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제 7과(2:7-3:1)(손진길 작성)
|OBS12-7|
Q1.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2:7) 말씀에서 알 수 있는 사실들은 무엇인가?
Ø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사실을 알게 되면 욥의 아내의 조언(2:9)에 동감하게 될 것임. ① 명줄만 붙여놓고 욥의 뼈와 살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이미 사단에게 주어져버렸슴(2:5-6) ② 전신악창의 발생으로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며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형편임(2:8) ③ 그래도 시험(test)이 끝나지 않아서 고통을 멈추게 하는 죽음이나 이를 경감시켜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전무한 상태임 ④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고문을 견디어 가면서 시험을 계속 치루는 것보다는 ‘give up’(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 2:9) 하는 것이 자신에게나 보는 사람(아내)에게나 훨씬 좋을 것이라는 조언이 설득력을 가지는 정황인 것임.
Ø 그렇지만 배은망덕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받은 복과 이 같은 현재의 재앙을 비교하면서 그래도 복을 많이 주신 하나님을 감사하게 여기는 욥의 신앙의 경지는(2:10) 인간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
Ø 남은 문제는 이와 같은 욥의 신앙이 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성적으로 ‘복과 재앙’을 함께 따질 줄 아는 (일종의 benefit and cost analysis) 인격적 신념 체계의 소산인지 아니면 ② 하나님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이 최상의 인생의 가치요 목표임을 깨달아서 이를 얻기 위한 복음적 인내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되는 것임(이것이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밝혀져야할 이슈가 되는 것임).
………………………………………………………………………………………………………………………………………………………………………………………………………………………………………………………………………………………………..
Q2. 자녀가 모두 죽고 재산이 모두 사라졌을 뿐아니라 온 몸에 악창 투성이가 된 욥이지만 그래도 ‘동방 사람중에 가장 큰 자’(1:3)이며 흠 잡을데 없는 신앙인이요 인격자임을(순전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함, 1:1, 2:9-10) 욥은 어떻게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는가?
Ø ‘동방 사람중에 가장 큰 자’(1:3)라는 칭찬이 가장 재산이 많고 위세가 당당하다는 뜻만이 아니었슴을 알 수 있슴. 왜냐 하면, 세상적인 존재는 ① 몸에 힘이 넘치고 ② 자식들이 출세를 하고 ③ 재력이 엄청난 자를 의미하겠지만 흠 잡을 데 없는 하나님 경외자인 욥은 위의 세상적인 큰 자의 성립 요소 세 가지(3박자)가 모두 사라졌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인격적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인 것임.
Ø 첫째로,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와 같은 재앙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미친 것이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1:5)하는 심정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재 위에 앉아 있는 것임(2:8). 이는 자신을 돌아 보며 사회적, 종교적 관례를 따르고 있는 석고 대죄의 모습인 것임.
Ø 둘째로, 남편의 참상을 보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아내가 부르짖는 독한 말에(2:9) 대하여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라고 응대하고 있는 것임. 왜냐 하면 ‘그대는 어리석은 여자이다’라는 인격적 모독이 아니라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에 불과하다’는 누그러뜨린 간접 화법이 아내를 포용하며 다둑거리는 욥의 인격적인 마음 씀씀이를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임.
Ø 셋째로,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뇨’(2:10)라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자기 마음을 다잡고 있는 욥이기에 사회적, 인간적으로 볼 때 무결점의 신앙인(순전을 굳게 지키며 끝까지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하는 자, 2:9-10)의 철저한 자기관리의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임.
……………………………………………………………………………………………………………………………………………………………………………………………………………………………………………………………………………………………….
Q3. 이와 같은 욥의 경우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을(엡3:1, 빌1:7, 골4:10, 몬1:9) 비교해보면 어떠한가?
Ø 복음의 사도로 평생 헌신하기 위하여 결혼하지 아니한 채 아내도 자식도 없이 자기 재산을 써가며 오로지 이방 선교에 평생을 헌신한 끝에 노년에 이르러 드디어 매맞고 감옥살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고후11:23-33, 몬1:9) 욥의 경우와 너무나 닮아 있는 것임.
Ø 그렇지만 가장 큰 차이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것은 욥이 ‘내가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고 흠없는 인격자요 신앙인으로 우뚝 서 있으면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과 진심을 알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 비해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을 잡아 죽인 나같은 괴수를 그래도 사랑하여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여 주신 하나님. 그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평생을 바쳐 만민구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헌신하고서 마침내 천국의 시민으로 입성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 부끄럽지 아니하게 서는 것’임을 신앙고백하고 있다는 것임(엡3:8-9, 빌3:6-14).
Ø 요컨대, 욥이 구약적 모습의 의인이요 율법적 완전자의 모습이라면 바울은 회개하여 복음 인생을 사는 영생을 소유한 신약적 기독교인(하나님의 자녀요 사도임)의 모습인 것임.
………………………………………………………………………………………………………………………………………………………………………………………………………………………………………………………………………………………………
Q4. 욥의 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나아마 사람 소발(2:11)의 고향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Ø 엘리바스의 고향인 ‘데만’의 지명은 본래 에서의 손자인 ‘데만’(창36:11)에서 유래되었으므로 그 지역이 에돔의 영역에 속해 있었슴을 알 수 있슴. 욥이 호리 족장 디산의 아들 ‘우스’(창36:28)가 개척한 동방 사람의 땅(1:3)에 살고 있었다고 본다면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우스 땅의 욥은 다같이 에돔의 영역(사해 동남부 아라바 지역)에 살고 있었던 이웃 친구가 되는 것임.
