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이민자(손진길 소설)

시간 이민자5(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0. 7. 9. 05:18

시간 이민자5(손진길 소설)

 

1988년의 하계올림픽 유치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개최지가 되는 서울시에서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당시 2조원으로 추산되는 경비를 도저히 서울시에서 부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두환 대통령은 같은 하나회리더로서 제2인자가 되고 있는 육사 11기 동기이며 절친인 노태우에게 올림픽 개최를 성사시키는데 있어서 앞장서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노태우는 전두환이 기대하는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이지 못하다.

김상진은 그 정체가 2020년까지 서울에서 살다가 1980년으로 시간이민을 떠나온 이상우이다. 이상우의 직업이 방송사의 정치부 기자였다. 따라서 이상우가 알고 있는 전두환과 노태우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회에 대한 정보가 김상진의 기억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금 그 기억의 파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구에서 자라났으며 대구공고 입학동기이다. 다만 하나의 차이는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 학생들이 귀국함에 따라 대구의 최고 명문인 경북고에 자리가 비게 되어 노태우는 전학시험을 쳐서 편입하였고 전두환은 그러하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경북고에 입학하여 다닌 육사 11기 동기가 바로 김복동인데 그는 경북 청도의 유력한 지주집의 아들이다. 경북고 동창이며 육사 동기인 친구 노태우가 훗날 지주인 김복동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전두환은 육본 경리감을 지낸 장군 이규동의 딸 이순자와 결혼하게 된다.

둘째로, 전두환은 19311월에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에서 태어났는데 그 마을은 특이하게도 완산 전씨의 집성촌이다. 그의 부친이 빈농이어서 1941년에 만주로 떠났다가 2년도 안되어 경북의 대도시인 대구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온전할 전씨는 그 시조가 백제의 개국공신 10명중의 하나이며 그 본래 기반이 호남이다.

전국적으로 7천명 정도로 작은 파벌인 완산 전씨의 경우에는 정선 전씨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고려말의 중시조가 완주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비록 그들의 집성촌이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뿌리의식은 전북 전주이며 자신들은 호남에서 영남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잊지 아니하고 있다.

그와 같은 뿌리의식이 묘하게도 훗날 전두환이 월남 파병시절에 친하게 지낸 육사의 5년 후배 장세동을 심복으로 삼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전남 고흥 출신인 육사 16기 장세동이 유능하지만 영남세력이 강한 사조직 하나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월남에서 전두환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그의 신임을 받아 하나회에 들어가서 승승장구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1931년생인 전두환은 대구에서 10대를 보낸다. 그는 대구공고를 마치고 1951년에 육사 11기로 들어가 1955년에 육사에서 처음으로 정규 4년과정을 이수한 자이다. 따라서 육사 11기들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단기과정을 수료한 선배들에 비하여 자신들은 정식으로 4년과정을 이수한 진짜 육사 정규출신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 점을 이용하여 군부의 쿠데타를 극도로 경계한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심복인 경호실장 차지철이 군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할 때 육사 11기에서 리더를 구한 것이다. 그 리더로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선택한 것이 머리가 좋은 박정희 대통령의 절묘한 용병술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공통점은 대구에서 어렵게 자란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육사에서의 학업성적이 별로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고권력자인 박정희와 그의 심복인 차지철의 도움이 없으면 군에서 빛을 보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그에 따라 뜻밖에 대통령과 경호실장의 내밀한 후원으로 군에서 요직을 맡게 된 그들은 신군부의 핵심이 되는 하나회를 만들고 박 대통령에게 온갖 충성을 다 바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791026일에 그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암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그 안가에 함께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당시 보안사령관이며 하나회의 리더인 전두환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역습을 받아 1212일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에 의하여 체포가 되고 만다. 그것은 하극상이지만 쿠데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듬해 5월 광주의 시민봉기를 진압한 신군부가 한국의 정치적인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고서 19809월에 전두환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19813월에는 제5공화국을 선포하고 마는 것이다. 그 주역이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육사 11기이며 하나회이다. 거기에 제 16기인 장세동과 이종찬이 합류하고 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절친이며 말을 잘 듣는 노태우를 자신의 후임으로 하겠다고 육사 11기 동기들에게 은밀하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보스 기질이 강한 전두환은 절친인 노태우에게 항상 자신이 맡았던 요직을 인계해오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변수는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이다. 전두환이 묘하게도 육사 5년 후배인 16기 장세동을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있다. 경상도 출신이 다수인 하나회에서 전두환은 전남 고흥 출신인 장세동을 월남 파병시절에 발굴하여 하나회에 가입시키고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두환의 조상이 백제의 개국공신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연으로 두사람은 비밀스러운 의리로 뭉쳐 있다. 그러므로 전두환은 만약의 경우에는 자신의 동기인 육사 11기가 아니라 5년 후배인 장세동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은 상왕 노릇을 할 생각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과연 그의 희망이 현실로 나타날 것인가?...

김상진은 1987년에 전두환의 소망이 허사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전 시대인 1982년에 있어서는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는 미래지사에 속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들을 제5공화국의 비사로 벌써 알고 있는 사람이 시간이민자인 김상진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내용을 조금도 발설할 수가 없다. 그저 혼자서 무심하게 사태의 전개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김상진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 노태우는 지나치게 소심하고 적극적이지를 못하다. 그래서 제1인자가 아니라 전두환의 그늘에서 제2인자로 오래 살아올 수가 있는 모양이다.

