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99강(사22:12-14)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9월 18일(금)
환상의 골짜기의 네 번째 교훈; 한 세상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대한 강력한 경고(사22:12-14)
사람이 죽기까지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악이 무엇일까요? 특히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셔서 살 길을 열어주고 계시는 인자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조차(출33:19) 가장 용서하기 힘든 사람의 잘못이 무엇일까요? 이제 그 질문에 대하여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보고 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며 가히 골짜기 환상의 절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비록 짤막한 구절이지만 한 대목씩 살펴보면서 깊은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날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통곡하며 애곡하며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 하셨거늘”(사22:12); 제사장나라가 이방나라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영적인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는 미래가 그러합니다. 스스로 거룩한 백성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애쓴 결과가 그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힘과 꾀를 숭상한 모든 사람이 맞이하고 있는 인생의 종말이며 동시에 그러한 나라와 민족이 맞이하고 있는 역사적인 종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환상의 골짜기에서 그와 같은 인생의 결말과 역사의 종말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한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와 같은 미래를 깨닫게 된 자는 이제부터 그 미래의 참혹함에 대하여 통곡하며 애곡하라는 것입니다”(사22:12ab).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자신과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그 불길 속에서 영원히 고통 당할 것을 생각하니 통곡과 애곡만으로도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고서”(사22:12c) 하나님께 죄를 청하기 위하여 나아가야만 합니다. 석고대죄(席藁待罪, 머리를 풀고 흰옷을 입고서 바깥에 꿇어 앉아 죄를 청하는 것)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의 모습이 니느웨 왕과 백성들의 모습과 같습니다(욘3:4-10). 훗날 예수님은 선민들에게 그렇게 회개한 니느웨 백성들을 본 받으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마12:41).
둘째로,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22:13); 그런데 그와 같은 애통함과 석고대죄를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 이유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한번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허무주의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죽고 나면 그만인 세상이니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 실컷 먹고 마시고 쾌락을 누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그러합니다. 그와 같은 세상에 훗날 그리스도가 오셔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눅16:4-8).
그 의미를 간추려보자면 첫째, 사람들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하는 임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평소 자신의 임무를 게을리 한 종이 직분을 빼앗길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 궁리가 바로 주인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내쳐지더라도 그들 채무자들이 자신을 살려줄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넷째, 어이가 없게도 주인이 그 옳지 않아 보이는 청지기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섯째,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진 사람들의 빚은 탕감해주는 것이 하나님 청지기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 천국의 자녀들도 부러워하는 일이라는 설명입니다.
훗날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설명을 듣고 보면, 한 평생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일이 아닙니다. 사명감당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하지 못한 인생을 사는 부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지도 차제에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富饒, 많고 넉넉함)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12:19-21).
셋째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친히 내 귀에 들려 이르시되,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22:14);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사람이 자신의 죽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 죄악이 바로 영생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종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저 한평생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쾌락을 누리며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현세주의 사상입니다.
현세주의자에게는 내세가 없으며 죽음 다음의 세계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창조주가 별로 필요하지가 않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이 땅에서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자신의 우상이며 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자신들의 행태에 대하여 그것을 천박한 현세주의, 배금주의, 또는 향락지상주의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하며 질책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귀담아 들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의 쾌락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하고 있는 현세주의자를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장치가 필요합니다; “첫째, 죽음 다음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영혼이 그곳에서 영원한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처벌이냐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둘째,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악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회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계시하고 있는 말씀 그대로 죽음으로 사죄를 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죽어야만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가 전자에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그것이라고 3년 6개월 공생애 기간 동안에 끊임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한 대목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그러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다음으로 후자와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대신 속죄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대속의 십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용서를 회개의 눈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거듭난 삶이 열리게 됩니다(롬6:4-14). 그리스도의 제자로 남은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간 다음에는 천국에서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다음과 같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17:1-3). 이미 죽은 구약의 인물 모세와 엘리야도 죽음의 잠에서 깨어 구원주 그리스도를 천국에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죽음 다음에 부활하여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현세주의 및 향락주의 사고방식입니다. 그 이유는 내세를 부정하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허무주의 사고방식이 권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질적인 인간관계를 만연시키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고 있습니다(사22:13).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의 골짜기’에서 바라보고 있는 마지막 광경이 그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일관하고 있던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죽음과 나라의 역사적인 종말로서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는 불신앙의 모습이라고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일깨워주시고 있습니다(사22:14).
따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동족인 선민들에게 이제는 비참한 종말이 예정되어 있으니 통곡하며 애곡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처럼 자기 머리 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고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자고 제의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부르짖음은 훗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사죄하는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가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로써 내세와 천국이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주의 사고방식이야말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가장 큰 불신앙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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