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룡전13(작성자; 손진길)
아룡은 황궁에 들리게 되면 사월이를 따라가서 서고의 책을 읽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러자 하루는 최우의 저택에서 쉬고 있는 날 사월이 찾아와서 말한다; “아룡아, 너는 쉬는 날 바깥나들이도 하지 않는구나. 그러면 나하고 오늘은 여기 저택에 있는 서고에 가보도록 하자. 쉬는 날 나는 이곳 서고에서 하루를 지낸단다… “.
고마운 말씀이다. 얼른 아룡이 따라나선다. 사월이는 마치 자신이 아룡의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그래서 물어본다; “아룡아, 네 나이가 나하고 동갑이라고 아씨에게서 들었다. 너는 몇 월 생이냐?... “.
아룡은 사월이 사내처럼 씩씩한 것이 그녀가 일찍 무예를 익혀서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친절하게 품안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서 적어준다; “1200년 11월 5일생”.
그것을 보더니 사월이가 신이 나서 말한다; “잘됐다. 역시 내 짐작대로 아룡이 네가 내 동생이 맞다. 이 누나는 2월생이거든. 그러니 이제부터 이 누나를 잘 모셔야 한다. 알겠지, 아룡아!... “.
아룡이 얼떨떨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어버버’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러면서도 종이에 글을 써서 약간의 항의를 한다; “어째서 생월이 4월이 아니고 2월이야? 그것은 반칙인데… “.
그 글을 읽더니 사월이가 웃으면서 말한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 집으로 올 때 아버지가 내 이름 이월이를 사월이로 고쳐 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그 내력을 한번 이야기해줄까?... “.
아룡이 고개를 끄떡이자 사월이의 설명이 다음과 같다; “우리 경주 최씨는 본래 경주 반월성 옆에 살았다. 그러므로 월성 최씨라고도 불린다. 하니 너는 너의 뿌리인 월성을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이제부터 사월(思月)이라고 불러라. 최충헌의 우봉 최씨는 우리 월성 최씨에서 떨어져 나간 한 분파에 지나지 못한다”.
매우 영리한 아룡이가 사월의 이름에 들어 있는 그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크게 끄떡인다. 그 모습을 보더니 사월이가 너무나 좋아한다. 아예 아룡이의 손을 잡고서 계속 흔들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서 아룡이 참으로 안스러운 마음이 든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와 이 집에서 시녀로 양성이 된 그녀이다. 얼마나 고향의 가족이 보고 싶으면 자신과 같은 벙어리를 동생처럼 생각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아룡이 사월의 손을 꼭 쥐어 준다.
아룡은 그날 처음으로 사월을 따라 최우 장군의 저택에 부속되어 있는 서고에 들린다. 생각보다 서적이 많이 비치가 되어 있다. 그때 서고의 입구에 책상을 두고 앉아 있던 40세 가량의 문사가 사월에게 말한다; “오늘은 남자동무를 데리고 왔구나. 사월이도 이제 시집갈 나이가 된 모양이다. 그래 이름이 무엇이냐?... “.
그 말을 듣자 사월이 즉시 대답한다; “필우 아저씨, 여기 아룡이는 벌써 3년째 보령 아가씨를 모시고 있는 가마꾼이며 무사예요. 말은 못하지만 엄청 글에 밝아요. 서적을 읽는 속도가 아저씨보다 아마 빠를 걸요!... “.
그 말을 듣자 문사 필우가 한마디를 한다; “사월이 너는 이제 사부인 나도 막 놀려먹는구나. 여기 고려에서는 나보다 독서속도가 빠른 인물이 없다. 원한다면, 내가 시합을 한번 해보마”. 그 소리를 듣자 아룡이가 ‘어버버’하면서 손을 가로로 흔든다.
그 모습을 보고서 문사 필우가 호쾌하게 웃으면서 말한다; “오늘은 무슨 종류의 서적을 읽으려고 하는가? 어디 내가 골라 줄까?... “. 사월이와 정말 친한 아저씨이며 사부인 필우이다.
그는 과거 10년 동안 인질삼아 고향에서 데리고 온 경주 최씨의 소녀들에게 글을 가르친 스승이 맞다. 지금은 저택에 부속되어 있는 서고를 지키며 최우 장군의 문서를 작성해주고 있는 문사이다. 그래서 보령 아가씨의 시비인 사월에게 있어서는 정말 사부이자 숙부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사월은 사부 격인 필우의 물음에 얼른 한마디를 하고 아룡이의 팔을 끌고서 서고 안으로 들어선다; “괜찮아요. 아저씨는 이따 취객 조하준 아저씨가 오시면 담소나 실컷 나누세요”. 조하준은 소녀들에게 10년 동안 무예를 가르친 스승인데 술을 좋아해서 그 별호가 취객이다.