서울올림픽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라고 노태우를 앞장세웠지만 별로 성공적이지를 못하다. 그래서 전두환은 아주 추진력이 강한 인물을 물색하여 그에게 그 일을 맡기고 있다. 전두환의 부탁을 받은 인물이 바로 현대그룹의 왕회장인 정주영이다.  

당시 현대그룹에는 많은 유능한 두뇌들이 왕회장을 보좌하고 있다. 그들이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동정을 파악하고서 정밀하게 표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64년에 벌써 동경올림픽을 개최한 바가 있는 일본이 이제는 나고야 도시에서 1988년에 다시 올림픽을 개최하고자 신청하고 있다. 서울과 나고야의 경쟁이다.

어느 쪽이 유리할까? 국제 올림픽위원회에서 표대결을 하게 되면 선진국보다는 제3세계의 표가 더 많다. 그렇다고 하면 미국만 한국에게 유리하게 영향을 미쳐준다고 하면 한번 해볼 만한 유치작업이다. 그 점을 오래 기업을 경영한 정주영 회장이 벌써 가늠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구나 정주영 회장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아주 중요한 정치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전두환 대통령의 7년 단임 선언과 관련된다. 전 대통령이 미국정부에게 자신이 사심없이 마치 미국의 초대대통령 워싱턴처럼 한국에서 7년 단임으로 정계에서 물러날 것이니 자신에게 서울올림픽이라는 선물을 하나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김상진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19819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개최가 된 국제올림픽위원회 회의에서 서울이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장소로 투표로 결정되고 그렇게 선포가 되고 만다.

무려 5227로 일본의 나고야를 물리치고 한국의 서울이 압승을 거두고 있다. 그 유치성공의 일등공신이 재계에서는 정주영 회장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훗날 1987년에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노태우는 전적으로 자신의 공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한 정치권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던 정주영 회장이 5년후인 199211월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선거전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결과는 제3위로 낙선이 되고 만다. 그 결과 한국의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 후보는 현대그룹의 왕회장인 정주영을 곱게 볼 리가 없다.

그와 같은 훗날의 역사까지 꿰뚫어 알고 있는 김상진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미래의 일을 누설하거나 발설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조용히 1981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다.

그러한 김상진과 윤지혜 부부는 새해 1982년이 되자 의미심장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시간이민자인 그들 부부에게 어떠한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첫째로, 127일에 제1야당인 민한당의 총재인 유치송 의원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정치 피규제자의 해금을 주장하고 있다. 유치송 의원은 과거 김영삼 의원과 뜻을 함께하고 있던 야당의 동지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정치규제를 당하고 있으며 그들을 대신하여 유치송이 제11대 국회에서 제1야당의 당수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이제는 양 김씨를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아직 시기상조로 생각하고 있다.

둘째로, 3월달에 부산에서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김상진이 선배인 성기수 기자와 함께 현지를 방문한다. 한국의 대학생들이 미국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된 이유는 19805월 광주 민주화운동을 지지하지 아니하고 신군부를 지지한 미국의 행동에 크게 실망하였기 때문이다.

김상진은 광주가 아니고 부산에서 그러한 반미행동이 과격하게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에 새삼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시간이민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이제는 반미노선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에 우려가 앞서고 있다.

전국적으로 그러한 현상이 전개가 된다면 대학생들이 새로운 대정부투쟁의 방법론을 선택하여 학습할 가능성이 크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많은 젊은이들이 자유자본주의의 병폐로 나타나고 있는 노동자 농민의 빈곤화를 구조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하였는데 그것이 한국에서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의 대학가 운동권에서 공산주의 이론과 주체사상을 연구하고 그것을 활용하여 이념적으로 신군부의 독재에 항거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한 미래를 알고 있는 김상진이기에 미리 그러한 단초를 보고서 걱정이 앞서고 있다.

셋째로, 그러한 우울한 사건만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제적을 당한 학생만 아니라면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선처를 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1981년에 이어 1982년에 있어서도 고시에 합격한 대학생들에 대하여 운동권 경력을 이유로 탈락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취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연좌제 폐지에 이어 또 하나의 선심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대학의 운동권 출신들이 사법고시와 행정고시 그리고 외무고시와 입법고시 등에 합격하는 경우에는 면접에서 탈락하지 아니하고 이제는 공무를 수행할 수가 있게 된다. 물론 완전한 불이익의 해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관용인 것은 틀림이 없다.

김상진4월에 발생한 의령총기사건5월에 발생한 장영자 사기사건을 취재하느라고 바쁘다. 전자는 경찰의 행정관리상의 문제이다. 반면에 후자는 권력형 사기사건이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2년 남짓 지나자 벌써 대규모의 부정부패사건이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역시 권력을 쥐게 되면 빠르게 타락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이 되자 김상진은 전두환 대통령이 안기부장으로 외무부장관 출신인 노신영을 임명하는 것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장군 출신이 아닌 민간인 관료 출신을 안기부장으로 임명한 것이 상당히 신선하기 때문이다.

훗날 노신영 안기부장은 3김씨를 해금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게 하는 것이 한국의 정치안정과 민주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그만큼 노신영은 문민정부의 탄생에 나름대로 공헌한 인물이다. 그와 같이 김상진이 평가하면서 1982년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