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 제25강(사5:7b)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년 7월 6일(월)
“그들(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사람)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b)는 이사야의 진단과 처방 그리고 포도원 농부의 잘못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과 처방의 차이(마21:33-43).
선지자 이사야가 말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고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포도나무는 유다 사람입니다(사5:7a). 이스라엘 족속은 통상 12지파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규정하고 있는 포도원에는 12그루의 포도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포도원과 그 포도나무가 주인의 기대를 크게 어그러뜨리고 있습니다. 주인이 기대한 정의사회를 실현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취지라고 볼 수 있는 공의의 실천을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사장나라 거룩한 사회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하고 있던 시대에 두 가지의 심판이 그 포도원에 발생합니다; 첫째,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북조 이스라엘 왕국 곧 남조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열 지파가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둘째, 주전 701년에 앗수르 군대에 의하여 다윗 왕조의 남조 유다 왕국마저 전국이 유린을 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왕도인 예루살렘 성만이 장기간 포위를 당한 채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 쉬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포도나무 곧 다윗의 왕가가 다스리고 있는 유다 지파가 멸망을 당하기 일보직전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다윗 왕조의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신위적인 구원을 얻게 됩니다. 히스기야 왕과 신하들이 뒤늦게 성전으로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부디 살려달라고 매어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왕과 신하들이 겸손하게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에게 중보의 기도를 부탁한 결과입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하룻밤에 앗수르의 군사 18만 5천명을 몰살시키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을 구원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70년 전쯤 이방 땅 니느웨 성에서 발생한 사건을 다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선지자 요나의 글을 살펴보면, 북조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2세 때 변방 갈릴리의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의 예언을 듣고서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일시에 회개를 합니다. 그러자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의 멸망계획을 철회하신 것입니다. 선민사상을 지니고 있는 선지자 요나의 생각으로는 악한 이방인은 모두 철저하게 심판과 멸망의 대상입니다. 그들에게 용서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선민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동일한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10-11).
그 옛날 니느웨에서 발생한 하나님의 역사를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다시 보게 됩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의 변함없는 역사가 다시 임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회개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서 선민의 회개에 대하여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실 이유가 전혀 없다고 하겠습니다. 훗날 그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롬11:24). 악한 이방인들도 회개하면 예수님의 제자로 삼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이신데 선민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는 언급인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 주전 701년에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하심을 경험했던 다윗 왕조의 유다 왕국이 115년 후에 신바벨론 느부갓네살 황제의 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전 538년경 신바벨론을 무너뜨린 페르샤 고레스 황제의 배려로 일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제2성전을 건축하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또 주후 70년에는 로마군대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대목에 대한 이사야의 예리한 지적이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b).
여기서 ‘정의’(justice)는 사람의 사회나 법정에서 옳다고 선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집단이기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회에서 옳다고 하는 관념이 다른 사회에서 꼭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 옳은 것이 다른 나라에 대해서 꼭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극단적이 예를 들어보면,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가 그러한 것입니다. 한국사람에게 있어서 그는 민족주의자이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자신을 희생한 열사이며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일본사람의 입장에서는 정반대의 평가가 나올 수 있습니다. 명치유신의 마지막 원로이며 유능한 정치인 이또오 히로부미를 숭배하고 있는 일본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를 암살한 안중근이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일개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의’는 서로가 전쟁을 하면서 내세우고 있는 명분이기도 합니다. 이웃한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이면서 서로 ‘정의의 군대’라고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모순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the righteousness of God)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천하만물과 모든 생명체는 모두 똑 같습니다. 마치 부모에게 있어서 열 자식이 모두 사랑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속하고 있는 사회나 국가의 정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좁은 소견이며 어리석은 주장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들의 시공간적인 제약성과 그에 따른 좁은 사랑 그리고 이기적인 주의주장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나 국가에 있어서라도 우선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국가적으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옛날 가나안 원주민인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차고 넘쳐서 그 땅에서 쫓겨났듯이(창15:16) 선민들의 사회와 국가가 그러합니다(왕하21:11, 사5:7). 그 결과 포도나무가 뽑히고 포도원이 황폐화되고 맙니다(사5:5-6). 역사적으로, 북조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남조 다윗 왕가의 유다 왕국의 멸망이 그러합니다.
유민들이 고토로 돌아와서 제2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고서 새로운 선민사회를 형성하게 됩니다. 주전 516년에 새로운 성전의 시대가 개막이 됩니다. 이제는 여러 민족과 더불어 살면서 선민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기를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거룩한 백성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의 유대교는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입니다. 외세를 물리치고 그 옛날 다윗 제국의 영광을 시온의 영광으로 재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세상 모든 열방과 주변의 족속들이 모두 선민 유대인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열방을 구원하며 이방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제사장나라 거룩한 백성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까요? 정의사회의 구현도 못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공의의 정신을 실천하라고 부르짖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사회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만민구원사상을 하나님 말씀의 본래 취지라고 강조했다가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와 같은 사회가 형성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론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심령 속에 뿌리를 박고 그리고 영혼 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악한 생각의 원흉인 사탄의 세력을 도려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겉사람과 속사람을 분리할 수가 있을까요? (1) 겉사람을 따르고자 하는 육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2) 동시에 속사람을 강건하게 살려내는 죄 사함과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만 합니다. (3)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성령님의 강림과 내주 역사하심이라는 복음의 시대가 이 세상에 오게 됩니다. (4) 그러한 시대를 바라보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하여 본문에서 운자를 떼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각으로 보면,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5:7b)는 이사야의 지적은 다음과 같이 해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도저히 실천할 수가 없으니 부디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부르짖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포도원과 포도나무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앞으로 더 이상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나아가서 이방인을 구원하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지 못한다고 하여 포도원을 멸망시키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백성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영적인 지도자들과 종교적인 지도자들을 처벌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포도원의 농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의 소위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21:33-43)가 그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포도원의 농부가 된 자들은 믿음을 가지고자 하는 자를 실망시키거나 믿음이 작은 자를 실족시키지 아니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만 합니다. 요컨대, 항상 포도원을 맡기신 주인의 뜻을 헤아리면서 좋은 열매를 생산해내어야만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양들에게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이고 지상명령을 실천하는 예수님의 제자 곧 믿음의 용사들을 양성해내어야만 할 것입니다.
'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사야 강해 제27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5.25 |
---|---|
이사야 강해 제26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5.24 |
이사야 강해 제24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5.24 |
이사야 강해 제23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5.23 |
이사야 강해 제22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0) | 2021.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