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민자(손진길 소설)

시간 이민자6(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0. 7. 9. 22:09

시간 이민자6(손진길 소설)

 

한편 김상진 자신이 살고 있는 종로구에는 육사출신의 국회의원이면서 조금 특이한 정치인이 살고 있다. 그 이름이 이종찬인데 그는 육사 16기이며 영국무관을 지냈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고 족보자랑을 하고 있는데 그럴 만한다. 왜냐하면 그의 조부가 이회영이고 종조부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이기 때문이다.

이종찬은 제11대국회에서 운영위원장이 되어 민정당을 만든 실무책임자 권정달, 정무수석에서 국회사무총장이 된 우병규 등과 함께 국회 3인방의 실세가 되고 있다. 당시의 국회의장인 채문식은 일제시대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채의장은 이종찬과 권정달 그리고 우병규가 국회를 운영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그것을 보면 김상진은 아직 군부가 득세하고 있으며 문민정부나 민주화가 한참 멀었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1982년의 한국이 그러하다고 실감하면서 시간 이민자이며 신문사기자인 김상진이 또 한해를 살아가고 있다.

사실, 김상진의 정체는 2020년에서 40년의 과거인 1980년으로 시간이민을 온 이상우이다. 그의 부인인 윤지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 부부가 젊은 시절로 되돌아와서 살게 되면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과거 그들 부부의 운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이상우윤성혜 본인들의 운명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그대로 진행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민을 와서 이제 새로운 신분인 김상진윤지혜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의 운명은 그들의 모습 만큼이나 달라지고 있다.

시간이민자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는 타임머신의 조종사인 박창진의 주의사항 그대로 그들 부부는 남의 운명을 바꾸거나 한국의 역사를 바꾸게 되는 일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금기사항이다. 만약 그러한 시도를 한다고 하면 그들은 역사의 섭리자가 내리는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스스로의 결단과 행동으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김상진이 근무하고 있는 경제신문사에서 해외연수과정을 제의하여 왔을 때에 그가 선택하자 그 일이 성사가 된다.

그것은 김상진의 본래의 신분인 이상우1983년초의 운명에 있어서는 없던 항목이다. 그러한 운명의 변화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서야 김상진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가 속으로 신이 나서 외친다; “그렇구나. 나는 시간 이민자이므로 본래의 나 자신인 이상우의 운명을 여기서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신분세탁을 하여 김상진으로 살고 있는  나의 운명은 달라질 수가 있다. 이 시간대의 이상우의 운명을 건드리지 아니하고 달리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 참 좋은 장점이구만!… “.

김상진은 1983년초에 아내인 윤지혜와 더불어 서울에서 하와이로 떠난다. 그는 하와이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과목을 한학기 청강하고자 한다. 이왕 연수를 갈 바에는 미국의 주립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그렇게 선택한 것이다.

김상진이 특히 하와이를 선택한 이유는 그때가 한국의 겨울철이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날 따뜻한 상춘기후를 자랑하고 있는 하와이에서 공부하고 지내면 좋을 것이다. 특히 하와이는 와이키키 해변이 신혼여행지로 이름이 높지 않는가!... 이왕이면 아내 윤지혜와 함께 그곳에 가서 한학기를 지내고 싶은 것이다.

김상진의 선택은 탁월했다. 겨울철의 하와이는 환상적인 날씨를 지니고 있다. 춥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한 상쾌한 날씨이다. 그래서 하와이주립대학교 기숙사를 빌려서 4개월을 생활하면서 김상진과 윤지혜 부부는 신혼처럼 행복하다.

김상진과 윤지혜 부부는 별로 영어회화를 공부한 적이 없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녔지만 그 전공이 한사람은 정치학이고 또 한사람은 가정학이다. 그러므로 영문학도가 아닌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1970년대초에 대학을 나오면 취직할 자리가 많았기에 영어회화공부에 신경을 쓰지 아니했다.

