가운데 제살기와 자기 집단 살리기에 급급합니다따라서 현실적으로 남을 돌아볼 겨를이 없으며 더구나 다른 집단의 몫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좁은 사람의 생각을 벗어나서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을 실천하라고 성경말씀이 가르치고 있습니다특히 여호와의 종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실천하는 삶에 앞장을 서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종의 법도를 지켜 선민의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먼저 기업을 택하였으니곧 입법자의 분깃으로 준비된 것이로다그가 백성의 수령들과 함께 와서 여호와의 공의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33:21).

하지만 서구의 중세시대의 종교권력과 제도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종교조직의 정상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고 있는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그런데 그 최고의 권력자가 언제나 자기 종교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달리 말하자면최고권력자가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유권해석의 권한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 해석의 권리를 오로지 자신이 속한 종교적 집단의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진지하게 누구라도 성경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풀이를 하고 그 해석을 선포한다면 그러한 암흑시대를 일찍 청산할 수 있는 빛을 서구사회에 비추어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암흑시대는 그러한 행위가 엄격하게 규제가 되고 있던 시대입니다오로지 종교권력의 정상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만이 경전의 해석에 대한 유일한 권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종에 불과한 사람의 목소리가 그것도 종교적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그 왜곡된 해석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신할 수가 있겠습니까그와 같은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적은 정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혹시 그 옛날 하나님을 만난 선지자와 대등한 말씀의 권위를 주장하고 싶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경전에 적혀있는 하나님말씀의 뜻과 대조를 해보는 순서가 있어야만 합니다그런데 서구의 중세시대는 그 절차가 완벽하게 누락이 되고 있습니다그 때문에 서구의 중세시대는 종교적으로, 암흑의 시대(the Dark Ages)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선민사회가 바로 그러한 암흑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이사야가 어떠한 근거로 그와 같이 말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본문의 각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그리고 그 깊은 메시지를 도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b)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c) 우리가 을 바라나 어둠뿐이요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59:9); 앞부분 제59장 제1-8절에서 이사야는 선민들의 죄악과 포악과 말씀에 대한 왜곡이 선민사회의 황폐와 파멸을 초래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본문에서 이사야는 자신의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59:9a); 정의(正義, justice)의 개념은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그리고 그것이 자기가 속하고 있는 집단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1)    따라서 정의는 인간의 법정에서 그 정당성과 의로움이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그런데 어째서 이사야는 정의’가 선민사회에서 멀리 있다고 언급하고 있을까요그 이유는 선민사회 내에 분열이 있으며 서로 자신들이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이사야 시대의 선민사회는 마치 중세유럽의 스콜라철학시대의 말기 모습과 비슷합니다서로 상대방을 이단이라고 몰아부침으로써 자신이 정통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당장 분열과 백성들의 피 흘림을 막기 위해서라도 전체사회가 옳다고 인정하는 정의사회구현이 시급한 형편입니다.

(2)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59:9b); 공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옳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당연히 그 판정의 기준은 하나님의 시각입니다따라서 창조주의 눈으로 피조세계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창조주는 피조물을 만드신 아버지와 같습니다그러므로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자식과 같은 피조물 전체의 생명을 살리고 돌보고자 하십니다그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공의의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2)    그런데 이사야가 바라볼 때에 동족인 선민들의 마음가짐이 그것이 아닙니다선민들만 구원을 받고 현세적인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받아서 누리고자 합니다그 결과 하나님을 모르고서 제멋대로 살고 있는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으로 멸망을 당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3)    그것은 천하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주고 있는 믿음의 조상들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12:3, 22:18, 26:4, 28:14). 따라서 이사야는, 공의가 우리(선민)에게 미치지 못한즉(59:9b)이라고 여기서 가슴 아프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3)  “우리가 을 바라나 어둠뿐이요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59:9c);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이 서로 헐뜯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선민사회에서 무죄한 약자의 피가 흘러 넘치며 정의사회구현도 어렵습니다더구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망해도 좋고 자신들 선민들만 구원과 세상적인 복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    따라서 천하만민에게 구원과 영생의 복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제사장나라 선지자의 사명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이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그 결과 그 옛날 애굽에 임한 적이 있는 흑암의 재앙이 도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10:21-23).

