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62강(사54:9-10)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6년 2월 27일(토)
무지개언약과 같은 하나님의 화평의 언약의 영원성에 대하여(사54:9-10)
노아는 하나님의 홍수심판이 끝나자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창8:13-19). 홍수심판 당시 하늘에서 내린 비는 40일만에 끝났지만 지진으로 인한 지하수의 분출은 그 이후에도 계속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계속 불어난 물이 150일 동안 온 지면을 뒤덮고 있습니다(창7:24, 8:3-4). 그 물이 빠지고 땅이 말라 드디어 사람이 그 위를 걸을 수가 있게 되자 노아 가족 8명과 방주에 함께 타고 있던 많은 동물들이 모두 지상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보면,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때는 주전 2,458년입니다; “참고로, 계산의 출발점은 ‘왕상6:1’ 절입니다. 솔로몬 왕이 즉위한지 4년 곧 출애굽한지 480년만에 예루살렘 성전건축이 시작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으므로 그 해 주전 966년에 480년을 더하면 주전 1,446년에 출애굽이 이루어집니다. 애굽 체류가 430년간이므로 야곱 일행이 애굽으로 이주한 해는 주전 1,876년입니다. 그때 야곱의 나이가 130세입니다. 따라서 그때부터 믿음의 열조들이 약속의 아들을 얻게 되는 나이를 세대교체의 개념으로 합산하여 계속 계산해나가면 됩니다. 그리하면 노아 600년 홍수심판은 주전 2,458년이 됩니다”.
홍수가 시작된 지 1년 10일이 지나 다음해 즉 노아 601년 2월 27일에 새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창7:11, 8:13-16). 그 해 주전 2,457년에 소위 ‘무지개언약’이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1-13).
홍수심판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전면적인 심판입니다. 죄를 범한 인류와 흉포화된 동물들, 그리고 무죄한 자의 피를 받아먹게 된 땅들이 전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창6:13). 둘째, 죽음과 멸망의 심판입니다. 지상에서 공기호흡을 하는 인간과 동물들이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창7:22). 그리고 지진의 발생과 지하수의 분출로 평평하던 땅들이 모두 높은 산과 골짜기로 바뀌고 맙니다(창7:20, 8:4-5, 13). 물론 땅 위에 번성하고 있던 식물들도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전면적인 죽음과 멸망을 의미하고 있는 홍수심판을 다시는 행하지 아니하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창8:21). 그리고 자신의 진노를 억지로라도 거두기 위하여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창9:13). 비가 갑자기 내리게 되면 반드시 구름 사이에 무지개가 발생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러면 그 무지개를 보시고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진노를 거두시는 것입니다(창9:14-17).
그렇다면, 주전 2,457년부터 이사야의 활동시기인 주전 700년까지 무려 1,700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크게 진노하시고 그 다음에 무지개를 보시고 겨우 그 진노를 억지로 거두시는 그와 같은 악순환적인 작업만을 반복하시는 것일까요?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화평의 언약’이 본문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사54:10). 그러한 의미에서 역사의 끝은 심판보다는 구원을 향하여 달려나가도록 설계가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원을 위한 화평은 두 가지로 진행이 됩니다; 첫째,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이 풀어져서 그 관계가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롬5:1, 10). 둘째, 사람들과 원수가 된 것이 풀어져서 그 관계가 또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롬5:11).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막12:30-31). 그 두 가지 화평의 작업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오신 분이 바로 메시아이십니다(롬5:8-9).
이제부터 그러한 내용을 이사야가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본문의 구절을 하나씩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의미를 도출하기 위하여 함께 다음과 같이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 (b)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사54:9); 노아의 홍수심판과 무지개언약을 모두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노와 책망을 대신 메시아가 받으신다는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1) “이는 내게 노아의 홍수와 같도다.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 위에 범람하지 못하게 하리라 맹세한 것같이”(사54:9a); 역사적인 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입니다;
1)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 성격은 전면심판입니다. 바다와 강에 살고 있는 생물과 식물을 제외하고 모든 육지의 동식물이 노아의 홍수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지진과 엄청난 지하수의 분출로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형성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홍수이전 살기 좋은 평평한 땅과 온난한 기후가 종말을 맞이한 것을 의미합니다.
2) 그와 같은 전반적이고도 총체적인 죽임과 멸망을 뜻하는 홍수심판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지개언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깊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 대신에 이제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실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는 그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2) “내가 네게 노하지 아니하며 너를 책망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였노니”(사54:9b); 세상구원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더 이상 노하거나 책망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 그렇다면, 누가 피조물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을 감당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냥 자연발생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무지개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아를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요1:29). 그리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2) 한 마디로, 무지개가 아니고 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어린양 메시아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진노와 책망을 거두어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 그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a)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b)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54:10); 화평의 언약의 영원성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이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원동력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영원한 화평의 자리 곧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1)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사54:10a);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이를 때까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사65:1-2). 세상 끝까지 메시아의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고 모두가 회개를 하고서 구원으로 나아오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사11:11-12, 마24:14).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1)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이 옮겨지는 현상’은 엄청난 지각변동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노아의 홍수를 연상하게 해주는 크나큰 재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자연적으로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는 것과 같은 엄청난 변화)의 변화가 발생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2) 그렇다면 본문은 신위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그와 같은 변화가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변하지 아니하는 진리가 하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리고 화평을 이루시기 위하여 선택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입니다. 그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가운데서 대속의 구원자 곧 메시아를 파송하신다는 것입니다(사7:14, 9:6-7, 53:4-10).
(2)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54:10b);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 누구를 불쌍하게 보실까요? 다음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일까요?
1) 첫째, 목이 곧은 백성들이 있습니다(출33:5). 그들은 스스로 너무나 의롭고 부유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결코 긍휼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있습니다(롬10:3).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선민들은 자신이 옳다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습니다(출32:9).
2) 구체적으로, ①자신들이 옳다고 율법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②그리고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치고 속죄의 제사를 빠짐없이 드리고 있습니다. ③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를 할례로 지니고 있습니다. ④더구나, 그들의 수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선민들은 의롭습니다(눅18:11-12). 구원의 대상임이 분명하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습니다.
3) 그렇게 믿고서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도 실로 당당합니다. 물론 선지자 이사야의 지적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자신들의 의로움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빳빳한 그 고개를 겸허하게 숙이지 아니하는 이상 긍휼하게 여기심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스스로 너무나 부유하여 결코 동정을 받거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둘째, 고개조차 들지를 못하는 죄인의 심정을 가진 자들입니다(눅18:13). 자신의 힘으로 율법도 지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만 결코 그것이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을 바라보고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대상이 바로 그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입니다(마9:13). 결코 스스로 의인이 아닙니다(마9:12).
결론적으로, 노아 홍수와 같은 전면심판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로 화평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그 긍휼을 입을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죄인인 자신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자신의 힘으로써는 도저히 하나님의 말씀의 뜻을 실천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불쌍하게 보시고 메시아에게 주셨던 그 은혜와 은사를 저희 성도들에게도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성령님께서 평생 동안 떠나지 아니하시고 동행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 깨우침과 능력 부어주심으로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있게 하여주시니 그것을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남아 있는 인생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의미가 있는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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