그 대가를 하와이대학교에서 톡톡하게 당하고 있다. 두사람이 대학원에서 청강을 하고는 있지만 도무지 영어강의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영어로 질문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어린아이보다도 못하다. 그저 한국에서 문어체 영어만 익혔으니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김상진과 윤지혜는 한가지 결심을 한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영어학원에라도 다니면서 열심히 영어공부를 해야 하겠다. 이렇게 미국의 변두리인 하와이에 와서 귀머거리 벙어리 노릇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구나... “.

그런데 그들 부부가 4개월간 하와이에서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 서너 가지 있다;

첫째로, 기자생활을 다시 하고 있는 김상진이 호놀룰루에 있는 시내의 헌책방을 일부러 방문한다. 그는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궁금하여 미국에서 한국책을 헌책방에서 한번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딱 두가지 종류의 한국에 관한 일반서적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가, 통일교 문선명에 관한 책이다. 또 하나가,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에 관한 서적이다. 그 두가지를 빼고서는 도무지 한국에 관한 서적을 헌책방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김상진이 생각한다; “해외에 나와보니 한국의 유명한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과 문선명 교주 밖에 없구나. 한국의 인지도가 아직은 그 정도에 불과하구나한국을 홍보하자면 앞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하여 엄청 분발해야 하겠다국가의 이름값을 올려야 한국물건을 더 많이 수출하지 않겠는가?... “.

둘째로, 헌책방 근처에서 전자제품을 팔고 있는 가게에 일부러 들러 본다. 일본에서 수입한 제품들이 많다. 특히 소니가 생산한 소형녹음기가 즐비하다. 그 밖에 미국의 새로운 제품이 한가지 나와서 잘 팔리고 있다.

그것이 개인용 컴퓨터인데 아주 초보적인 것이다. 그저 연산작용이 가능한 것이지만 그 속도가 대단하다고 한다. 그렇지만 장난감처럼 보이고 있다. 그것을 보고서 김상진이 고개를 크게 끄떡이고 있다.

이상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김상진은 개인용 컴퓨터가 20세기말에 한국에 어떻게 빠른 속도로 보급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더구나 그로 말미암아 21세기에 한국의 IT산업이 극도로 발달하고 있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1983년초에 미국의 하와이에서 조잡한 개인용 컴퓨터를 보고 있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비록 초보적인 제품이지만 개인용 컴퓨터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수입이 되겠구나... “.

새삼 김상진은 더 오래된 자신의 기억에 비추어보고 있다; “10년전인 1970년대초 대학시절에 도서관의 여러 방을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컴퓨터가 이제는 이렇게 소형화가 되어 있구나. 그것이 시장에서 판매가 되는 시대가 벌써 미국에서 도래하게 되었구나!... “.

셋째로, 가정주부인 윤지혜는 호놀룰루 시내에 있는 쇼핑센터를 방문해보고서 깜짝 놀란다. 참으로 다양하고도 많은 식료품과 의류제품이 전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구매의 선택의 폭이 얼마나 넓은 지 모른다.

그래서 윤지혜가 생각한다; “산업선진국이 되면 이렇게 상품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소비자의 선택의 폭이 커지는 구나… “. 윤지혜는 새삼 남편과 함께 해외에 나온 보람을 느끼고 있다.  

19835월에 김상진과 윤지혜 부부는 서울로 되돌아온다. 한학기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하와이에서 지나갔는지 모른다. 김상진은 다시 신문사에서 기자로 생활하고 있다. 그런데 그해 5월부터 연말까지 참으로 한국의 안보에 있어서 큰 사건들이 줄줄이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김상진은 직장 선배인 성기수 기자와 더불어 그 사건들을 취재하느라고 일년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김영삼 전 야당총재가 갑자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19835월 18일에 시작한 단신투쟁이 23일간 진행되어 69일에 겨우 끝나고 있다. 그의 단식투쟁의 명분은 한국의 민주화 요구이다.