2)    그 옛날 이방인 애굽처럼 지금은 선민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그와 같은 암흑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을 바라나 어둠뿐이요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59:9c). 누구나 빛을 원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밝은 낮에 행하기를 원합니다하지만 온 세상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전하며 밝은 구원의 소망을 나누어주는 일에 있어서는 인색하기 그지 없습니다자신들만 세상의 향락을 즐기고 구원을 향유하고자 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그와 같은 선민우월주의가 이제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재앙덩어리가 되고 있습니다한 마디로캄캄한 어둠의 시대가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a) 우리가 맹인같이 담을 더듬으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 (b) 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c)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59:10); 출애굽 당시 애굽 땅에 임한 흑암의 재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그리고 그 재앙의 영적인 의미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1)  우리가 맹인같이 담을 더듬으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59:10a); 출애굽 당시 애굽 땅에 임한 흑암의 재앙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①첫째더듬을 만한 정도의 흑암입니다(10:21). 둘째단지 3일 동안 임한 재앙입니다(10:22)그런데 이방 땅이 아니라 지금 선민들의 땅에 임하고 있는 하나님의 흑암의 재앙은 더 심한 것입니다;

1)    첫째완전히 맹인처럼 되어 손으로 더듬어보지 아니하면 전혀 물체를 식별할 수가 없습니다그것은 희미하게 물체를 인식하고 더듬는 수준의 애굽의 것이 아닙니다전혀 눈으로 아무 것도 인식할 수가 없는 더욱 위험한 상태입니다.

2)    둘째, 3일만 지속이 되고 마는 임시적인 재앙이 아닙니다여호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 전까지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흑암의 재앙인 것입니다.  

(2)  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59:10b); 암흑의 재앙이 물리적인 어려움만 초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더 심각한 어려움 곧 영적인 넘어짐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선민들의 종교지도자들이 눈뜬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진리 그대로 전해주지를 못하고 있습니다그러므로 말씀 가운데 깃들어 있는 생명의 빛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그 결과 영적으로는 밝은 낮이 아니라 여전히 어두운 황혼입니다백성들이 영적으로 실족하며 믿음의 길에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3)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59:10c); 사람은 육신만 건강하게 살아 있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서 모두 산 자가 아닙니다영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을 때에 비로소 살아있다고 판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정신을 헌신짝같이 버려버린 선민들에게 더 이상 임재하시지도 동행하시지도 않습니다따라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건강하게 살아 있으나 사실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셋째로, (a)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b) 정의를 바라나 , (c)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59:11); 상처 입은 곰의 부르짖음과 이를 슬퍼하는 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왜 들려오고 있을까요?

(1)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비둘기같이 슬피 울며(59:11a); 어째서 이사야는 선민들이 곰과 같이 부르짖는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1)    가나안 땅에서 곰은 흔한 동물이 아닙니다그러므로 히브리정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아닙니다그들의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상적인 곰 이야기가 다음과 같습니다;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대머리여 올라가라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42명을 찢었더라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왕하2:23-25).

2)    잠깐 풀이를 해보자면벧엘은 엘리사의 조국인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도시입니다거기서 19KM를 남하하면 남조 유다 왕국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그 근방에서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대머리를 놀리고 있습니다그러자 엘리사가 그 처리를 여호와 하나님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여호와 하나님은 어쩐 일인지 어린아이 가운데 42명이나 곰에게 찢겨 죽도록 조치하십니다.

3)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이며 갑작스러운 곰의 등장입니다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단순하게 하나님의 선지자가 대머리인 사실을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놀렸다고 해서 극형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요혹시 오늘 본문에서 선민들이 곰처럼 울부짖고 있는 장면과 관련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하나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엘리사가 발길을 북쪽으로 돌리고 있습니다갈멜 산을 거쳐서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4)    그 시절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가 바알 신을 극도로 섬기고 있던 종교적인 암흑의 시대입니다(왕상16:30-33).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그 수도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그의 스승인 엘리야의 경우처럼 역시 목숨이 위험한 형편입니다(왕상19:2).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벧엘 곰 사건의 충격 때문인지 그곳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5)    생각해보면갑자기 곰 두 마리가 나타나서 별로 잘못이 없는 어린아이를 42명이나 찢어 죽입니다그렇다면하나님의 선지자의 용모가 우스꽝스럽다고 하여 놀리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고 하는 강력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그 사건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엘리사가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되돌아보고 있습니다그는 사마리아로 되돌아가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그 순간 그의 영적인 귀로 똑똑하게 듣고 있는 것입니다.

6)    그렇다면엘리사는 안전한 국경지대로 돌아다닐 일이 아닙니다우상을 심히 섬기고 있는 아합 왕의 궁전이 있는 그곳으로 가서 하나님신앙을 전파하고 생도를 모아 선지자교육을 시켜야만 합니다그것이 엘리사의 깨달음이며 새로운 행보의 의미라고 하겠습니다두 마리의 곰의 울부짖음 가운데 선지자 엘리사가 얻고 있는 귀중한 깨달음입니다.

