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OBS교재(손진길 작성)

욥기 제7과(손진길 작성)

손진길 2021. 6. 26. 08:51

욥기 제 7(2:7-3:1)(손진길 작성)

|OBS12-7|

 

Q1.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2:7)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실들은 무엇인가?

 

Ø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알게 되면 욥의 아내의 조언(2:9)에 동감하게 될 것임. 명줄만 붙여놓고 욥의 뼈와 살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이미 사단에게 주어져버렸슴(2:5-6) 전신악창의 발생으로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형편임(2:8) 그래도 시험(test)이 끝나지 않아서 고통을 멈추게 하는 죽음이나 이를 경감시켜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무한 상태임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고문을 견디어 가면서 시험을 계속 치루는 것보다는 give up(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 2:9) 하는 것이 자신에게나 보는 사람(아내)에게나 훨씬 좋을 것이라는 조언이 설득력을 가지는 정황인 것임.

Ø  그렇지만 배은망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받은 복과 이 같은 현재의 재앙을 비교하면서 그래도 복을 많이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게 여기는 욥의 신앙의 경지는(2:10) 인간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

Ø  남은 문제는 이와 같은 욥의 신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성적으로 복과 재앙을 함께 따질 줄 아는 (일종의 benefit and cost analysis) 인격적 신념 체계의 소산인지 아니면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최상의 인생의 가치요 목표임을 깨달아서 이를 얻기 위한 복음적 인내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되는 것임(이것이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밝혀져야할 이슈가 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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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2. 자녀가 모두 죽고 재산이 모두 사라졌을 뿐아니라 온 몸에 악창 투성이가 된 욥이지만 그래도 동방 사람중에 가장 큰 자(1:3)이며 흠 잡을데 없는 신앙인이요 인격자임을(순전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함, 1:1, 2:9-10) 욥은 어떻게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는가?

 

Ø  동방 사람중에 가장 큰 자(1:3)라는 칭찬이 가장 재산이 많고 위세가 당당하다는 뜻만이 아니었슴을 알 수 있슴. 왜냐 하면, 세상적인 존재는 몸에 힘이 넘치고 자식들이 출세를 하고 재력이 엄청난 자를 의미하겠지만 흠 잡을 데 없는 하나님 경외자인 욥은 위의 세상적인 큰 자의 성립 요소 세 가지(3박자)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인격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것임.

Ø  첫째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재앙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미친 것이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1:5)하는 심정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재 위에 앉아 있는 것임(2:8). 이는 자신을 돌아 보며 사회적, 종교적 관례를 따르고 있는 석고 대죄의 모습인 것임.

Ø  둘째로, 남편의 참상을 보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아내가 부르짖는 독한 말에(2:9) 대하여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라고 응대하고 있는 것임. 왜냐 하면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이다라는 인격적 모독이 아니라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에 불과하다는 누그러뜨린 간접 화법이 아내를 포용하며 다둑거리는 욥의 인격적인 마음 씀씀이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임.

Ø  셋째로,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뇨(2:10)라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기 마음을 다잡고 있는 욥이기에 사회적, 인간적으로 볼 때 무결점의 신앙인(순전을 굳게 지키며 끝까지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 2:9-10)의 철저한 자기관리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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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3. 이와 같은 욥의 경우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3:1, 1:7, 4:10, 1:9) 비교해보면 어떠한가?

 

Ø  복음의 사도로 평생 헌신하기 위하여 결혼하지 아니한 채 아내도 자식도 없이 자기 재산을 써가며 오로지 이방 선교에 평생을 헌신한 끝에 노년에 이르러 드디어 매맞고 감옥살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고후11:23-33, 1:9) 욥의 경우와 너무나 닮아 있는 것임.

Ø  그렇지만 가장 큰 차이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것은 욥이 내가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고 흠없는 인격자요 신앙인으로 우뚝 서 있으면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과 진심을 알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비해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을 잡아 죽인 나같은 괴수를 그래도 사랑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 그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평생을 바쳐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헌신하고서 마침내 천국의 시민으로 입성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부끄럽지 아니하게 서는 것임을 신앙고백하고 있다는 것임(3:8-9, 3:6-14).