김상진은 이미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다시금 그 사건을 취재하면서 정치인의 단식투쟁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사실을 한번 더 인식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김영삼 야당 지도자는 감옥에 한번도 간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세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두뇌가 명석한 지도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 뚝심이 대단하다. 둘째,좌 동영 우 형우를 비롯하여 김영삼에게는 우직한 심복들이 많다. 서석재와 김덕룡도 그러하다. 그것을 보면 김영삼은 대단한 보스이다. 셋째, 정치적인 밀약을 맺으면 절대로 발설하지를 않는다. 참으로 입이 무거운 사람이다.

김영삼이 23일간 단식하자 전두환 정권이 민주인사들에 대한 해금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국민들이 신군부에 의하여 박해를 받고 있는 양 김씨를 엄청난 민주투사로 영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핍박을 받는 영웅으로 만드는 것 보다는 실제로 국민들 앞에 내세워서 그 진면목이 별로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차라리 정국운영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 귀추가 어떻게 될까?...

둘째로, 630일부터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그것이 온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으면서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있다. 그 때문에 김영삼의 단식효과가 크게 삭감이 되고 있다.

그 대신에 한국방송공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 여의도 광장에서는 1950년대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헤어진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사람들과 그들의 게시물이 범람하고 있다.

셋째로, 서울 여의도에서 한창 국제의회연맹(IPU) 총회가 열리고 있는 91일에 공교롭게도 KAL기 피격사건이 소련의 사할린에서 발생한다. 뉴욕에서 서울로 출발한 대한항공 007기가 어째서 사할린 가까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는지가 의문이다.

그러나 소련의 전투기가 민항기임을 알고서도 피격하여 격추시켜 탑승자 269명이 전원 사망하였다고 하는 것이 더 큰일이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재빨리 이를 소련의 만행이라고 규탄하고 나선다. 그러나 그 변경이 된 항로상의 의문은 끝내 밝혀지지 아니하고 있다.

넷째로, 109일이 되자 더 큰 안보상의 위기가 발생하고 만다. 동남아 6개국을 순방하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버마 랑군에 있는 아웅산 묘소를 참배하다가 북한의 폭탄테러로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서석준 경제부총리와 김재익 경제수석 등이 사망하고 늦게 참석하다가 위기를 모면한 전두환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고 만다. 버마당국에서는 북한의 첩자들의 소행으로 보고서 배후를 추적하고 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1월에 한국을 공식방문하고 한반도의 위기관리에 나선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12월에 육사 동기인 정호용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여 군통제에 나서고 있다. 북한에 대하여 생각보다 약하게 대처하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김상진은 아직도 그것이 의문이다. 대권을 잡기 전에는 용감한데 어째서 대권을 잡고 나면 그렇게 약하게 되고 마는가? 그것이 최고권력자의 현상유지전략인가?...

다섯째로, 전두환 대통령을 위시한 신군부가 이제는 국민에 대한 유화책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래서 1221일 문교부에서는 19805.17 이후 학생운동으로 제적을 당한 1,363명에 대하여 복학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법무부에서는 시위학생 131명을 포함하여 시국사범 314명을 석방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눈여겨볼 수 있는 것이 벌써 지난 7월에 전두환 정권이 제1야당인 민한당에 대하여 후원회를 결성하도록 허용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양 김씨를 석방하고 그들이 정당활동을 하는 경우 제11대국회의 제1야당인 민한당이 크게 위축될 가능성이 다분하기에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정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정도의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하는 것이 그 훗날을 벌써 살아본 김상진의 판단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자들은 역사와 국민의 두려움을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뒤늦게 후회가 막심한 것이다.

끝으로, 김상진은 하와이에서 미국이 만들어서 시판하고 있는 조잡한 개인용 컴퓨터를 본 바가 있다. 그리고 일본이 반도체를 이용하여 게임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의 삼성전자가 반도체개발과 생산에 전력투구를 하고 있다.

그 결과 놀랍게도 19838월에 64KB D램 반도체개발에 성공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세계의 정상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는 신호탄이다. 그와 같은 의미를 김상진이 되새기면서 고개를 크게 끄떡이고 있다. 그 사이에 1983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