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민자(손진길 소설)

시간 이민자17(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0. 7. 22. 07:23

시간 이민자17(손진길 소설)

 

김상진윤지혜 부부는 1980년대의 서울에서 시간이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부부이다. 2020년의 서울에서 1980년의 서울로 시간이민을 왔기에 40년이라는 길이의 과거시간을 반복하여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다.

그들의 정체는 서울 안국동에서 202010월까지 살고 있던 부부 이상우윤성혜이다. 2020년 당시 69세였던 이상우는 방송사 정치부기자로서 오래 일을 하고 벌써 8년 전에 은퇴했다.

그리고 아내인 67세의 윤성혜 여사는 결혼한 아들과 딸을 모두 분가시키고 남편과 오붓하게 안국동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가정주부이다. 그들 부부에게 시간이민의 길을 알선한 회사가 서울 교보문고 10층에 있는 시간이민사이며 그 담당자가 박창진이었다.

이상우와 윤성혜가 박창진이 조종하는 타임머신을 무려 7시간 가까이 타고서 202010월에서 198010월로 시간이민을 와서 살면서 많은 것을 다시 배우고 있다. 그들이 종로구 안국동에서 한번 경험한 세월이지만 그것을 다시 살아보니 감회가 새롭고 느끼는 점이 많은 것이다.

안국동 옛날 살던 동네의 이웃 골목에서 살게 되자 그들 부부는 본체인 이상우와 윤성혜 부부를 마주칠까 걱정했다. 그래서 김상진과 윤지혜 부부는 이사했다. 강북인 안국동에서 강남인 반포동으로 옮겨와서 살고 있는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김상진과 윤지혜 부부는 젊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시간 이민자이기에 그 신체의 나이는 외모만큼 젊은 것이 아니다. 과거를 40년 거슬러 오게 되자 그들의 몸이 40년이 아니라 그 절반인 20년만 젊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의 기억력에 있어서는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부부는 서울에서 2020년까지 살아본 경험을 그대로 머리속에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예언자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이상한 부부이다.

물론 박상진과 윤지혜는 남의 운명과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일에 관여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본체인 이상우와 윤성혜의 운명은 물론 미래의 역사가 달라져버리기에 돌아갈 고향을 상실하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미래지사를 누설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하지만 패션의 흐름이나 정치의 흐름 같은 것을 추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김상진과 윤지혜가 합리적인 추론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그 정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자 주위의 찬사와 부러움을 얻게 된다. 구체적으로 김상진은 신문사의 정치부기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고 그 진급이 빠르다. 그리고 윤지혜는 서울에서 이름이 난 집안의 부인들과 친구처럼 어울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 벌써 198912월말이 되고 있다.

이제 하룻밤을 자고 나면 1990년 새해가 밝아오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김상진이 귀가할 때에 붉은 포도주를 세병이나 사서 들고 온다. 그리고 아내 윤지혜에게 자정이 되어 새해가 시작될 때까지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그들 부부가 살고 있는 반포 주공아파트 1단지에서 때 아니게 포도주 파티가 벌어진다. 김상진이 아내 윤지혜와 잔을 부딪치면서 포도주를 한 병 마신다. 그리고 천천히 말한다; “여보, 이 한 병의 포도주는 이미 흘러간 1980년대입니다. 우리가 마셔버렸으니 우리 인생에 다시는 1980년대의 서울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1990년대라는 한 병의 포도주를 다시 따서 마실 차례입니다… ”.

윤지혜가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자신들이 시간이민을 와서 1980년대의 젊은 시절을 반복하여 살아보았지만 이제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같은 시대를 두번이나 살아보았으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윤지혜가 한 병의 포도주의 마개를 따고서 술잔에 붓기를 시작한다. 한 잔을 남편 김상진에게 주고서 윤지혜가 말한다; “여보, 우리 이 한병만 비우도록 해요. 저는 서울에서 1990년대말까지만 살고 그만 우리가 본래 살던 2020년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리고… “.