Ø 빌닷의 고향인 ‘수아’의 지명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창25:1)가 낳은 6아들 중 막내인 ‘수아’가 (창25:2) 유산을 받아 동방으로 가서 개척한 지역(창25:6)을 의미하고 있슴. 그러므로 이는 요르단 땅 가운데 에돔 땅에 가까운 지명일 가능성이 큰 것임.
Ø 소발의 고향인 ‘나아마’는 에덴 동편 놋 땅으로 쫓겨난 가인의(창4:16) 5대손인 ‘라멕’의 딸 ‘나아마’(창4:22)의 이름에서 유래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가인의 후손 가운데 딸로서는 나아마의 이름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임.
Ø 여기서 데만, 수아, 그리고 나아마 등 세 지역의 공통점은 에돔 지역이거나 이와 인접한 지역으로서 가나안에서 바라볼 때 동방 사람의 땅이(1:3) 되고 있다는 것임.
Ø 그 차이점은 ① 데만은 에서 자손의 땅이며 ② 수아는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 자손의 땅이고 ③ 나아마는 가인의 후손인 유일한 딸의 이름 ‘나아마’를 기념하는 땅이라는 것임.
Ø 그러므로 욥을 문병하기 위하여 찾아 온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는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① 에서의 하나님, ② 그두라의 하나님, ③ 가인의 하나님을 각각 섬기는 자들로서 이들의 하나님 신앙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방백으로 우뚝 선(창23:6) 아브라함 신앙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동방 사람 욥의 신앙관을 시험(test)하기 위한 시험 문제지 역할을 여기서 하고있는 것임.
Ø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신앙관이 정통성을 가지는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신앙이 아니며 여기에서 이탈된 동방 사람들(에서, 아브라함의 서자들, 가인의 후예 등)의 것이라는 데 있슴. 이 것을 가지고 신비한 족속인 호리 족속의 방백 또는 셈족의 막내 집안의 정통성을 지니는 욥의 신앙을 test하고 있으므로 어느 것이 인간적인 논리인지 어느 것이 하나님의 시각인지 구별이 쉽지아니한 것임.
………………………………………………………………………………………………………………………………………………………………………………………………………………………………………………………………………………………………
Q5. 소문으로만 듣던 욥의 재앙과 참상의 결과를 실제로 방문하여 목도하게 된 세 친구의 반응으로 보아 어느 정도의 참혹함임을 알 수 있는가?
Ø 눈을 들어 멀리서 보았을 때 그 모습이 너무나 달라져 있어 옛 날 친구 그 욥인지 알아채기가 어려웠슴(2:12).
Ø 제 삼자인 친구 사이이지만 욥의 형편과 당한 재앙의 결과가 너무 비통하여 세 친구는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뿌리고 욥과 함께 땅에 앉아 칠 주야를 함께 지내는 도리밖에 없었슴(2:12-13).
Ø 칠 주야동안 함께 지냈으나 인간의 말로서는 도무지 위로할 방도가 없을 정도로 기가 막혀서 한 말도 입을 뗄 수 있는 자가 없었슴(2:13후반).
Ø 그래서 일 주일이 지난 후에 오히려 참혹함을 당한 욥 자신이 먼저 입을 열어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했다’는 것임(3:1, 막14:21). 이는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닮아 있으며 욥의 경우 세상적, 육체적 고통 뿐아니라 영적, 정신적 고통 또한 유다처럼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극한의 지경에 이르러 있슴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는 것임(마27:3-5).
Ø 가룟 유다처럼 자신의 타고난 운명을 저주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는 참혹한 상황을 현실로 맞이한다면 누구나 하늘을 원망하고 목숨을 걸고서 최후의 악다구니를 할 수 밖에 없을 것임. 위로자도 여기에 동참할 수 밖에 없을 것임.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일주일 동안 욥과 세 친구는 이 마지막 절규를 초인적 인내로써 참으며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하여 신학적, 종교적, 사상적 대 논쟁을 시작하는 것임.
Ø 화려한 인간의 수사력과 표현력 가운데 숨어있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을 바라볼 때 욥이 당한 참상은 인간의 말이나 동정심만으로서는 결코 위로가 되지 아니하는 절대절명의 상실감과 인생의 허무함인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임. 그런데 역설적으로 여기에서 부터 가장 찬란한 깨달음의 경지가 창조주의 임재로 말미암아(욥42:3-17, 합3:15-19, 출32:32, 눅23:34, 창22:18, 50:20) 펼쳐지고 있는 것임.
………………………………………………………………………………………………………………………………………………………………………………………………………………………………………………………………………………………………
'욥기 OBS교재(손진길 작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욥기 제9과(손진길 작성) (0) | 2021.06.27 |
---|---|
욥기 제8과(손진길 작성) (0) | 2021.06.26 |
욥기 제6과(손진길 작성) (0) | 2021.06.25 |
욥기 제5과(손진길 작성) (0) | 2021.06.25 |
욥기 제4과(손진길 작성) (0) | 2021.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