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51강(사33:17-2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8일(주일)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이사야의 16가지 이야기(사33:17-21)
이사야의 선지서는 모두 66장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선지서 이사야를 둘로 나눈다고 한다면 전반부의 마지막 장이 제33장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전반부의 예언을 끝내기 위하여 제33장 마지막 대목에 새 예루살렘 성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함께 살펴볼 내용은 새 예루살렘 성의 16가지 특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과연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종말론적으로 하늘에서 이 땅으로 임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이제부터 하나하나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음과 같이 각 구절을 먼저 검토하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16가지의 의미를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 (b)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사33:17); 새 예루살렘 성의 첫 번째 특징은 왕께서 그 가운데 자리를 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사33:17a).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다음과 같이 새 예루살렘 성은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광활하다는 것입니다(사33:17b);
(1) “네 눈은 왕을 그의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사33:17a);
1)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의 중심을 의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과 함께 왕으로 오시는 분이 과연 누구일까요? 다윗의 시편을 참조하면 부활 승천하신 메시아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메시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과 (왕의 통치권의 상징인)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시110:1-2). 따라서 이미 시편 내용에 따라 그리스도가 왕으로 이 땅에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사야가 그 점을 새삼 예언하고 있는 대목입니다(사33:17a).
2) 또한 이사야는 성도들이 장차 그 광경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사33:17a). 그 예언은 성도들의 부활을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있어야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땅에 메시아로 탄생하셔서 30세부터 여러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사신 적이 있으시기 때문에(눅3:23) 제자들이 부활하여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매우 친숙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간에 다시 만나는 장면이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사33:17a).
4) 만약 제자들이 접근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주님께서 창조주로서의 위엄을 강하게 보이신다면 이 대목 이사야 예언의 표현이 달라질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름다운 가운데에서 보며”(사33:17a)가 아니라 “거룩하신 위엄 가운데 우러러 보며”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성도들은 친숙한 모습으로 재림하시는 주님을 환영하며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2) “광활한 땅을 눈으로 보겠고”(사33:17b);
1) 새 예루살렘 성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까요? 솔로몬이 건축한 예루살렘 성에 비해서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 바라본 예루살렘 성의 규모가 훨씬 큽니다(겔45:1-8). 하지만 훗날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바라본 새 예루살렘 성의 규모에는 미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12,000스다디온(1스다디온은 약192m임)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계21:16). 일만 이천 스다디온은 약2,304km이므로 새 예루살렘 성의 면적은 약 530만km2입니다. 참고로, 그 규모는 중국의 절반을 약간 넘는 것입니다.
2) 새 예루살렘 성의 규모가 그 정도라면 그 성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하나님나라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요? 그것은 부활의 몸을 입은 성도가 자신의 영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실로 “광활한 땅”(사33:17b)이라고 이사야가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으로써는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규모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a)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 (b)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c)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 (d)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 새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게 되면 성도들이 그 옛날의 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야만 무엇이 사라져버렸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것들 4가지가 없는 것이 새 예루살렘 성의 특징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 “네 마음은 두려워하던 것을 생각해 내리라”(사33:18a);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던 일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새 예루살렘 성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악한 영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그곳에서는 평안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계산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b);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늘 계산하면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로 필요한 것인지를 먼저 따집니다. 그 필요에 맞추어서 알맞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와 같은 계산 속의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관계가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3) “공세를 계량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c); 인간은 흔히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본래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에서 태어나 함께 살고 있는 시민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도시국가라는 공동체에서 태어나 살고 있으므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을 내는 것이 시민의 의무입니다. 정당한 세금을 물리기 위하여 국가가 공세를 계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적은 세금을 바치고 더 많은 이익을 국가로부터 얻어내기 위하여 항상 머리를 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런 머리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는 세금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 “망대를 계수하던 자가 어디 있느냐?”(사33:18d); 세상나라는 항상 적의 침입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파수꾼을 내보내고 망대의 봉화를 점검하며 계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탈출하는 백성들을 단속하기 위해서도 망대에서 살피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적의 침입이 없으며 탈출할 성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탄의 세력을 모두 섬멸한 다음에 새 예루살렘 성이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탈출한다는 것은 영벌의 지옥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할 성도가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a)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 (b)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 (c)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사33:19); 천국을 의미하고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의 특징 세 가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쉽지 아니한 내용이지만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1) “네가 강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라”(사33:19a); 남을 강제로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강포한 백성들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처벌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에서 강포한 백성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 점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2) “그 백성은 방언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하며”(사33:19b);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사투리로서 지방 말을 의미합니다. 같은 민족이지만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라가 클수록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같은 중국말이지만 서로 방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당국은 북경 말을 표준어로 삼아서 ‘만다린’을 별도로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의미에서 선민이라고 하여 모두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는 자를 구별하십니다(눅16:22). 따라서 같은 민족이라고 하더라도 마치 방언이 달라지는 것처럼 완전히 구별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스도의 비유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고 나면 비록 같은 유대인이지만 천국과 지옥을 서로 건너가지 못하게 완전히 격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눅16:26).