김상진이 감회에 젖어서 아내 윤지혜가 쥐어 준 포도주 잔을 그냥 손에 잡고만 있다. 그리고 아내의 입술을 쳐다본다. 그의 귀에 윤지혜의 말이 들려온다; “우리가 40년을 거슬러 과거로 왔으니 저는 그 절반인 20년만 살고서 다시 우리의 안국동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

그 말을 하면서 갑자기 윤지혜의 눈에 이슬이 맺히고 있다. 그 모습을 김상진이 담담히 보고만 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윤지혜가 감았던 눈을 뜨고서 붉어진 얼굴로 또박또박 말한다; “저는 202010월의 서울로 되돌아가서 다시 윤성혜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조용히 늙어가는 친지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요. 시간이민을 올 때에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다고 하는 것에 가슴이 부풀었지만 다시 살아보니 그것이 아닌 것만 같아요… “.

아내 윤지혜의 말을 들으면서 김상진도 그러한 심정이다. 생각해보면 가슴이 뛰는 젊은 시절 그것도 사랑하는 아내 윤지혜와 함께 지낸 1980년대의 10년 세월은 마치 신혼생활과 같다.

그렇지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가 한사람도 주위에 없는 시간이민자의 삶이다. 천기를 누설하는 것도 아닌데 자신이 벌써 살아온 세월에 대하여 발설하는 것조차 금기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치 첩자와 같이 아니면 구경꾼과 같이 살아가는 세월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늙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김상진도 생각이 된다. 하지만 아내 윤지혜의 말과 같이 21세기가 되기 전까지 1990년대의 한국에서 10년간은 더 살아보고 싶다.

어째서 자신이나 아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그 이유는 아무래도 세상살이에 바빠서 그들 부부가 1990년대를 정신없이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연령적으로 39세에서 49세 까지의 중년의 시기를 지내면서 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 시대의 의미를 마음껏 음미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미련이 남지 아니하도록 20세기의 끝까지 다시 살아보고 그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2020년의 서울로 되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민사의 직원인 박창진이 가르쳐준 대로 교보빌딩 1016에 들러서 흔적을 남겨두어야 한다.  

아직 10년의 세월이 남아 있으니 김상진은 천천히 그 작업을 하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 그는 아내 윤지혜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히고서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아내의 아름다운 눈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그래, 금년까지 살아보니 한국의 1980년대가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었어요?... “.

그 말을 듣자 윤지혜가 갑자기 푸훗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한다; “그것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 전공이 그것인데, 왜 나에게 묻고 있어요?... 호호호… “.

김상진이 그 말을 들으면서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말없이 아내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러자 윤지혜의 말이 들려온다; “하지만 제 나름대로 말씀을 드리자면, 1980년대의 한국은 신군부의 시대이지만 동시에 한국민들의 경제개발과 민주화의 열망이 살아서 숨쉬고 있는 그러한 시대이지요. 한번 보세요. 88 서울올림픽이 끝나자 마자 신군부 시대를 청산하고자 청문회를 열고 있잖아요!… “.

 그 말을 듣자 김상진이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 조용히 말한다; “비록 노태우 대통령이 직선제 개헌을 하고서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고는 하지만 신군부의 제2인자라고 하는 경력에서 자유스럽지가 않아요.. “.

김상진이 포도주를 조금 마신 다음에 이어서 말한다; “게다가 국민들의 민주화의 열망으로 생겨난 여소야대의 국회가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5공비리를 조사하면서 생방송으로 청문회를 열고 있어요. 이제 서울올림픽이라고 하는 세계적인 축제가 끝났으니 1989년에 이어 1990년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가장 어려운 한해가 될 거예요그러므로… “.

말을 끊고서 김상진이 잠시 뜸을 들인다. 그 사이에 윤지혜가 말한다; “우리는 벌써 알고 있잖아요.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총재와 김종필 총재를 끌어들여서 3당합당에 성공하여 무사히 5년의 임기를 마치게 되지요... 물론 그 다음이 문제가 되기는 하지만요… “.

그 말을 듣자 김상진이 말한다; “이제 우리가 다시 맞이하는 1990년대는 그렇게 신군부의 잔존세력과 민주화의 열망을 수렴하고 있는 3김씨가 묘하게 정치적으로 타협하면서 서로 힘을 겨루게 되는 시대가 될 거예요. 게다가… “

김상진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한번 심호흡을 하고서 이어 말한다; “평생을 오로지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한가지 생각과 그 여건이 되는 정치적 민주화에만 매어 달린 인물이 김영삼과 김대중이지요. 그들이 1990년대에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지만 정작 경제적인 경륜이 부족하여 그만 국가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고 말지요. 더구나… “.

