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8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16. 17:03

이사야 강해 제187(41:25-29)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14()

 

공허한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두 가지 이사야의 예언, 그 가운데 북방에서 오는 자해 돋는 곳에서 오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41:25-29)

 

본문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과 사람들이 만든 우상과의 차이점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41:21-24). 다시 살펴보면, 그 주요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을 주시고 그 예언 그대로 반드시 역사를 섭리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은 창조주가 아니고 일개 피조물인 사람들이 만든 가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그와 같은 역사섭리의 능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  둘째, 하나님은 복과 진노의 선택권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선택에 따라서 반드시 그 결과가 발생하도록 하십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에 대하여 생명의 복을 주거나 또는 진노와 재앙으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상은 그러한 능력이 없습니다. 복과 저주를 주장할 수 있는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오늘의 본문말씀을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이해의 방법은 각 구절을 먼저 살펴보면서 그 깊은 의미를 묵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파악해보는 것입니다;

첫째로, “(a) (여호와)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b) 내 이름을 부르는 자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c) 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같이, (d) 토기장이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41:25); 언뜻 보면, 같은 내용을 두 번 강조하고 있는 문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주의를 기울여보면 다음과 같이 다른 두 가지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여호와)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41:25a);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큰 길은 해변길입니다. 그 길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길과 남쪽에서 올라오는 길 두 가지입니다;

1)    남방의 애굽에서 해변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방에서는 두 세력이 해변 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세력 또는 서쪽의 헬라나 로마의 세력들입니다.

2)    선지자 이시야가 예언을 하고 있으므로 북방에서 오는 한 사람은 신바벨론 느부갓네살 황제를 지칭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주전 586년에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과 귀족들을 바벨론 땅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왕하25:1-7).

3)    이사야가 그 예언을 하고자 하는 이유는 선민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제대로 섬기지 아니하고 그저 자신들의 현세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우상으로 삼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39:8, 41:24). 이사야가 동족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훗날 역사 가운데 실현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자손들이 발생한 그 일과 이미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예언의 말씀을 대조할 것입니다. 그 결과 두려우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임을 발견하고서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41:22-23, 48:6-7). 그러한 미래를 이사야가 얼마나 염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2)  내 이름을 부르는 자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41:25b); 언뜻 보면, 해 돋는 곳은 먼 동방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 깊이 생각을 해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해가 돋는 곳은 이 땅 지구가 아닙니다. 그곳은 하늘입니다.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훗날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오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 분이 누구일까요?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3)  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같이”(41:25c); 고관들은 권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므낫세 왕의 시대에 권력을 사용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왕하21:16). 그 때문에 선민의 나라도 적에게 망하고 맙니다(왕하21:11-13). 훗날 신바벨론 제국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고관들이 모두 적국에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신분과 체면이 석회와 같이 하얗게 탈색이 되고 적군에게 짓밟히고 마는 것입니다(41:25c).

(4)  토기장이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41:25d);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선민들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맞이하게 됩니다(65:17-19). 마치 토기장이가 못쓰게 된 토기를 깨어버리고 새로이 진흙을 반죽하여 새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9:19-26).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그리스도의 성도들의 시대가 전개될 것입니다.

둘째로, “(a)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b)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c)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41:26); 이사야는 훗날 유다 사회에 메시아가 오시지만 타락한 선민들이 그를 배척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이 이사야가 메시아사상과 하나님의 새 세상 창조에 대하여 가장 많은 내용을 예언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이 대선지서 가운데 으뜸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다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41:26a); 선민 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과 새로운 세상의 창조에 관하여 먼저 말하고 있는 정경은 모세오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8:11-20, 10:16, 11:14, 18:15-19, 30:1-6). 하지만 상당히 구체적인 내용은 이사야의 예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동족들에게 그 사실을 예언하고 또한 글로 적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은 훗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섭리인 줄 알고서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민들이 그런 줄 몰랐다고 아예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요컨대, 이제는 책임회피를 할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예언이 임하였기에 오로지 회개와 순종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2)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메시아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and beforetime, that we may say, He is righteous?, KJV)”(41:26b); 이사야의 예언이 그의 동족들인 유다 백성들에게 왜 필요할까요? 이사야는 한 마디로 그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만약에 선민들에게 두 가지의 예언, 곧 ①영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나라가 망하고, ②훗날 그 사회에 오시는 메시아까지 그들이 배척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을 미리 말해주지 아니하면 틀림없이 그들은 항변을 할 것입니다.