(4) “말이 이상하여 네가 깨닫지 못하는 자니라”(사33:19c); 유대인들은 사람을 종교적으로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이사야는 달리 구별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성도와 그러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이 이상하여 새 예루살렘 성의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세상사람과 달리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삶에 탐닉하고 있는 세상사람들의 말이 이상하여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거룩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라는 뜻입니다.
넷째로, “(a)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 (b)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c)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d)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33:20); 짧게 설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1) “우리 절기의 시온 성을 보라. 네 눈이 안정된 처소인 예루살렘을 보리니”(사33:20a); 시온 성과 새 예루살렘 성의 차이 한 가지를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온 성은 불안정하지만 새 예루살렘 성은 안정된 처소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시온 성에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수도 또는 떠나실 수도 있지만(왕상9:4-7)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이 곧 성전이시므로(계21:22) 언제나 그 성안에 좌정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선민사상에 젖어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시온 성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지를 못하고 있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2)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사33:20b); 솔로몬 성전이 선민들의 시온 성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성전은 본래 성막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장소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막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광야에서 이동식으로 만든 것입니다(출25:14-15, 40:36-38, 민2:17).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백성들과 함께 끊임없이 이동을 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자 비로소 그 안에 성막이 자리를 잡고 안정이 되었습니다(왕상8:6-11).
(3) 하지만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여전히 이동의 대상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완전한 약속의 땅 곧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성도의 믿음이란 선민들의 시온성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왕으로 계시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저자의 진술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6).
(4)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사33:20c); 새 예루살렘 성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영원한 성전입니다(계21:22). 따라서 더 이상 성도들은 성막의 말뚝을 뽑아서 이동을 계속하지 아니해도 됩니다. 피곤한 이 세상에서의 불안정한 신앙과 믿음이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 줄이 하나도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사33:20d); 성막의 휘장과 덮개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줄입니다. 그것은 오래 사용하면 끊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육신도 오래 사용하면 끊어집니다(고후4:16). 더 이상 목숨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영혼이 계속 그 육신에 내주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 장막의 줄이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더 이상 끊어지지가 않습니다(고후5:1). 부활의 몸을 입고 성도가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서 영생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a)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b)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 (c)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사33:21);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1) “여호와는 거기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사33:21a); 생명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에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영생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사33:21a). 그 생명의 기운이 성도들의 코로 스며들고 있습니다(창2:7). 그 에너지를 받아서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신30:20, 계21:23-24, 22:5).
(2) “그곳에는 여러 강과 큰 호수가 있으나”(사33:21b); 창세기의 에덴동산의 모습이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에덴동산에서 물이 흘러나와 세상의 큰 강의 근원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2:10-14). 훗날 사도 요한이 더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12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1-2).
(3) “노 젓는 배나 큰 배가 통행하지 못하리라”(사33:21c); 새 예루살렘 성에는 바다가 없습니다(계21:1). 그리고 해와 달이 없습니다(계21:23, 22:5). 그 말은 바람이 없으며 물질적인 에너지 원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동력이 되고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태양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생명과 모든 움직임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계21:23-24, 22:5). 그러므로 노 젓는 배가 필요하지가 않습니다(사33:21c). 그리고 큰 배와 같은 탈 것이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오로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계21:25-27). 그것을 하나님의 ‘견인’(牽引, pulling or towing)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합치할 때에 그 강력을 힘입어 자신과 물체의 이동이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고맙게도 새 예루살렘 성의 특징을 16가지로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갈 때에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동시에 이사야의 예언은 그리스도의 제자와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와 새 예루살렘을 앙망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많이 참고하시고 음미하시기를 바라며 간략하게 다시 한번 다음과 같이 간추려 봄으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1) 부활 승천하신 메시아가 새 예루살렘 성의 왕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십니다.
(2) 새 예루살렘 성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하나님나라의 크기는 더욱 광활하여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3) 새 예루살렘 성에서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4) 계산적인 만남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5) 세금의 무거운 짐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6) 적의 공격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7) 강포한 자를 만날 일이 없습니다.
(8) 선민이라고 하여 모두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9) 이 땅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영적인 삶을 살아간 자가 들어갑니다.
(10) 새 예루살렘 성에는 주님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안정된 처소가 있습니다(요14:1-3).
(11)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의 종착역입니다. 더 이상 이동이 없습니다.
(12)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13) 낡아져서 벗어버리는 장막이 아닙니다.
(14) 생명의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시기에 영생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
(15) 생명수의 발원지가 되고 있습니다.
(16)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이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강해 제15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9 |
---|---|
이사야 강해 제15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9 |
이사야 강해 제150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9 |
이사야 강해 제149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8 |
이사야 강해 제148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