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18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8. 16. 17:01

이사야 강해 제186(41:21-2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1213(주일)

 

창조의 신 여호와 하나님과 창조능력이 없는 우상과의 차이에 대하여(41:21-24, 48:6-7)

 

사람은 참으로 신기한 창조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있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창조주께서 주신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가 있습니다(1:26-27, 2:7, 1:19-20). 둘째, 창조주의 모양을 따라 창조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성을 일부 모방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7:11, 22, 8:7). 그래서 발명을 하고 필요한 도구를 고안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의 지성은 나름대로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으로 발휘가 되고 있습니다. 셋째,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세상에서 당장 현세적인 이익을 얻기 위하여 이성적인 계산과 판단이 탁월하게 발휘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성과 지성과 이성이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히 영성’(靈性, spirituality)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사람들이 창조주와 영적인 교제를 강화함으로써 영생의 구원을 얻기를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16). 그런데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영생의 구원문제나 하나님과의 교제는 나중의 문제입니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또한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영역이나 지성적인 활동이 모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존과 승리에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어서 그것을 의지하여 현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상의 탄생이며 영적인 타락입니다(1:21-23). 그리고 사람들은 지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무지막지한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체계화하고 계속 성장시켜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마침내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당장 자신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는 신의 명령이나 진리추구는 모두 고려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곧 무신론적인 사람들의 이성적인 계산이며 판단의 결과입니다.

그와 같은 현실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게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1:18-20).

그런데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 정도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이 만든 우상과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기본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구절을 따라가면서 한번 다음과 같이 파악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소송하라. (b)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c)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41:21); 여호와와 우상 가운데 누가 참신(true God)일까요?

(1)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소송하라”(41:21a);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마치 우상인줄로 알고서 섬기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임의로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우상이 창조주 하나님만큼 능력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 세상에서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심을 충족시키는데 있어서 우상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혀서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의 제안을 하시고 있습니다; “하늘의 법정에서가 아니고 유다 왕국의 법정에서라도 그 점에 관하여 시비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41:21a 의역).

(2)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41:21b);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입니다(19:5). 그러므로 그들의 나라는 사실 주권자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19:6). 그렇지만 하나님이 유다 왕국을 직접 통치하지 아니하시고 다윗 왕조를 통하여 다스리십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야곱의 왕은 다윗 왕가의 왕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 왕가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렇지만 주권자 하나님께서 유다 왕국의 법정에서 누가 참신인지 소송을 하고 그 증거를 검증하겠다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공평한 판결을 위하여 스스로 원고의 입장에 서고자 하십니다. 그 표현이 바로 자신이 야곱의 왕이라는 것입니다(41:21b).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지위를 스스로 격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41:21c); 그렇게 다부지게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의지하고 있는 우상이 과연 참신으로 불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그 증거를 확실하게 제시를 해보라는 것입니다(41:21c). 

둘째로, “(a)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b) 이전 일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c)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41:22); 창조주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이사야가 선민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조주는 유일하게 자신이 예언한 대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행하신 역사의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41:22a); 참신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예언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 예언 그대로 장차 실현이 된다면 참신입니다. 역사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절대자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이전 일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41:22b); 또 하나의 방법은 이전에 행한 일 가운데 하나의 역사섭리의 원칙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원칙이 변함없이 장래에도 준수가 되고 있으면 그것은 신실하신 헤세드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3)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41:22c); 선지자 이사야는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예언을 두 가지 종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별로 멀지 아니한 미래’(for the near future)에 대한 예언입니다. 둘째는 먼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a)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b) 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41:23); 앞 절에 이어서 설명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1)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41:23a); 가까운 미래에 올 일에 이어서 그 다음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그 먼 미래에 대한 예언까지를 알려주면 참신을 구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사야의 설명입니다. 만약에 당면한 미래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그것이 실현이 되며 그 다음에 먼 미래 곧 종말에 대한 예언을 하고 그것조차 진실로 드러나게 될 것 같으면 참신 곧 창조주임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2)  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41:23b); 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 복과 저주를 모두 내릴 수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신에게 복을 빌며 또한 저주를 거두어 달라고 손이 발이 되듯이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로 그 신이 예언하고 있는 복이나 저주가 그 정한 때에 발생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실현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창조주라는 이사야의 설명입니다.

넷째로, “(a) 보라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b)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41:24); 그런데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비록 복과 저주를 예언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들이 말한 시기에 그 복이나 저주가 발생하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41:24a). 실제의 예로써 엘리야 시대에 바알 신을 섬기고 있는 선지자 450명의 경우가 그러합니다(왕상18:19, 24-29).

그래서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선민들에게 하나의 결론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상을 신이라고 부르며 섬기고 있는 사람들은 가증스러운 자들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제대로 섬길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자신들이 만든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기 때문이다”(41:24b 의역).

좀더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손쉽게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요구대로 그 우상이 신의 능력으로 현세적인 복을 주고 저주를 거두어가는 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타락이며 동시에 진리를 추구하는 지성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아가서 이성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이 소유하고 있는 지성과 이성의 판단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전제를 교만한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성과 이성의 전능성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피조물의 세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까지 전부 지성적인 탐구 및 이성적인 계산과 판단의 대상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참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그 불경함이 극에 달하고 있으며 실로 가증스러울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고유권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해주시고 그 예언대로 반드시 성취를 하십니다.

(2)  과거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면 미래에도 동일한 경우에 같은 섭리를 하실 것이라고 믿을 수가 있습니다.

(3)  복 주심과 진노하심이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장중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복과 진노에 대하여 예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인을 잘못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대접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손쉽게 우상을 만들어서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는 것이 가증스러운 행위라고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세적인 복을 챙기기 위하여 우상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고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패역(悖逆, 패륜적이고 반역적임)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5)  나아가서 창조주 하나님을 고작 자신들의 현세적인 소원성취를 이루어주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것이 가증스러운 신앙행태입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지 창조주를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열매가 없으며 그 결말이 허망하게 망하고 말 것입니다.

(6)  이사야의 예언과 설명이 2,700년전에 국한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옷깃을 여미며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 “부디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섬기는 선한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현세적인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게 하소서. 남은 인생 가운데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