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민자(손진길 소설)

시간 이민자12(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0. 7. 16. 15:38

시간 이민자12(손진길 소설)

 

시간이민자인 김상진 윤지혜 부부가 종로구 안국동 집을 팔고 강남구 반포동의 주공아파트를 사서 이사한 때가 1985년 봄이다. 이사철이라 그런지 많은 서울시민들이 집을 옮기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이제는 강남이 뜨고 있는 시대이다.

그래서 그런지 강남에는 대형교회가 생겨나고 있다. 소망교회, 광림교회, 사랑의교회 등이 먼저 나타난 큰 교회에 속한다. 그 가운데 김상진 윤지혜 부부는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교회를 선택하여 매주일 그곳에서 예배를 드린다.

사랑의교회 담임인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들에게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시키는데 있어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래서 윤지혜는 교회에서 전교인을 상대로 실시하고 있는 구역별 성경공부반인 다락방모임에 빠지지 아니하고 참석하고 있다. 나중에는 교회에 성도들을 모아서 실시하는 제자훈련에도 참석하고 있다.

김상진은 주일예배에만 참석하고 구역모임인 다락방모임에는 간혹 참여하고 있다. 신문사의 일이 바쁜 것이다. 그런데 1985년 봄부터 강남에서 살다가 보니까 서울의 발전상이 눈에 띄게 들어오고 있다.

예를 들면, 서울의 지하철이 벌써 3호선과 4호선을 착공하여 건설 중에 있다. 이제는 강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노선이 반포대교에 이어 동호대교와 동작대교 등 3개로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강남의 교통이 편리해지고 있는 것이다.

서울시민들이 강남으로 많이 몰려들자 유명한 학교들과 오래된 교회들 그리고 병원들이 강남으로 넓은 땅을 사서 옮겨온다. 좋은 학교와 학원들이 몰려들어서 그런지 강남이 속하는 8학군이 명문대학을 들어가는 좋은 학군으로 불리고 있다.

그와 같은 변화를 김상진이 바라보면서 새로운 느낌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옛날 이상우로 살아갈 때에 강북 안국동에서 느끼고 있던 간접적인 강남의 발전상을 직접 현지에 살면서 피부로 접하고 보니 그 발전의 속도가 굉장히 빠른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한국의 수출이 세계적인 3저현상의 지속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어 국민들이 소득의 증가를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심하지 아니하게 이제는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다.

그와 같은 경제적인 성공을 대변하듯이 여의도에서는 가장 높은 63빌딩1985년에 완공된다. 특히 60층에는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지방에서 상경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남산보다 여의도 63빌딩의 전망대를 더 많이 찾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기자인 김상진은 다른 느낌을 받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투자와 기술로 신동아그룹이 대한생명빌딩이라는 63층의 높은 건물을 완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빌딩을 이용하는 일본인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빚으로 높은 빌딩을 지어 놓고 그것을 자랑하고 있다니, 한국은 참으로 외화내빈의 민족이구나!... “.  

한편 1985년의 정계는 2월 총선으로 지각변동이 발생하자 큰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급하게 양 김씨가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자 총선에게 패배한 민한당의 총재인 유치송이 사퇴하고 만다. 그 후임이 조윤형 총재이다. 그는 총재가 되자 19854월에 신민당과 합당할 것이라고 선포한다.

36일에 정부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씨를 비롯한 14명의 정치규제자를 마지막으로 해금하였다. 그에 따라 양 김씨 곧 김영삼과 김대중은 신민당을 중심으로 야당이 뭉쳐서 대통령 직선제를 골간으로 하는 민주개헌을 성취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하여 전두환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어떠한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일까?

그 점을 김상진 기자가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김상진은 벌써 이상우로서 2020년까지 서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지라 그 대체적인 흐름은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다시 구체적인 내용을 취재한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감흥으로 다가오고 있다.

