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79강(사58: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3월 15일(화)
이사야가 선민들의 하나님신앙의 문제점을 외식이라고 지적하다(사58:1-4)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동족들인 선민 이스라엘 자손들의 하나님신앙의 문제점을 외식(外飾, 속과 달리 겉만 치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사57:1-4). 그것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다각도로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마23장).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모습과 백성들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신앙행태 사이의 괴리가 심각하다는 지적입니다(사58:1-4).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데 백성들은 겉으로만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는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백성들이 실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지켜 보십니다. 그 결과 실망스럽기가 그지 없습니다. 신앙고백과 실제행동이 영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다를까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하여 본문의 네 구절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숨어 있는 깊은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 (b)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58:1); 경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라는 것입니다;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사58:1a);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할 때에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이사야가 정확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그 내용이 하나님의 경고를 담고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분명히 듣고 크게 각성을 할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외치라는 것입니다(사58:1a). 만약 적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한다면, 나팔수가 어떻게 나팔을 불까요? 전체 부대원들이 모두 단번에 비상사태임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불 것입니다.
2) 마찬가지입니다. 적이 쳐들어와서 당장 아군의 운명이 죽을지 살지 모르는 판국인데 어떻게 조용히 남의 눈치를 보아가면서 그렇게 나팔을 불겠습니다. 죽기살기로 불어서 빨리 정확하게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해주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위탁하신 말씀도 그러한 것입니다.
3) 영적인 죽음이냐? 아니면 영원한 구원을 얻느냐?를 판가름하는 창조주의 기준이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에게 정확하게 전달이 되도록 애를 써야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선지자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외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결코 백성들의 눈치나 보면서 그 비위를 맞추어 인기몰이를 하거나 자신의 보신책 따위를 먼저 강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2)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사58:1b); 이사야는 ‘허물’과 ‘죄’를 분리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 ‘죄’는 명백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그 말씀의 뜻을 고의로 무시하면서 함부로 제 마음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허물’은 그와 같은 고의성이 약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말씀에 어긋나는 습관이나 문화 그리고 말씀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적용 등입니다.
2) 이사야는 허물에 대해서는 백성들에게 따끔하게 지적을 해주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습관이나 의식 등이 하나님 앞에 흉허물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잘못을 회개하고 고침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죄에 대해서는 그 정도의 차원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정국가이며 율법국가인 선민의 나라에 대하여 그 죄를 청산하도록 외쳐야만 합니다. 예를 들면, 이기적인 선민사상을 청산해야만 합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이 있습니다(출19:5). 선민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민구원과 영생구원의 뜻을 실현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 의미가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출19:6). 그런데 선민들은 반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4) 선민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유하며 자신들만 구원을 받고자 합니다. 이방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징벌을 받도록 내버려두고자 합니다. 그 결과 선민의 나라는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이방인들을 종으로 부리며 시온의 영광을 온 세상에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선민사상이며 소위 ‘시오니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말씀을 이기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달리 말하자면, 선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의인이고 이방인들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적인 논리입니다. 그와 같은 선민들의 죄악상을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9-12).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아니하면서 금식과 십일조를 드리고 그것을 의인의 근거로 삼고 있는 자칭 의인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밝혀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둘째로, “(a)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b)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c)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58:2); ‘마7:21’절(“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이 새삼 생각이 나는 구절입니다;
(1)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사58:2a); 선민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은 참으로 철저하며 대단합니다. 이사야의 말 그대로 매일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후 6세기부터 ‘알라’ 신을 섬기고 있는 회교도들도 대단합니다. 하루 네 번씩이나 모두 모여 ‘알라’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사58:2b); 매일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선민들이 묻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道, 참된 길)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면 그것을 굉장히 즐거워합니다;
1)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얻게 된 그것만으로 즐거워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도의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제사의 규례도 그러합니다.
2) 선민만의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의 속죄를 위해서도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려주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지 아니한 채 오로지 하나님의 도를 깨달았다는 그것만으로 만족해하고 또한 즐거워하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3)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58:2c); 선민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구하기를 좋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러 오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선민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1)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뜻과 판단을 묻고 그것을 즐거워하는데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생활에 적용을 하고 잘못된 규례나 신앙생활도 고쳐나가야만 될 터인데 그러한 자정적(自淨的, 스스로 정화하는)인 노력이 없습니다.
2)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 내에서는 옳은데 실제 성전 바깥의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는 그대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세속적인 삶은 별개라고 하는 이상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또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러한 이분법적인 신앙생활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고 있는 선민과 성도들의 삶일까요?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주기 위하여 메시아가 이 세상에 오셔서 거룩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셋째로, “(a)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b)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c)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사58:3); 금식의 목적이 무엇이며 금식의 날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사58:3a); 선민들이 금식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의 해결을 원해서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1) 그런데 금식을 하고 있지만 그 문제의 해결이 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제가 금식을 하고 있는데 왜 주께서는 저의 문제를 해결해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까?”(사58:3a 의역). 과연 그 항변이 일리가 있는 것일까요? 일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식을 하는 것은 당사자의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를 해결해주고 아니해주고는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금식을 하면 그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식으로 떼를 쓰지 말고 부디 먼저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사58:6-7). 그것이 문제의 해결을 응답으로 빨리 받는 방법이라고 친절하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사58:8-9).
(2)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사58:3b); 금식이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먹어야만 한다는 것이 철칙이기 때문입니다.
1) 그런데 문제의 해결을 받고자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지간하면 그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옳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십니다; “그 문제의 해결로 말미암아 당사자 모두의 입장과 주변 모두의 처지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먼저 살피십니다. 만약 당사자를 포함하여 일부만이 이익이고 나머지 모두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긍정적인 응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피조물 모두를 살리고 돌보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의 공의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2) 신앙생활을 잘 하고자 스스로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회사역의 현장이나 선교사역의 현장에서 그러한 일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고심을 하게 됩니다. 정신적인 고통이 심하여 얼굴마저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돌파하고자 기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거의 울부짖는 소리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교회공동체 차원에서도 그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알아주시지 아니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시 그 문제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부르짖고 있는 그 문제가 하나님의 공의를 과연 구현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3)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사58:3c); 금식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되는 사유에 대하여 이사야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금식하는 날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생활에 전념을 해야만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도와 말씀의 묵상을 금식행위로 간단하게 대신하고서 나머지는 자신의 시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오락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부려서 영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쾌락과 돈벌이를 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율법조차 어기고 있는 그 금식에 진정성을 엿보기가 힘들다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a)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b)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사58:4); 금식하면서 무엇을 행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금식을 하고 있는가?
(1)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사58:4a); 금식이란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1) 그런데 금식하는 행위가 대단한 신앙적인 결단이며 그 자체가 의로움의 근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금식하고 있는 의로움을 빌려서 상대방과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자 고상하게 금식까지 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크게 얻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위세를 빌려서 평소 의견이 다른 자와 크게 다투며 주먹다짐까지 하고 있습니다.
3) 분명히 ‘여호와 닛시’의 은혜로(출17:15-16) 자신이 이길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사야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금식은 금식이고 논쟁은 논쟁이며, 다투고 주먹질 하는 것은 여전히 악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사58:4a).
(2)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사58:4b); 선민들이 자신들의 의로움의 근거로 활용하고 있는 금식행위에 대하여 이사야가 마지막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선민의 의로움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행하고 있는 금식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올바른 신앙인의 행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 특히 금식기도의 전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눅18:13).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해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써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보태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와 힘을 성령님을 통하여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음미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9-13). 아무쪼록 말씀묵상과 기도 그리고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것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실천하시는 귀하신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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