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4강(사5:7a)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5일(주일)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이라”(사5:7a)는 말씀 속에 들어있는 사상은 무엇인가?
선지자 이사야의 본문 명제는 깊은 묵상의 실마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사야가 ‘포도원’의 개념을 ‘이스라엘 족속’으로 단정하고 있는데 그것이 훗날 예수님에 의하여 ‘온 세상 족속’으로 확대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소위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마21:33-43) 한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 주인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사야는 ‘포도나무’가 바로 ‘유다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도 예수님에 의하여 달리 규정이 되고 있습니다; “나는(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창조주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라”(요15:1). 그와 같은 개념의 확대나 변화가 왜 발생하고 있는지 이제부터 한번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사야는 남조 유다 왕국 출신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아니고 다윗 왕가가 다스리고 있는 조국 남조 유다 왕국이 진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들의 나라라고 하는 선민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생존기간 동안에 앗수르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다윗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과 남조 유다 왕국을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경험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포도원’과 ‘포도나무’의 개념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포도원’이 사라지더라도 ‘포도나무’를 잘 살리면 다시 ‘포도원’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하는 의식이 이사야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의 조국 유다 왕국의 백성뿐만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에게도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를 받은 당시에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아직 역사적으로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때가 유다 왕 웃시야가 죽던 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사6:1). 그때는 주전 740년경입니다. 즉,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하여 주전 722년에 멸망을 당하기 18년 전쯤입니다. 그러한 시점이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이사야의 조국인 남조 유다 왕국뿐만 아니라 역시 형제국가인 북조 이스라엘 왕국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사6:9)이라고 언급을 하실 때에 ‘이 백성’ 가운데에는 남조 유다 왕국의 백성뿐만 아니라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도 당연히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그런데 이사야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크게 전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신에 그가 얻은 계시는 오로지 그의 조국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과 그 백성들에 대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사1: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사2:1).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전하지 아니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사야가 지니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남조 유다 왕국에 대한 관념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의 ‘포도원과 포도나무’ 개념과 관련하여 먼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다윗과 솔로몬의 제국에서 함께 영화를 누리다가 다음 왕 르호보암이 즉위하자 그만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왕상12:17-20, 대하10:16-19). 그때가 주전 930년경입니다. 통상 북쪽의 열 지파가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속하고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가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왕상11:30-32, 12:21). 하지만 베냐민 지파의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사실은 유다 지파가 곧 유다 왕국의 백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의 역사서가 다음과 같이 이중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유다 지파)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왕상12:16),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유다, 베냐민, 레위 등)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왕상12:17). 더 명확한 표현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왕상12:20).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보라 하고 온 이스라엘이 그들의 장막으로 돌아가니라”(대하10:16).
(2) 그 옛날 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가 다른 열한 지파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전쟁을 하여 겨우 장정 600명만 남고 몰살을 당한 비참한 역사를(삿20:47)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가 워낙 적은 베냐민 지파를 계수하지 아니하고 또한 다른 열한 지파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레위 지파를 수로 계산하지 아니한다고 하면 지파수의 명분에 있어서는 북조와 남조를 ‘십대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사야에게 주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 가운데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사6:13a)라고 하는 언급을 남조 유다 왕국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받은 계시 가운데에는 이미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을 당하고 남조 유다 왕국이 겨우 살아남게 된다고 하는 당면한 미래지사가 생생하게 포함이 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곧 멸망을 당하게 되는 북조 이스라엘 대신에 남조 유다라도 잘 살려서 하나님신앙을 새롭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판단이 앞서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그와 같은 판단이 이사야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만이 고수하고 있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개창자인 여로보암의 죄를 논하고 있습니다(왕상12:28-33, 왕하15:28-29). 모든 후대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 우상정책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하나님신앙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났으며 결국 왕국이 망했다는 입장입니다(왕하17:16-18). 그것은 나중에 유대인이 곧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사고와 직결이 되고 있는 좁은 소견의 선민사상입니다.
(4) 그와 같은 입장은 인구증가의 측면에서 현실적인 설명력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지파가 열두 지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수가 크게 증가하여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18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왕상12:21)라고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북쪽 열 지파와 한판 전쟁을 벌여볼 수 있는 군대의 규모입니다. 그 만큼 유다 지파가 욱일승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고 나자 남조 유다 왕국이 다윗 왕가와 유다 지파의 정통성을 크게 내세우고 있는 것도 현실적으로는 무리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이 그 땅에 오시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이사야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회에 오셔서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전하고 있는 ‘포도원 및 포도나무의 비유’와 달리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이고 ‘포도나무’가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소위 예수님의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3)와 ‘포도나무 비유’(요15:1-8)가 그것입니다;
(1) 예수님의 말씀은 ‘포도원’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입니다(마21:33). 그리고 선민들이 농부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경영하고 그 열매를 하나님께 바쳐야만 하는 자들입니다(마21:34). 그런데 그들이 주인을 제거하고 그 포도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획책하고 있습니다(마21:38). 그것이 삐뚤어진 유대교의 선민사상입니다. 그와 같은 범행을 말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아들까지 보내지만 모두 해치고 맙니다. 그 결과 그들이 처벌을 당하고 세상의 경영권이 이방으로 넘어가게 됩니다(마21:40-43).
(2) 예수님이 스스로 ‘참 포도나무’가 되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포도원의 농부’가 되시고 있습니다(요15:1). 여기서 ‘참 포도나무’가 등장을 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포도나무라고 하는 가설을 뒤집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에 의하여 선민사상이 진리가 아니며 허위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는 대목입니다. 다음으로, 다윗 왕조의 정통성이 부인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 왕조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포도원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명백하게 “내 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라”(요15:1)고 선언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선민사상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그 대신에 만민구원사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선지자 이사야가 선민 다윗 왕조와 유다 왕국의 백성들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역사적으로 멸망을 당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전하기 위하여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다윗 왕조와 유다의 정통성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으며 그가 받은 하나님의 계시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폭이 좁은 선민사상의 일환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본연의 뜻을 온전하게 이 세상에 드러낸 완전한 계시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사야의 ‘포도원과 포도나무’의 개념규정과 예수님의 정의규정을 대조해보면 그와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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