김상진이 다시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정부여당의 대응책이 다음과 같이 세가지이다;

첫째로, 여담총재를 겸하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은 신군부세력의 제2인자로 알려지고 있는 노태우를 223일에 전격적으로 민정당 대표로 삼는다. 그 의미는 양 김씨의 입김이 거세게 불고 있는 신민당을 상대하여 호헌을 하라는 것이다. 과연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신민당의 개헌요구를 효과적으로 잠재울 수가 있는 것일까?

둘째로, 양 김씨는 정부여당이 자신들의 개헌요구에 일체 호응하지 아니하자 장외투쟁에 나서고 있다. 전국에 민추협의 지부를 결성하면서 개헌주장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한다. 정부 여당에서는 전국적으로 개헌투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강경책과 온건책을 동시에 사용한다;

하나는, 정부에서는 인천지부의 결성식을 강력하게 진압하고 만다. 그러자 신민당에서는 제도권내에서 다시 개헌투쟁을 하고자 생각하게 된다.

또 하나는, 전두환 대통령이 야당의 개헌투쟁을 제도권인 국회로 끌어들이고자 유인책을 사용하고 있다;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하는 경우에는 개헌안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셋째로, 이슈는 더 큰 이슈로 덮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1985년에 신군부의 정권은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적십자회담을 통하여 실현하는데 열심이다. 그 결과 9월에 남북 고향방문이 성사된다. 그것으로 일단 한숨을 돌리고 있는 정부여당이다.

하지만 그것은 국민들의 민주화요구가 얼마나 강하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신군부의 어설픈 인식이다. 19855월에 서울대를 위시한 5개 대학의 학생 73명이 서울에 있는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의 구호는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사과를 하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단순한 반미구호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과 결탁하고 있는 신군부의 파쇼정권을 끝장내자는 것이다. 그때부터 대학생들은 반미와 파쇼타도를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게 된다. 필요하다면 그 타도의 방법론으로서 공산주의 혁명이론과 북한의 주체사상까지 사용하고자 학습하고 있다.

김상진이 파악하기로는 공산주의 혁명은 사회주의 지성인들이 앞장을 섬으로써 노동자와 농민들로 하여금 피의 혁명에 적극 동참하게 만드는 혁명의 방식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북한의 주체사상은 그와 다르다. 그것은 북한의 강성한 군사력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고자 하는 일종의 군사전략인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주체사상에 의지하여 한국의 정부를 붕괴시키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당장은 한국의 신군부 정권이 미워서 그렇게 시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그 결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자유한국을 북한의 김씨 왕조에게 가져다 바치는 꼴이 되고 말 것이 뻔하므로 그것은 한마디로, 반민족적인 배신행위이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김상진이 국회와 청와대를 출입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1985년이 지나가고 아시안게임이 서울에서 9월에 열리게 되는 1986년이 밝아오고 있다. 이제 새해에는 어떠한 일들이 한국에서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미 예상한대로 국회내에서는 야당의 개헌요구를 여당이 흔쾌하게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시간만 끌고 있다. 그것을 언제까지 두고 보아야 하는가? 김상진은 양 김씨가 다시 장외투쟁에 나서는 시기가 19862월임을 알고 있다.

   신민당은 1985212일 총선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하여 1주년이 되는 날에 거리로 뛰쳐나가 시민들에게 개헌의 필요성을 직접 호소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이름하여 일천만개헌추진운동이다.

신한민주당이 거리로 나서자 재야민주세력들이 먼저 호응한다. 그러자 전국적으로 서명운동이 크게 번지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전두환 정권이 마음을 바꾸고 있다. 1986430일부터 개헌협상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야의 시각이 너무 다르다. 신민당은 줄기차게 대통령직선제를 주장하고 민정당은 끝까지 내각책임제를 선호하고 있다. 그러므로 730일에 국회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만들었지만 한차례의 정식회의도 하지 못한 채 1986년 한해를 보내고 만다.

