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54강(사34:8-15)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11일(수)
메시아의 희생을 외면하는 자, 에돔과 같은 자에게 심각한 여호와의 보복이 임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이사야(사34:8-15)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복하시는 날이 에돔에 임한다고 본문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4:8a, 9-15). 그 이유는 그들이 시온에서 발생하는 메시아의 대속의 죽으심과 관련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34:8b).
이사야 이후 훗날의 역사를 참조하면, 비록 에돔이 주전 2세기말 유대에 복속이 되어 이두매로 바뀌지만 주전 1세기 중반에는 로마의 도움으로 그들의 헤롯 왕가가 오히려 유다를 지배하게 됩니다. 유다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헤롯 대왕은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아를 살해하고자 했으며(마2:13-18) 그의 아들인 갈릴리의 분봉 왕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죽이게 됩니다(마14:1-12). 그리고 헤롯 대왕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1세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탄압하고 사도 야고보를 죽이게 됩니다(행12:1-2). 한 마디로, 헤롯 왕가는 메시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악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미래지사를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선지자 이사야가 메시아의 복음사역에 적대적인 에돔과 같은 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보복에 대하여 본문에서 심각하게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 참상은 한 마디로, 에돔 지역에 그 옛날 사라진 소돔과 고모라의 비극이 다시 발생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의 본문예언은 지옥의 모습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이제부터 각 구절을 검토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의미를 풀이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b)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사34:8);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 장차 임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4:8a). 그런데 그 심판에는 하나의 기준이 있을 것이라고 동시에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기준이 바로 ‘시온의 송사’와 관련이 되고 있습니다(사34:8b).
여기서 ‘시온의 송사’는 시온 성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시는 메시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대속의 죽음이 바로 죄인인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희생임을 깨닫고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은 그 신원이 회복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그 사실을 외면하고 스스로 의인으로 행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복을 당할 것입니다. 그 때가 어김없이 장차 임하게 될 것임을 이사야가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둘째로, “(a)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b)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c) 그 땅은 불붙은 역청이 되며”(사34:9); 이사야는 메시아의 대속의 죽으심을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서 계속하여 제멋대로 인생을 사는 자들을 에돔 족속으로 보고 있습니다(사34:9a).
(1) 훗날의 역사를 보면, 에돔 족속이 이두매인이 되고 그들의 헤롯 왕가가 유다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헤롯 대왕은 유다 지배를 영구히 하고자 유다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죽이고자 합니다(마2:13-16). 그와 같은 사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며 살고자 하나님의 간섭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배척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에돔 족속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바로 그 옛날 하나님의 불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아드마와 스보임입니다(창19:23-25, 신29:23). 그 땅에 살고 있는 자들이 또다시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제멋대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하나님의 보복이 역사적인 심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사야의 세부적인 예언의 의미가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사34:9a); 에돔의 땅은 훗날 요르단에 속하게 됩니다. 그곳에는 석유가 생산이 되고 아스팔트의 재료가 되는 역청이 풍부합니다.
2)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사34:9b); 그런데 그곳에 유황불이 떨어지게 되면 엄청난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생하여 융단폭격이 이루어진다고 하면 하늘이 타버릴 것만 같은 재앙이 발생할 것입니다.
3) “그 땅은 불붙은 역청이 되며”(사34:9c); 하늘에서 죽음의 재가 땅으로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땅의 석유가 분출되면서 온 세상이 불 못으로 변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에 임하고 있는 지옥의 모습입니다(계20:14).
셋째로, “(a)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b)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사34:10); 이 땅에서도 지옥과 같이 저주받은 모습이 나타날 수가 있음을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지옥 불과 같이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과 연기가 온 땅을 뒤덮고 있습니다(사34:10a). 그리고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땅의 생산력이 완전히 회복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서로 죽고 죽이며 약탈을 통하여 강자만이 살아남는 곳입니다.
(2) 그와 같이 무시무시한 곳이므로 그곳을 통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사34:10b). 그리고 그러한 곳에 유배를 간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지옥의 아비규환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참고로, 그 옛날 아우를 죽인 카인이 그러한 땅 ‘놋’으로 유배를 간 적이 있습니다(창4:11-16).
넷째로, “(a)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b)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사34:11);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가 없는 그 저주 받은 땅에 어떠한 부류의 사람들이 득세를 하고 살게 되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당아새와 고슴도치와 같은 자들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그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4:11a).