Ø  요컨대, 욥이 구약적 모습의 의인이요 율법적 완전자의 모습이라면 바울은 회개하여 복음 인생을 사는 영생을 소유한 신약적 기독교인(하나님의 자녀요 사도임)의 모습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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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4. 욥의 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2:11)의 고향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Ø  엘리바스의 고향인 데만의 지명은 본래 에서의 손자인 데만(36:11)에서 유래되었으므로 그 지역이 에돔의 영역에 속해 있었슴을 알 수 있슴. 욥이 호리 족장 디산의 아들 우스(36:28)가 개척한 동방 사람의 땅(1:3)에 살고 있었다고 본다면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우스 땅의 욥은 다같이 에돔의 영역(사해 동남부 아라바 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웃 친구가 되는 것임.

Ø  빌닷의 고향인 수아의 지명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25:1)가 낳은 6아들 중 막내인 수아 (25:2) 유산을 받아 동방으로 가서 개척한 지역(25:6)을 의미하고 있슴. 그러므로 이는 요르단 땅 가운데 에돔 땅에 가까운 지명일 가능성이 큰 것임.

Ø  소발의 고향인 나아마는 에덴 동편 놋 땅으로 쫓겨난 가인의(4:16) 5대손인 라멕의 딸 나아마(4:22)의 이름에서 유래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가인의 후손 가운데 딸로서는 나아마의 이름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임.

Ø  여기서 데만, 수아, 그리고 나아마 등 세 지역의 공통점은 에돔 지역이거나 이와 인접한 지역으로서 가나안에서 바라볼 때 동방 사람의 땅이(1:3) 되고 있다는 것임.

Ø  그 차이점은 데만은 에서 자손의 땅이며 수아는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 자손의 땅이고 나아마는 가인의 후손인 유일한 딸의 이름 나아마를 기념하는 땅이라는 것임.

Ø  그러므로 욥을 문병하기 위하여 찾아 온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에서의 하나님, 그두라의 하나님, 가인의 하나님을 각각 섬기는 자들로서 이들의 하나님 신앙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방백으로 우뚝 선(23:6) 아브라함 신앙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동방 사람 욥의 신앙관을 시험(test)하기 위한 시험 문제지 역할을 여기서 하고있는 것임.

Ø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신앙관이 정통성을 가지는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신앙이 아니며 여기에서 이탈된 동방 사람들(에서, 아브라함의 서자들, 가인의 후예 등)의 것이라는 데 있슴. 이 것을 가지고 신비한 족속인 호리 족속의 방백 또는 셈족의 막내 집안의 정통성을 지니는 욥의 신앙을 test하고 있으므로 어느 것이 인간적인 논리인지 어느 것이 하나님의 시각인지 구별이 쉽지아니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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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소문으로만 듣던 욥의 재앙과 참상의 결과를 실제로 방문하여 목도하게 된 세 친구의 반응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참혹함임을 알 수 있는가?

 

Ø  눈을 들어 멀리서 보았을 때 그 모습이 너무나 달라져 있어 옛 날 친구 그 욥인지 알아채기가 어려웠슴(2:12).

Ø  제 삼자인 친구 사이이지만 욥의 형편과 당한 재앙의 결과가 너무 비통하여 세 친구는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뿌리고 욥과 함께 땅에 앉아 칠 주야를 함께 지내는 도리밖에 없었슴(2:12-13).

Ø  칠 주야동안 함께 지냈으나 인간의 말로서는 도무지 위로할 방도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혀서 한 말도 입을 뗄 수 있는 자가 없었슴(2:13후반).

Ø  그래서 일 주일이 지난 후에 오히려 참혹함을 당한 욥 자신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했다는 것임(3:1, 14:21). 이는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닮아 있으며 욥의 경우 세상적, 육체적 고통 뿐아니라 영적, 정신적 고통 또한 유다처럼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극한의 지경에 이르러 있슴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는 것임(27:3-5).

Ø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저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을 현실로 맞이한다면 누구나 하늘을 원망하고 목숨을 걸고서 최후의 악다구니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임. 위로자도 여기에 동참할 수 밖에 없을 것임.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일주일 동안 욥과 세 친구는 이 마지막 절규를 초인적 인내로써 참으며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신학적, 종교적, 사상적 대 논쟁을 시작하는 것임.

Ø  화려한 인간의 수사력과 표현력 가운데 숨어있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을 바라볼 때 욥이 당한 참상은 인간의 말이나 동정심만으로서는 결코 위로가 되지 아니하는 절대절명의 상실감과 인생의 허무함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임. 그런데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부터 가장 찬란한 깨달음의 경지가 창조주의 임재로 말미암아(42:3-17, 3:15-19, 32:32, 23:34, 22:18, 50:20) 펼쳐지고 있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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