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9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28. 07:32

이사야 강해 제96(2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915()

 

환상의 골짜기의 첫 번째 교훈; 죽음에 이르는 도망과 패망과 결박(22:1-4)

 

이사야는 다윗 왕조 유다 왕국의 사람이며 동족인 선민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도록 선택을 받은 선지자입니다(1:1, 2:1, 6:1, 8-9). 하나님이 특별히 이사야를 선택하여 선민들에게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세운 이유는 그가 동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6:10-11a).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선민들의 불신앙과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그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하나님의 분노와 처벌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6:11b-13a).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엄청난 잘못을 회개하고 남은 인생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갔던 다윗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하는 권유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6:13b, 14:1-2).

그와 같은 입장에서 본문을 들여다보면 다음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1)  동족의 구원과 회복을 염원하면서 그들에게 전할 하나님의 메시지를 얻고 있는 이사야이기에 그가 보고 있는 환상은 역시 그의 동족 선민과 관련된 것입니다.

(2)  이사야는 유다 왕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지리와 환경에 익숙합니다. 따라서 그가 보고 있는 환상의 골짜기는 그에게 익숙한 예루살렘의 골짜기라고 하겠습니다.

(3)  크게 보아, 두 개의 골짜기가 연결이 되어 예루살렘 성에 이르고 있습니다. 먼저 지중해 해변 길에서 예루살렘 북쪽에 이르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것이 물자 및 사람의 수송의 통로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800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 성의 동 서 남 삼면에 깊은 골짜기가 있으며 그 다음에 많은 산들이 시온 성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4)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를 하면서 소란하고 떠들던 성을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그 골짜기는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골짜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적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환상의 골짜기가 주고 있는 첫 번째의 교훈이 무엇인지 본문의 구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22:1); 예루살렘은 비가 적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택의 지붕이 별로 경사가 없습니다. 편편한 지붕이 많은 곳이므로 유사시에는 지붕으로 몸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실태를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24:16-18).

적들이 기습을 해오고 있습니다. 미처 주민들이 산으로 대피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높은 지붕으로 피신을 하고 있습니다. 지붕에 올라가 있는 주민들을 일일이 끄집어내려서 살해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골짜기를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온 적들이 일단 성내의 길거리와 주택의 내부에서 눈에 뜨이는 백성들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들을 먼저 처리를 한 다음에 시간을 두고서 지붕에 올라가 있는 백성들을 끄집어내려야만 합니다. 그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물론 건조한 날씨의 예루살렘이므로 불을 붙여서 지붕으로 던지면 주민들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적들이 침입한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점령한 지역의 주택은 장차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주민들을 산채로 잡아서 끌고 가야만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대사회에서 가치가 큰 전리품은 노동력의 획득인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사건의 전개가 지금 이사야의 눈앞에 환상으로 펼쳐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소란하고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22:2); 인구가 많은 성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소란하고 떠들던 성입니다(22:2a). 그리고 향락의 도시이며 대표적인 소비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즐거워하던 고을이여입니다(22:2b). 그렇게 항상 즐거움과 쾌락의 세월만이 지속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서 흥청망청 제멋대로 살아온 소비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갑자기 적군이 밀어닥치고 있습니다. 성을 방어하던 군사들이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한 백성들이 적군의 칼에 살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렇게 전쟁으로 살해가 되고 있는 자들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과연 무엇에 관한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셋째로,너의 관원들도 다 함께 도망하였다가 활을 버리고 결박을 당하였고 너의 멀리 도망한 자들도 발견되어 다 함께 결박을 당하였도다”(22:3); 적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는데 대책이 없이 도망을 쳤다가 잡혀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결박까지 당하고 있는 관원들과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사야가 말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1)  적의 침입을 예상하거나 평소에 아무런 대비가 없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고 베드로가 강조할 정도로 영적으로 비상시국인데 성도들이 전혀 무감각합니다. 신앙생활에 아무런 대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신앙생활의 흉내만 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적의 침입을 졸지에 받고 있습니다.

(2)  적이 기습을 하였을 때에 이를 격퇴하기 위하여 제대로 싸우지를 아니하고 있습니다; 막상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았으면 그때에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고서 나아가야만 합니다. 니느웨 왕(3:6)이나 히스기야 왕의 태도가 그것입니다(왕하19:1). 그런데 그러한 사후조치마저 하지 못하고 있는 신앙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사야가 지적을 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3)  무책임하게 자기 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백성을 지켜야만 하는 관원들이 먼저 적의 침입을 알게 되자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도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와 백성은 누가 지킬 것입니까? 관원과 지도자들이 그러한데 백성들이야 제 한 몸 살겠다고 앞다투어 도망을 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4)  모두 적에게 붙잡혀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결박까지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하고 썩어빠진 나라와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습니다. 모두 적에게 붙잡히게 하여 꼼짝없이 결박을 당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죄와 사망의 결박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불쌍한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고 깨어 있는 신앙인으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을까요?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이룩하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8:1-2). 이제 이사야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곳으로 마냥 향하고 있습니다.

넷째로,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22:4); 예루살렘의 선민들이 과연 장차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가 있을까요? 선지자 이사야의 눈에는 그러하지 못한 광경이 환상의 골짜기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참혹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환상 가운데 바라보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으로 울부짖고 있습니다;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이방족속처럼 타락해버린 유다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마는구나. 다시 그들 유민들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시지만 그마저도 배척하고 마는구나. 나는 주님처럼 그 환상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몸을 돌려 눈물만 흘리고 통곡을 하게 되는구나. 그 때문에 내 동족이 후일에 당하는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미리 보게 되니 할 말이 없구나. 세상에서는 이미 위로와 소망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디 살 길을 열어주십시오”.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본문을 통하여 나라와 사람이 망하는 것은 전쟁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실을 그는 골짜기의 환상을 가지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민인 동족 유대인들의 미래가 한 마디로 환상의 골짜기의 내용과 같습니다.

훗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선민들에게 유리한 종교행위만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만민을 구원하고자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까지 배척하여 십자가에 못을 박아버립니다. 그 때문에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파괴가 되고 백성들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앞으로 그들에게 어떠한 소망이 남아 있을까요?

마치 이사야의 질문에 화답을 하듯이 훗날 사도 바울이 마지막 남아 있는 소망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0-36). 요컨대, 완전절망의 그곳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창조를 믿고서 아버지 하나님의 그 손을 마지막 신앙심으로 꼭 잡으라고 하는 소망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