또 무엇이 남아 있는가?... ‘, 윤지혜가 포도주를 마시다 말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자 김상진이 천천히 말한다; “양 김씨는 정치적인 민주주의가 성취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그러나 국가의 경제발전은 또 다른 문제이지요.. “.

갑자기 김상진이 후유라고 숨을 한번 쉰다. 그 다음에 천천히 말한다; “가정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그 경제의 건전성은 한가지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지출이 수입안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빚을 얻어서 과소비를 하고 있는지를 보면 되지요. 그런데 국가의 지도자가 되는 민주투사들은 그 사실을 몰라요. 그것이 1990년대에 한국이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지요…. “.

윤지혜가 듣고 보니 쉽지만 아주 명쾌한 이론이다. 그래서 귀를 기울인다. 김상진의 결론이 다음과 같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경제의 건전성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 국민들은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해외여행을 마음껏 하고 명품으로 치장하려고만 합니다. 그 결과… “.

김상진이 조용히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면서 말한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고 기업들은 유동성함정에 빠지고 말지요. 그래서 정부당국이 불가피하게 외국의 악랄한 펀드와 국제금융기관에서 고리로 빚을 얻어와서 나라경제를 되살리고자 하지요. 하지만 그 손해가 막심합니다. 왜냐하면… “.

김상진이 아예 눈을 감고서 말한다; “주요기업의 노른자위 지분을 그들에게 내주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뼈아픈 구조조정을 하게 되지요. 외국 펀드와 금융기관에 한국의 재벌기업의 주식이 절반이상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한국의 대기업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 불분명하게 되고 말아요… “.

김상진이 다시 말한다; “좋게 말하자면, 자본의 국제화시대에 한국의 대기업들이 다국적기업이 되고 만 것이지요. 하지만 그에 따라 대기업들이 이익을 얻어도 그것의 대부분은 외국으로 과실송금이 되고 말아요. 아직도 대를 이어가면서 오너일가가 존재하고 있지만 그들의 지분은 1할도 되지가 않아요… “.

그 다음의 말은 마치 푸념처럼 들리고 있다; “그저 한국사람들이 외국의 대주주들의 위임에 따라 경영권만 행사하면서 국내시장을 손쉽게 장악하고 있지요. 그러한 어려움이 1990년대를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러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다시 귀중한 교훈을 얻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듣자 윤지혜가 아직 마개를 따지 아니한 마지막 포도주 병을 바라보면서 남편 김상진에게 말한다; “여보, 마지막 한 병의 포도주는 앞으로 10년 동안 보관하도록 합시다. 21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우리 여기서 마지막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해요. 그리고 아무런 미련없이 2020년의 서울 안국동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그때에는… “.

아내 윤지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김상진이 벌써 알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요. 마치 비워버린 술병과 같이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어요... 40년의 과거로 시간이민을 와서 20년이나 서울에서 다시 살아보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니 나는 당신 말처럼 그렇게 할 것이요… “.

윤지혜와 김상진이 마지막 술잔을 부딪히면서 1980년대를 떠나 보낸다. 그날 밤은 포도주를 마셔서 그런지 푹 자게 된다. 아침 늦게 잠이 깨자 1990년 새해 첫날이 밝아 있다. 그들은 시간 이민자이므로 설날이지만 별도로 방문할 친척이 없다. 그래서 하루 집에서 푹 쉬기로 한다.

22일이 지나자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총재 및 김종필 총재와 함께 인터뷰를 하고 있다. 여당인 민정당이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그리고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과 더불어 3당 합당을 한다는 선언이다. 그 다음 그들 3인에 의하여 29일에는 새로운 정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고 있다.

거대한 여당이 인위적으로 출현함에 따라 여소야대 시절에 진행되고 있던 5공청산과 민주화의 노력은 어떻게 타협되고 마는 것일까? 그리고 민정당과 합당을 하게 되는 김영삼 총재와 김종필 총재의 속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경제신문사 정치부 기자인 김상진은 새해에 출근하자 마자 2달 동안 그 3당합당의 진행과정과 뒷이야기를 취재하고 보도하느라고 바쁘다. 그렇게 1990년대가 정치적으로 충격적인 모습으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