2)    그 항변의 내용은 왜 처음부터 그 사실을 자신들에게 알려주어 하나님과 메시아가 옳다고 그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아니했느냐?라는 것입니다(41:26b). 그러므로 예언이 먼저 있다고 하는 것은 훗날 그 예언이 성취가 되었을 때에 피조물들이 반론을 제기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3)    또 하나 예언의 기능은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에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우상과의 차이는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48:6-7).  

(3)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41:26c); 이사야는 자신이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선지자로 세움을 받게 되었을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6:1-8). 당시 하나님께서는 비록 선민들에게 이사야가 하나님의 예언을 전할지라도 그들이 모두 알아듣지를 못할 것이라고 언질을 주셨습니다(6:9-13). 그 말씀이 그대로 응하고 있습니다;

1)     이사야는 가슴이 아픕니다. 동족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여기지 아니하고 선민들의 우상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조국이 멸망할 것임을 그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회개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2)    그렇게 계속 회개하지 아니하면 선민들이 그들의 땅에 구주로 오시는 메시아까지 배척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들은 요지부동입니다.

3)    그래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41:26c).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사야에게 사전에 주신 언질과 동일한 내용입니다(6:9-10).

셋째로, “(a) (여호와)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b)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예루살렘에 주리라”(4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계속 예언활동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 내용은 첫째, 북방에서 오는 군대를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는 것입니다(41:27a). 둘째, 구주 메시아가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것입니다(41:27b);

(1)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약속을 해주신 바가 있습니다; “앗수르의 군대를 예루살렘에서 다시는 보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37:33-34, 38:6). 그러므로 여기서 이사야가 북방에서 오는 군대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앗수르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바벨론 제국의 군대입니다. 그 군대에 의하여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메시아가 유다 땅에 오신다고 하더라도 선민들에 의하여 배척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쁜 소식이라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41:27b). 그 이유는 만민구원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먼저 구원의 대상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유대인들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11:11-12).

(3)  이사야의 바램은 700여년 후에 사도 바울의 소원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30-31). 구원의 순서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만민구원의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하는 바울의 믿음입니다(11:29, 36).

넷째로, “(a)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b)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아브라함과 같은 자)가 없도다”(41:28); 선민들의 사회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타락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첫째, 제사장나라의 멸망을 내다보고서 하나님신앙을 회복하자고 부르짖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41:28a).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훗날 유다 왕국이 망하고 왕족들이 적들에게 끌려가서 환관이 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39:6-7).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그 예언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시대가 태평하므로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39:8). 그것은 지독한 현세주의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2)  둘째,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을 앞두고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의견을 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 살고 있는 장조카 롯의 가족을 구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의인 10명이 있더라도 그 성의 멸망을 재고해달라고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18:32). 이사야는 그 옛날 아브라함과 같은 조언자가 유다 왕국에는 한 사람도 없다고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41:28b).

다섯째로, “(a)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허무하며, (b)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41:29); 이사야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선민사회의 미래상을 예언해주고 있지만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동족들인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모두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겉으로 보자면,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들의 여호와로 잘 섬기고 있는 백성입니다. 성전과 회당에서 안식일과 절기를 잘 지키고 각종 제사도 율법대로 준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생활의 목적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우하심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선민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는 선민인 자신들에게 현세적인 복을 베푸시고 반면에 이방인들에게는 재앙과 진노를 내리시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2)  그것은 한 마디로,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해주는 신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유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율법생활은 영생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허무하며”(41:29a).

(3)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들이 그들의 소망과 소원을 들어줄 수가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상들은 사람들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므로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41:29b).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없애버리시고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우상문화를 철저하게 근절시키고자 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죄 가운데 영생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3:22-24).

(4)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18:8). 우상을 섬기고 현세적인 기복신앙을 영위하다가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것이 가장 끔찍한 인생입니다. 그것만은 피하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예언 그대로 하나님신앙을 제대로 회복하지 아니하고 우상문화에 젖어서 살게 되면 두 가지 비극이 찾아옵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심판입니다. 선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북방에서 군대를 동원하시어 그 나라가 망하도록 역사를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심판주로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적인 기복신앙만은 빨리 청산을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생의 하나님이 아니라 현세적인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세상적인 이득과 성공을 보장해주는 신이 최고라고 여기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문화임을 빨리 깨닫고서 회개를 해야만 합니다.

차제에 하박국 선지자의 다음 말씀을 음미하시면서 아무쪼록 영생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3:17-19). 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