그날부터 아룡이는 쉬는 날이면 저택에 딸려 있는 서고에 가서 문사 필우에게 인사를 하고 맘대로 서적을 읽게 된다. 때로는 사월이가 먼저 와서 서적을 읽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아룡이와 마주치게 되면 사월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녀는 정말 아룡이를 고향에 두고 온 남동생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아룡이도 사월이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아서 그때부터 그녀를 ‘사월이 누나’라고 마음속으로 인정하면서 잘 대해준다. 그렇게 두사람이 저택 서고에서 서적을 읽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1221년 가을이 된다.
그러자 쓸쓸하게 마당에 떨어지고 있는 낙엽을 보면서 아룡은 자신의 방에서 종이를 꺼내어 붓으로 글을 적는다. 그 내용이 하직인사를 대신하고 있는 글이다. 아룡이 일필휘지의 명필로 문장을 작성하고 있는데 그 글만 보는 사람은 아룡이가 벙어리인 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미천한 저 아룡이를 가마꾼으로 거두어 주시고 지난 3년간 최우 장군님의 저택에서 보령 아가씨를 모시고 다닐 수 있도록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댁을 떠나고자 합니다. 장부의 나이가 22세가 되어가니 저도 독립을 할까 합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룡 올림”.
아룡이 그 편지를 가지고 서기 김호남을 찾아간다. 조용히 ‘사직서’를 제출하자 그가 깜짝 놀란다. 김호남의 생각으로는 벙어리인 아룡은 최우 장군의 집에서 평생 가마꾼으로 살 줄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떠나겠다고 하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김호남이 즉시 물어본다; “아룡아, 너는 어디에 달리 취직한 곳이 있느냐? 이곳 개경에서는 최우 장군님의 집 외에는 가마꾼에게 더 나은 대우를 해주는 곳이 없단다. 웬만하면 이 댁에 그냥 가마꾼으로 사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다… “.
그 말을 듣자 아룡이 미소를 머금고서 다른 종이에 글을 적는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편하게 익숙한 일만 하고 있으면 훗날 후회할 것만 같아서 이제 떠나고자 합니다. 그동안 저를 돌보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호남 아저씨… ”.
그 글을 읽자 서기 김호남이 더 이상 아룡이를 만류하지 못한다. 그의 결심이 단단한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한다; “그렇다면, 하루만 말미를 다오. 내가 윗전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 주마. 다행히 지금 교육을 받고 있는 가마꾼 후보자가 있어서 금방 보충은 될 것이다”.
그런데 서기 김호남이 백부장 무활과 보령 아가씨에게 가마꾼 아룡이 이 집을 떠나겠다고 하는 사직서를 올렸다고 보고를 드리자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반응이 나타난다. 먼저 보령 아가씨가 말한다; “아룡이가 떠나겠다고 하다니요? 그가 어디로 가겠다는 것입니까?... “.
그 말을 듣자 백부장 무활이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말한다; “가마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무예를 더욱 연마하여 이 댁에 호위무사가 되는 것이 꿈인데… 아룡이는 어째서 그러지 않겠다고 하지?... 그 참 알 수가 없는 녀석이구만?... 벙어리라서 그런가?... 말은 없지만 자존심은 있는 녀석이구만... “.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자 서기 김호남이 놀라서 다짜고짜 아룡이를 데리고 직접 해명을 하도록 조치한다. 졸지에 아룡이 백부장 무활과 보령 아가씨 앞에 서게 된다. 그러자 보령이 먼저 질문한다; “아룡아, 나는 지난 3년간 너에게 잘 대해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너는 나를 떠나고자 하느냐?”.
아룡은 자신이 가지고 온 지필묵으로 즉시 답을 한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나이가 벌써 22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 좋은 곳에서 살았기에 이제는 각박한 세상에 나가서 부대끼면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후회가 없는 인생이 될 것만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 문장을 옆에서 함께 읽어본 백부장 무활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아룡이를 쳐다본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한다; “그래, 아룡이 너의 생각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최우 장군님의 댁이다. 그러니 너무 편하고 좋아서 평생 있겠다고들 하는데 그것이 자기발전에는 때로 지장이 되기도 하겠지… 하지만 보령 아가씨가 불편하실 터인데… “.
그런데 뜻밖에도 보령 아가씨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 알겠다. 나는 아룡이 네가 나의 가마채를 쥐고서 든든하게 나를 지금처럼 지켜주면 좋다. 하지만 떠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는 너를 보니 내가 떼를 써서는 안되겠구나. 굳이 떠나겠다고 하면 나도 한가지 조건이 있다… “.
당사자인 아룡이 뿐만 아니라 백부장 무활과 서기 김호남이 모두 귀를 기울인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보령 아가씨의 말이 들려온다; “사월이가 너를 고향의 동생처럼 아끼고 있다. 그러니 이 집을 떠나더라도 아룡이 너는 사월이를 더러 만나서 고향의 누나처럼 여전히 잘 대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줄 수가 있겠느냐?...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내가 허락을 하마 “.
그 말을 듣자 아룡이가 크게 고개를 여러 번 끄떡인다. 그것을 보고서 보령 아가씨가 웃으면서 말한다; “좋다. 사나이 대장부가 동의하였으니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충직한 아룡이 너는 거짓이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믿는다. 이집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내게도 가끔 들러 달라. 때로는 네가 보고 싶어 질 것만 같다… “.