7)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사야는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59:11a)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엘리사는 암곰 두 마리가 부르짖을 때에 그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신앙을 전하고자 왕국의 수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하지만 이사야 시대에는 선지자가 곰처럼 부르짖더라도 그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신앙으로 돌아오는 백성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8)    같은 맥락에서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59:11a)라는 대목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비둘기는 성경에서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1:32). 그러므로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백성들을 위하여 울고 있습니다중보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부디 이스라엘 자손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메시아가 오시면 구원자를 잘 영접하고 모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기를 이사야가 간구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까요?

(2)  정의를 바라나 (59:11b); 선지자 이사야의 울부짖음과 슬픔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가 열리지를 않습니다선민사회의 분열과 서로간의 증오가 넘쳐나고 있습니다서로 자신들의 노선이 옳다고 주장합니다남을 인정하지를 않습니다그러므로 정의를 바라나 (59:11b)라는 지적이 옳습니다.

(3)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59:11c);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들이 옳다고 우기고 있습니다그렇게 피조물인 주제에 인간이 그것도 하나님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의롭고 옳다고 우기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어버려 두십니다그 결과 선민에게서 하나님의 구원이 멀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넷째로, (a) 이는 우리의 (말씀을 이기적으로 해석한허물 주의 앞 심히 많으(b) 우리의 (종의 법도를 어긴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c) 이는 우리의 (종교적인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d) 우리의 (탐욕으로 인한죄악 우리가 아나이다(59:12); 이사야가 선민들의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알려주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동족들을 대신하여 고해성사를 하고 있습니다;

(1)  이는 우리의 (말씀을 이기적으로 해석한허물 주의 앞 심히 많으(59:12a); 사람의 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범한 것을 말합니다사람들 앞에서 범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당장 하나님 앞에 자신이 의롭고 옳다고 제 주제도 모르고 떠벌리고 행동한 것에 대하여 용서함을 얻어야만 합니다특히 선민의 경우에는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이기적으로 선민구원사상으로 해석한 잘못이 너무나 큽니다그것을 인정하고서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2)  “우리의 (종의 법도를 어긴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59:12b); 죄는 허물보다 더 중한 잘못입니다;

1)    허물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아니하고 자신이 더 의롭고 옳다고 주장하거나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기적인 목적으로 왜곡한 것 등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죄는 종이 감히 주인을 물리치고 자신이 주인의 행세를 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의 법도를 어긴 것입니다그러므로 다음 순간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즉시 깨닫게 됩니다그와 같은 패역의 죄에 대해서는 그 영혼이 벌벌 떨며 본능적으로 깨닫도록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59:12의역).

2)    참고로사도 바울의 글을 빌리면 그 뜻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18-20).

(3)  “이는 우리의 (종교적인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59:12c);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잘못 만든 책임과 자신의 인생을 억울하게 만든 책임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고 그렇게 부르짖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선지자 이사야가 보기에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말도 되지 아니하는 이야기)입니다왜냐하면모든 허물이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제1장을 보면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리라(1:31). 창조의 상태가 심히 좋으며 창조의 질서가 모든 생명을 살리기에 정말 훌륭하기 때문입니다그렇게 좋은 세상을 악한 세상으로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사람들입니다.

(4)  “우리의 (탐욕으로 인한죄악 우리가 아나이다(59:12d); 창세기 제3장에서 말해주고 있는 인간의 원죄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아담부부의 탐욕입니다(3:5-6). 종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제멋대로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것그 마음이 변함없이 유전이 되고 있습니다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선민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피조물 모두를 돌보며 살리고 싶어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선민들이 외면하고 있습니다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선민들의 영광을 위하여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는 선민우월주의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그것 역시 탐욕이라는 사실을 이사야가 인정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결론적으로이사야의 시대 선민들의 사회만 정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설 자리가 없는 곳일까요그것이 아닙니다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 전 세계가 그러합니다만약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면 70억 인구의 식량문제가 진작에 해결이 되었을 것입니다그리고 지구의 평화와 환경문제의 극복도 가시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가 못합니다서로 자기만 의롭고 옳으며 남이 틀렸다고 하는 사상이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자기와 자신이 속한 집단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이나 타 집단이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기다툼을 하고 있으니 모두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발을 붙일 수가 있겠습니까그 결과는 끔찍할 뿐입니다따라서 이사야는 동족인 선민들이 그 악한 생각 때문에 황폐와 파멸의 길로 달려가지 아니하도록 마음을 모아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59:7, 12).

선지자 이사야의 목소리가 본문 가운데서 지금도 들려오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민족과 모든 인류가 황폐와 파멸의 길을 벗어나서 구원과 영생의 길로 달려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해야만 합니다구체적으로 이사야처럼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이 무엇인지를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요청해야만 합니다아무쪼록 살아 생전에 그 구원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