그 의미는 펠리칸처럼 생겨서 먹성이 좋으며 그 습성은 올빼미처럼 밤을 좋아하는 당아새와 같은 인간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고슴도치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가시로 중무장이 되어 있는 자들이 그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 한둘이 아님)하므로 그 사체(死體, 죽은 시체)를 파먹기 위하여 밤에는 부엉이, 낮에는 까마귀가 설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피조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창조이전의 혼돈과 공허 속으로 되돌아가버린 것과 같습니다(창1:2, 사34:11b). 그것이 하나님의 저주이며 심판의 모습입니다(사34:8).
다섯째로, “(a)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b)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사34:12); 혼돈과 공허의 세상이므로 두 가지가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첫째는 국가의 질서가 잡히지 않습니다. 서로가 힘을 행사하고 있기에 그것을 조정하고 다스릴 수 있는 귀인(貴人, 귀하신 분)이 없는 것입니다(사34:12a). 그것은 마치 제 소견대로 행하고 있는 사사 시대와 같습니다(삿21:25). 또 하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또는 하나님의 사람인 방백이 없는 것입니다(창20:7, 23:6, 사34:12b).
여섯째로, “(a)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b)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사34:13); 메시아의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도리어 해치고자 하는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아비규환의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계속이 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의 질서를 모두 외면하고 그들에게 맞는 무질서의 사회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죽이고 약탈하는 무서운 사회를 형성하고 그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의 불 심판을 당하고서도 정신들을 차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그들의 궁궐과 도성이 모두 훼파가 되고 마는 비극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사34:13).
이사야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삶의 모습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칼과 전투로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의 말로가 다음과 같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1)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사34:13a); 다시는 국가를 형성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궁궐이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가시나무가 생겨나고 사람들이 살지를 못하게 되고 맙니다.
(2)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사34:13b); 견고한 성은 요새지인 성읍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할거하던 약탈족속들도 결국에는 더 강한 상대를 만나서 모두 죽고 그 성은 초토화가 되고 맙니다. 그 결과 엉겅퀴와 새품으로 불리고 있는 도깨비 바늘이 자라서 그 땅을 뒤덮고 있습니다. 그곳에 살 수 있는 짐승은 승냥이와 타조일 것입니다.
일곱째로, “(a)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b)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c) 올빼미가 거기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으며”(사34:14); 노아의 홍수 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악함 때문에 그 가축과 들짐승 그리고 새와 땅까지 모두 저주를 하셨습니다(창6:5-7, 11-13). 그러나 무지개언약을 세우신 이후에는 사람의 잘못 때문에 동물과 환경까지 저주하지를 않습니다(창8:21, 9:11). 그 덕택에 사람들이 사라진 그 땅에 각종 들짐승과 새들이 번성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이사야의 예언을 살펴보면 그 질이 별로 좋은 동물들이 아닙니다;
(1)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사34:14a); 가축이 사라지고 들짐승들만이 득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습성이 비슷한 이리와 같은 짐승을 만나서 서로 투쟁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사34:14b); 양과 달리 염소는 버릇이 고약합니다. 한 마디로, 제멋대로이며 머리로 상대를 들이박으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숫염소가 더 성질이 좋지를 못합니다. 그러한 숫염소가 같은 종자를 만나서 투쟁의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3) “올빼미가 거기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으며”(사34:14c); 밤에 먹을 것을 찾는 올빼미입니다. 야행성이므로 남이 쉬는 시간에 그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새 종류가 살아남아서 밤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무서운 곳입니다.
여덟째로, “(a) 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b)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사34:15);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고 부엉이와 솔개들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보복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비극적인 하늘의 모습입니다. 아름다운 하늘이 사라지고 낮에는 솔개들이 먹이를 채어가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사냥꾼 솔개가 짝짓기를 많이 하고 그 개체의 수가 자꾸만 늘어가고 있습니다(사34:15b).
그리고 밤에는 부엉이들의 세상입니다. 그들이 밤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많아서 득세를 하면서 그 부엉이의 개체의 수도 크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는 “알을 많이 낳고 번식을 많이 하고 있다”(사34:15a 의역)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장차 독생자를 이 땅에 메시아로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피조물의 잘못과 허물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감당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 메시아가 시온(예루살렘) 땅 골고다 언덕에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게 되는 역사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사야는 시온의 메시아의 희생이 있게 되면, 그 구원을 바라보는 자와 외면하는 자가 발생할 것이며, 그들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 만약 그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땅에 다시 자리를 잡은 에돔 족속의 헤롯 왕가처럼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자는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의 보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헤롯의 왕가가 망하듯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그들의 국가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와 아름다운 환경이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2) 그들은 마치 지옥 불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는 그들의 삶의 아비규환과 그들의 사회와 환경의 황폐함에 대하여 상세하게 상징적인 수법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고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지옥과 같은 세상을 만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이웃 그리고 이 세상을 함께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로 그러한 깨달음과 실천의 역사가 성도님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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