그것을 보고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거리시위에 나서고 있다. 정부여당은 차제에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와 절충하여 자유민주주의에 충실한 내각책임제 정부를 구성하자고 모종의 합의를 하게 된다. 그것을 이민우 총재가 자신의 구상으로 발표하는 것을 보고서 양 김씨가 신민당을 탈당하고 만다.

김대중의 협조로 김영삼은 66명의 의원을 끌고 나가서 통일민주당을 창당한다. 그리고 직선제 개헌만이 정권교체와 민주주의 정착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한다. 일관된 양 김씨의 주장이 시민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에 따라 제도권 야당의 기회주의적인 타협안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던 시민들이 신당인 통일민주당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만다. 소위 이민우 구상이 물 건너가버리게 되자 전두환 정권은 더 이상 야권과 타협할 생각을 버리고 호헌의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고 만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87413일에 전두환 대통령은 이미 약속한대로 자신은 7년 단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며 자신의 후임자는 지금의 헌법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선언하고 만다. 그것이 이름하여 전두환 대통령의 4.13호헌선언이다.

이제 1987년의 정국은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것일까? 김상진 기자가 열심히 국회로 그리고 청와대로 뛰어다니면서 취재에 열심이다. 그러면서 김상진은 그가 이상우로 살고 있었을 때의 기억을 하나 되살리고 있다. 그것은 주변국인 중국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중국은 한국사람들이 1949년부터 1991년까지 중공으로 부르던 나라이다. 모택동이 서쪽에서 군사를 일으켜 동진하면서 장개석의 군대를 1949년에 대만으로 내쫓고 중원을 정복한다. 그리고 중국대륙에 그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줄여서 중공이라고 중국본토를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모택동 곧 마오쩌둥은 중공을 통치하면서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흔히 죽의 장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10년 남짓 중공을 통치하자 전문지식인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주의가 팽배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 혁명이념을 활성화할 수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는 또 한번의 인민혁명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이 1960년대의 소위 문화대혁명이다. 그 때문에 중공은 지성인이 사라지고 무식한 자들이 공산주의 이념으로 통치하는 암흑의 시대가 오래 계속된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그의 후계자들이 국가의 경제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지만 역부족이다. 그래서 2년후에 실용주의 노선을 주장하고 있는 등소평 곧 덩샤오핑을 중앙무대에 복귀시켜서 경제를 개방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마침내 중공은 1980년부터 덩샤오핑의 주도하에 경제개방정책을 시작한다. 그와 때를 맞추어 1975년에 남쪽의 자유 월남을 접수한 북쪽의 공산주의 월맹이 경제개방을 단계적으로 실시한다. 베트남 정부는 1986년에 소위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선언하고 그 이듬해부터는 외국인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그와 같은 변화를 알고 있는 김상진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1985년과 1986년 그리고 1987년 봄까지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는 여야간의 개헌논쟁을 바라보고 있다. 한국의 서쪽에 있는 거대한 나라 중공과 그 남쪽의 베트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경제개방으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한국은 정치적인 문제에 묶어서 꼼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1992년이 되면, 한국정부는 경제개발에 자신이 붙은 중공을 중국이라고 부르면서 정식으로 수교를 하게 된다. 그 시기는 소련이 무너지고 러시아가 새로운 연방으로 대두한 때이다. 러시아가 개방개혁노선을 채택하자 중공이 폭넓은 경제개방과 외국과의 수교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한국이 중공을 중국으로 부르는 것은 자유 중국인 대만과는 단교를 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중공이 유일한 하나의 중국정부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라고 한국정부에 요청한 것이다. 그래야 중국과의 수교가 가능하다. 따라서 경제적인 이익을 위하여 한국정부는 불가피하게 대만과의 단교를 시행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때부터 대만은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고 있다. 과거 일본제국주의 아래에서 신음할 때에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힘을 보태어준 장개석 곧 장제스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일종이 괘씸죄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화교들마저 대만을 버리고 중국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미래의 사실을 기억하면서 김상진이 서울에서 1987년의 봄을 지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