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이사야 강해 제21강(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5. 23. 06:05

이사야 강해 제21(4:1-6)

작성자;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작성일; 주후 201571()

 

부끄러운 인생이 거룩한 인생으로 변화가 되자면(4:1-6).

 

대 선지서 이사야 제4장은 단 6절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는 어느 장보다 깊고도 오묘합니다. 그 이유는 심판 가운데 구원을 받고 거룩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서 본문에서 제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인생이 수치를 면하고 구원을 받아 거룩한 인생으로 변화가 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가장 좋은 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복된 소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여호와의 싹이 이 세상에서 움트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4:1-2). 이제 제4장의 말씀을 하나씩 체계적으로 살펴보면서 그 깊은 예언의 뜻을 한번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든지 아니 믿든지 간에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서 그 뜻을 따라 천국의 자녀답게 자신의 인생을 신실하게 살아가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이 세상에서 백 년 안팎의 짧은 인생을 살다가 모두 육체적인 종말을 고하고 마는 것은 똑 같습니다. 그 이유는 다시 태어나서 동일한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새로운 인생을 살아 가고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 문호(文豪) 괴테가 쓴 파우스트라고 하는 소설을 읽어보면, 주인공이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는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그것은 픽션에 역시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 내용이 본문 제1절과 제2절에 다음과 같이 들어 있습니다; “7여자가 자신들의 힘으로 돈을 벌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인생살이에 불과합니다. 심판의 날이 되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지를 못하고 마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 수치를 면하기 위해서 특정한 한 남자를 붙들고서 통사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가 수치를 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 간구를 들으시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싹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 분이 바로 구원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종말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유일하게 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4:1-2’절에 대한 의미적 해석임).

둘째로,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만 부른다고 하여 모두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을까요? 그러하지 아니하다고 하는 사실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제3절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4:3). 풀이를 해보자면, 여기서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하나님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자입니다. 그것은 마치 100년 내외 사용하고 벗어버릴 육체를 영원한 성전으로 삼고서 여전히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성전은 역사적인 심판을 받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24:1-2, 고후5:1). 그 대신에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의 시대가 다가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싹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의 오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예수에게 제자로 보내어 준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6:37-40).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에 비로소 거룩하다 칭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4:3). 그와 같은 의미를 예수님이 오셔서 다음과 같이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19-22).

셋째로,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면 그때부터 육신적인 삶이 아니라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거룩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고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4:3). 그렇다면, 영적인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친절하게도 이사야가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상징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1)  주께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부탁하여 성령을 이 땅에 보내어주십니다(4:4a, 14:16, 26). 성령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며 동시에 주님을 믿는 자들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줄 것입니다(4:4b, 16:7-14). 육신적인 삶이 심판을 받고 그 더러움이 씻겨져 나가야 비로소 영적인 삶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산을 직접 바라보면서 다시 집회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4:5a, 4:21-24). 그것은 그 옛날 모세 시대의 출애굽과 닮아 있지만(19:1-12) 다른 것이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은혜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성도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보호하심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 사실을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4:5bc). 따라서 그 모든 창조의 영광을 뒤덮고 있는 존귀하신 하나님을 재삼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은 한낱 피조물이며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다시 서는 그것이 참된 구원을 얻는 길이며 영적인 삶입니다.

(3)  이사야가 초막생활을 거론하고 있습니다(4:6). 두 가지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그 초막은 초막절에 짓는 것입니다. 한 해의 농사가 끝나면 모든 열매를 갈무리한 다음에 농한기를 맞이합니다. 그때 초막절행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초막을 짓고서 하나님 말씀을 집중적으로 공부합니다. 이사야가 그러한 초막생활이 있어야 거룩한 자녀의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혹시 세상살이에 바빠서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없습니까? 그러시다면, 이제부터 초막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달라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즉시 응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기도의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초막생활을 하는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보호하심과 힘주심이 각별합니다. 구체적으로, 세상의 모든 환난과 풍파에서 보호해주시고 그 그늘 안에서 영적인 삶이 계속 이루어지게 해주신다는 약속이 이사야의 예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똑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4:6).

  결론적으로, 이사야는 세상적으로만 먹고 살던 사람들이 심판의 때에 수치를 면하기 위해서는 한 남자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4:1-2). 그런데 그 이름만 부른다고 하여 거룩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말해주고 있습니다(4:3).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만 합니다(4:4). 그래야 세상적인 더러움과 잘못된 습관을 씻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만 합니다(4:6). 그래야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표적과 기적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 존재하고 계시는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는(4:5) 영적인 믿음의 눈이야 열려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행복감이 깊은 심령 속에서부터 생수같이 터져나올 것입니다(4:14).  그와 같은 구원의 감격을 평생 맛보면서 승리하시는 성도의 삶이 모두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