최보령은 자신의 목숨을 위기에서 구해준 아룡이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그를 잘 돌보아주라고 시비 사월이에게 부탁까지 했다. 그런데 아룡이 자기를 떠나겠다고 하니 괜히 서운하다. 특히 사월이가 틈만 나면 아룡이를 동생처럼 여겨서 자신에게 말을 하니 그것이 안스럽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정승 벼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는데...
보령 아가씨가 별도로 서기 김호남에게 말하여 퇴직금을 두둑하게 챙겨준다. 그 돈을 받고서 아룡이가 고려의 최고권력자인 최우의 저택을 떠난다. 그날이 정확하게 1221년 10월 20일이다.
그런데 아룡이 대문을 열고 나오자 이미 그 앞에 사월이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 언제부터 기다린 것일까? 아룡은 순간 고향 파주골에 있는 어머니 생각이 난다. 그래서 얼른 품안에서 지필묵을 꺼내어 한자를 적는다; “누나, 잘 있어. 내가 거처를 마련하는 대로 꼭 연락할 것이야… ”.
그 종이의 글씨를 읽자 그만 사월이가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한다; “나는 아룡이 네가 고향에 두고 온 내 동생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구나. 아룡이 너는 벙어리라는 것만 빼고 나면 이 세상에 가장 멋진 사내가 맞구나!... 내 눈이 결코 틀리지가 않다. 나는 네가 소식을 전할 때까지 반드시 이 댁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평생 소식을 주지 않으면 나는 여기서 늙어 죽을 것이다!… “.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고백이다. 그 말을 듣자 아룡이는 자신의 머리에 철퇴가 내리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얼른 종이에 글을 적는다; “한달만 기다려 줘요. 내가 반드시 연락할 것입니다. 나는 사월이가 나의 누나라도 좋고 나를 기다리는 가장 귀한 여인이라도 좋아요. 나도 사실을 사월이가 보고 싶어요. 언제나… 그래서 사월이의 기대에 어울리는 사내가 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
그 글을 읽자 최사월이 자신의 입술을 꼭 깨문다. 그러면서 말한다; “좋다, 아룡아. 남아일언 중천금이다. 그리고 나의 한마디도 평생의 절개이다. 내가 반드시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 함께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자, 나는 그것이 좋다… “.
그 말을 듣자 아룡이 최사월의 두 손을 잡는다. 그리고 힘껏 포옹한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여인을 포옹한 것이다 .그 상대가 바로 최사월이다. 그 광경을 혼자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눈이 있다. 그녀가 바로 최보령 아가씨이다.
사실 보령 아가씨의 가장 친한 동무가 최사월이다. 같이 자라온 죽마고우와 같다. 그러니 보령이 사월이의 선택에 관심을 두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보령 아가씨가 의아한듯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다; “어째서 사월이 같이 똑똑하고 영리한 처녀가 벙어리인 아룡에게 끌린 것일까? 그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최우 장군의 저택을 떠나온 아룡이 향한 곳이 개경의 서촌이다. 북촌에 있는 귀족들의 동네를 떠나 개경의 중앙통으로 오게 되면 점포들이 줄지어 있다. 그곳을 벗어나 서진하면 청도관이 멀리 보이는 서촌에 백성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나타난다.
그곳에서 아룡이 아담한 집으로 들어간다. 아주 익숙한 걸음이다. 아룡이 벌써 두 달 전에 구입한 집이다. 아룡이 보령 아가씨를 모시는 가마꾼으로 3년 가까이 지내면서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보다 더 큰 돈은 그가 악선의 품안에서 얻은 은괴들이다. 그리고 악선의 부하들 십여명에게서 얻은 은자도 상당하다.
그 은전으로 아룡은 스스로 개경에서 독립할 계획을 세웠다. 최우 장군의 저택에서 먹고 자고 하면 세상을 잘 모를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언제까지나 벙어리로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벌써 열흘 전에 벙어리로 만드는 혈에 시침하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래서 지금은 말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이나 스스로 벙어리가 되어 전혀 말을 하지 아니하였기에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이틀을 뒹굴게 되자 말문이 트인다.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자신이 벙어리신세를 면하게 되었는지 자신을 아는 사람들에게 말할 구실거리도 찾은 것만 같다.
아룡이가 그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 번 개국사를 다녀오다가 산길에서 자객들을 만나 대결하다가 사실은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다. 그때 한 신비인이 나타나서 적들을 물리치고 나를 구해주었다. 그자는 내가 벙어리인 것을 보더니 갑자기 나의 혈도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짚어갔다. 그래서 그런지 점점 말문이 열리기를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그 은인의 이름이 바로 밀선 신비인이다”.
그러한 엉성한 스토리의 아룡의 변명이 개경에서 통할 것인가? 그것은 좀더 지켜보면 알 일이다. 어쨌든 아룡이 스스로 밀선 신비인을 만났다고 말하고 있기에 개경의 무예계에서는 한차례 풍파가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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