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156강(사35:1-2)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11월 13일(금)
시온의 메시아를 바라보는 자에게 임하는 놀라운 회복의 은혜(사35:1-2)
본문의 내용은 한 마디로, 사막에 백합화가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뜻 보면,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바라보고 있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그런데 앞장인 제34장에 실려있는 내용과 비교를 해보면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메시아를 외면하고 있는 에돔이나 헤롯 왕가와 같은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와 보복에서 벗어나서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간구의 내용이면서 동시에 그가 전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과연 그러한 내용이 어떻게 본문 가운데 절실하게 묘사가 되어 있는지 이제부터 두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한번 파악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a)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b)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사35:1);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과 그 주변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동족들이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사35:1a); 남쪽 유다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이사야의 표현과 같이 광야와 메마른 땅입니다. 헤브론 이남의 땅은 네게브 광야입니다. 그곳은 반(半, semi-) 사막성 기후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래보다는 흙이 많으므로 그냥 네게브 광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네게브는 목축을 주로 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헤브론 이북의 땅은 그나마 좀 나은 편입니다. 밭농사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가 많지 아니하여 역시 메마른 지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 그와 같은 지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늘 간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땅을 블레셋이 차지하고 있는 해안지역이나 북쪽 이스라엘의 해안지역 사론처럼 비옥한 들판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변화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기에 풍족하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신11:14, 렘5:24, 욜2:23). 봄에 이른 비가 내리면 발아가 가능하며 새싹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여름에 늦은 비가 내리면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나 열매를 충실하게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 덕택에 가을추수의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둘째, 그 옛날 다윗 대왕 시대의 이스라엘 제국을 다시 한번 역사 가운데 실현시켜주는 것입니다(요1:19-20, 49). 그러면 메소포타미아와 애굽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자신들의 비옥한 농산물을 가지고 조공을 할 것입니다(사60:5-9). 그와 같은 제국의 기쁨을 선민들이 다시 맛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런데 이사야가 예언하고 있는 내용은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들이 희망하고 있는 그러한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적기에 충분한 비가 내려 풍년이 들고 다윗 제국을 회복하여 조공을 얻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이어서 환경자체를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어버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사60:1-4, 65:17-25).
(3)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사35:1b); 사람의 마음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환경 자체를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사야는 사막을 백합화가 자라나는 땅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묘한 비유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1)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선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가장 큰 역사가 사막을 옥토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나마 목축이라도 할 수 있는 남쪽 광야를 벗어나게 되면 사막지대입니다. 그들은 목축을 하면서 사막을 만나게 되면 절망합니다. 그 사막을 지나 장미나 백합화 등 여러 가지 꽃들이 피고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땅에 도달할 수 있기를 얼마나 희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동족들의 염원을 잘 알고 있는 이사야가 그 소원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메시아의 오심을 통하여 이 땅에 발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2)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영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변화가 발생해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백성들의 마음 속에 뿌려지고 하나님신앙으로 자라나야만 합니다. 그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는 마음 밭을 만들기 위해서는(마13:18-24) 회개하고 메시아를 영접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마3:2, 4:17, 요1:12-14). 그리하면 에돔에 내리는 하나님의 보복을(사34:9-17) 피할 수가 있으며 메마른 마음과 환경이 부드럽고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사35:1).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둘째로, “(a)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b)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c)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d)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35:2); 선민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서 꿈꾸고 있는 이상향에 대하여 이사야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환상과 같은 본문의 미래가 도래한다는 예언입니다. 선민들이 시온의 송사(사34:8b) 곧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을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책으로 받아들이느냐? 않느냐? 그 선택에 따라 황홀한 미래가 전개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헤매게 되느냐?(사34:8a) 여부가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할 수 있는”(사35:1) 마지막 기회가 제공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대속의 죽으심을 외면하여 에돔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전락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더 이상 머뭇거려서는 안됩니다. 빨리 잘못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만 합니다. 메시아를 구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다음과 같은 은혜가 임한다고 이사야가 예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1)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사35:2a); 사막과 같은 마음, 메마른 마음이 변하여 생명을 잉태하고 싹을 띄우며 자라나게 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그 마음 속에 임하고 있습니다(눅17:21). 그 결과 환경도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많아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생들이 생명을 살리고 돌보게 되면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성해지는 것입니다.
(2)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사35:2b); 그와 같은 변화를 이사야는 동족들에게 익숙한 지명과 환경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1) 레바논의 영광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지중해무역으로 부국이 된 페니키아의 중심도시가 두로입니다. 오늘날 레바논에 속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다로 뻗어나가면서 잘 살게 되는 영광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2) 광야와 메마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사막을 지나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과 같은 기적이 바로 선민들이 지중해 해변의 기름진 땅을 얻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소유하고 있던 사론 들판이 그렇습니다. 그 풍요로운 땅이 욥바에서 갈멜 산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론의 아름다움으로 변모한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축복입니다.
(3)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사35:2c); 이 세상에 그 누가 사막과 같은 마음을 생명을 살리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광야와 메마른 땅을 비옥한 ‘초승달 지역’으로 만들 수가 있을까요? 역시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가 그 모든 것들이 ‘여호와의 영광’에 의한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4)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35:2d); 선민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사21:10)라는 용어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사야는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1) 선민만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입니다. 그리고 선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의 군대를 무찌르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선민만의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용어가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물론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계시를 받아 가장 먼저 동족인 선민들에게 전한 선지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전하고 있는 계시의 말씀이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그 계시의 말씀은 선민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피조물 전체의 미래에 대한 예언입니다(사65:17, 롬8:18-22).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이사야는 자신의 예언을 말로 전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글로써 적고 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그의 대 선지서 가운데 이방인들에 대한 예언이 풍성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입니다.
3) 그러므로 이사야가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는 ‘우리 모든 피조물들의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사35:2d)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아름다움”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주장 그대로 우리 모두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신 생명살림의 역사를 바라보고 찬양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34장의 이사야의 예언은 끔직합니다. 메시아를 죽음의 형장으로 보내고 그 대속의 은혜를 외면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보복하심이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마치 지옥의 시련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훗날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메시아를 배척했던 예루살렘의 유대교지도자들과 헤롯 왕가에 엄청난 시련이 닥치고 있습니다.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침입하여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켜버리기 때문입니다(마24:2).
그렇지만 제35장이 시작되자마자 희망과 기쁨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에 비가 내리고 사막에 꽃이 피는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광야와 같은 인생,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으로 전파가 되는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에는 메시아를 배척하여 사망의 질곡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다시 회개의 기회가 제공이 되고 있다는 뜻이 강하게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결론은 “우리 피조물들은 모든 생명을 구원하고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그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을 찬양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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