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98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6. 29. 05:51

이사야 강해 제98(22:8-11)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917()

 

환상의 골짜기의 세 번째 교훈; 하나님을 배제한 전쟁의 준비(22:8-1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6:1-8). 그는 당시 참으로 이상한 계시의 말씀을 위탁 받게 됩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6:9-12).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이사야의 동족인 선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태가 하나님신앙에서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서 종교생활을 하며 정책결정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아는 때가 오게 되는데 그때에는 눈에 씌워져 있던 것이 벗겨진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6:10, 22:8). 그렇게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때에 과연 선민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이사야가 그 점에 대하여 환상의 골짜기를 통하여 답을 얻고 있습니다. 이제 구절을 따라가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그가(하나님께서) 유다에게 덮였던 것을 벗기매 그 날에야 네가 수풀 곳간(지방 무기고)의 병기를 바라보았고”(22:8);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선민 유대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를 못하고 있던(6:9-10) 그들의 신앙의 상태에 대하여 이제는 볼 수 있도록 덮였던 것을 벗겨주시고 있습니다. 그와 유사한 표현이 사도 바울의 글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후3:15-16).

이제 영적으로 눈이 떠져서 자신을 바라보니(22:8a) 가장 먼저 선민들이 발견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도인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 무기고를 만들고 그곳에 비치해놓은 엄청난 양의 병기들입니다(22:8b). 일찍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곧 이스라엘 제국시대에 선민들은 중동의 강대국이었습니다. 그 위신과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솔로몬 대왕이 40년 동안의 통치기간 내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모릅니다.

구체적으로,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지방에 이르기까지 병기고를 설치하고 도시를 모두 요새화시켰습니다(왕상9:19). 그와 같은 국방정책은 군사력으로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지혜의 대왕 솔로몬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국이 유지가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남북으로 쪼개어져 버린 것입니다(왕상12:15-20). 솔로몬의 치하에서 오랜 세월 중노동과 중 과세에 시달린 열 지파들이 세겜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 그 사실을 유대인들이 깨닫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을 키워서 적을 격퇴하고자 하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의 기습을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들입니다(17:8). 적들을 격퇴한 것은 겉으로 보면, 여호수아가 지휘하고 있는 이스라엘 장정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산 위에서 모세가 손을 들고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할 때에 승리가 찾아오고 있습니다(17:9-13). 팔을 내리게 되면 패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철저하게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는 사실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인식시키고 있습니다(17:14-15). 더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전쟁은 대대로 계속이 될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17:16).

그러나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대신하여 싸우고 계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서 선민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자신들의 군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재삼 깨닫게 해주고 있는 현장이 바로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는 이른바 환상의 골짜기라고 하겠습니다(22:8-11).

둘째로,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을 보며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22:9); 신흥 앗수르 제국이 주전 722년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사야 당시에 남조 유다 왕국을 침입할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국가적 위기를 크게 느낀 히스기야 왕이 대비태세를 점검하고 있습니다.

먼저 천연의 요새인 다윗의 성이 완전하지가 못합니다. 허물어진 곳이 눈에 뜨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성벽을 정비하고자 합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해발 780미터의 고지대이므로 유사시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적에게 오래 포위를 당하게 되면 물 부족이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밖의 물을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시설을 갖추려고 합니다.

구체적에게 바깥으로 노출되지 아니하고 지하수로를 만들어서 샘물을 끌어와야만 합니다. 그리하여야 적의 정찰로부터 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정교한 공사기법이 무엇일까요? 탐사와 연구를 거듭한 결과 바위 사이를 흐르고 있는 지하수맥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서 성 바깥과 안쪽에서 동시에 굴을 파고 있습니다. 물줄기가 하나이듯이 굴도 중간에서 하나로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적과 같은 히스기야 왕의 지하수로가 역사적으로 완공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보면 엄청난 쾌거입니다. 그러나 생명수가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사람의 지혜와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므로 신앙상의 문제를 초래하고 맙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삼상16:7. 4:12). 그 결과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를 막아내지 못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에 갇혀서 물만 마시면서 생존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하고 맙니다. 그때서야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금 깨닫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뒤늦게 살려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성전을 찾아가서 부르짖고 있습니다(왕하19:14-19).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마저 들어 긍정적으로 응답하시고 앗수르의 군대를 신위적인 능력으로 물리치십니다(왕하19:32-36).

하지만 그 다음 발생하고 있는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의 타락상은 전보다 더 부패한 것입니다. 지나친 선민의 자랑에 사로잡혀서 더 큰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왕하20:12-21:9).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왕의 잘못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아예 선민의 왕국을 없애버리시겠다고 공언하실 정도입니다;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들의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하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를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버릴지니”(왕하21:11-13).

셋째로,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22:10); 예루살렘 성벽은 내성과 외성 두 겹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꺼번에 두 성벽을 모두 보수하고자 하므로 자재가 모자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일반가옥 가운데 튼튼한 자재로 지어진 것을 헐어서 그 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왕국이 전란에서 살아남자면 백성들의 희생이 불가피합니다. 그들의 재물도 전쟁물자로 공출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은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어쩔 수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모세의 다음 글귀가 참고가 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0:12-13).

간략하게 풀이를 해보자면, 모든 것을 바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로 행복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달리 모든 것을 바쳐서 히스기야 왕은 선민의 왕국을 지키고 섬기라고 합니다. 과연 다윗의 왕조와 유다 왕국을 섬기고 지키는 것에 백성들이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민족국가 시대에 있어서 실로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는 그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 그가 창조한 생명을 돌보라고 명령을 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 말씀의 본래 뜻이며 정확한 율법의 취지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너희가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22:11);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말씀 가운데 그 해답이 들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물을 공급할 수 있도록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그 물들이 모여서 두 개의 저수지를 이루도록 섭리해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송하며 의지하고 섬길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바로 올바른 하나님신앙이다”(22:11b 의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민 유대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섭리를 모조리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행한 인공적인 업적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22:11a). 지하수로를 마련하여 성밖의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여왔으니 얼마나 큰 일을 행한 것이냐 하는 만족감입니다. 이제는 적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다고 하더라도 넉넉하게 버틸 수가 있다고 하는 안도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지켜주셨기에 앗수르의 대군이 물러갔습니다마는 훗날 신바벨론 제국의 군대가 몰려 왔을 때에는 선민의 왕국이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배은망덕한 선민들을 더 이상 지켜주지 아니하시기로 작심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왕하21:11-15). 이사야는 환상의 골짜기에서 그 장면까지를 바라보고서 동족들을 위하여 통곡을 시작하고 있습니다(22:12).

결론적으로, 본문에서 이사야가 강조하고 있는 올바른 하나님신앙은 세 가지입니다;

(1)  전쟁의 승리가 막강한 군비와 전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때에 적군이 패하고 백성들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을 봅니다. 가옥을 허물어서 그 자재를 가지고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을 살리고 돌보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생의 목적이며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3)  예루살렘 성내로 물을 끌어들이는 지하수로 공사를 완공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재능과 능력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저수지를 만들어놓으셨다는 창조의 사실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인간의 능력의 한계와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의 차이를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올바른 하나님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그와 같은 올바른 신앙을 지니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