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룡전12(작성자; 손진길)
그날 현장감식의 결과 의선은 놀라운 사실을 확인한다. 그래서 그가 중얼거린다; “우리 5선이라고 불리는 자 가운데 이 정도로 가공한 검의 위력을 보이는 자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신비인은 해외에서 들어온 자이다… ”.
일단 그렇게 추정하면서 의선이 놀라운 말을 중얼거린다; “그가 누구인가? 그 무예의 수준이 그 옛날 무신 야율종진왕에게 버금가고 있다. 나머지 3선과 빨리 상의해야 하겠구나. 도대체 누구이기에 단숨에 악선을 해치워버린 것일까? 그는 누구의 의뢰를 받고 무슨 목적으로 고려에 들어온 것일까?... “.
놀라운 일이다. 의선 곽현경이 기타 3선 곧 신선 김경수, 무선 문무익, 그리고 승선 송유철과 자주 접촉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가 그 옛날 종진국의 왕 서우진의 무예의 수준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의선 곽현경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와 별도로, 그후부터 개경에서부터 하나의 소문이 무예계에 널리 퍼지게 된다; “이제 악선 귀면탈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신비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별호가 이제는 ‘밀선’이다.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으니 ‘밀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호사가들의 입을 통하여 그 다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밀선의 무예가 나머지 4선보다 더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5선의 서열도 달라져야 한다. 차제에 ‘5강’의 서열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
무예계에 회자하고 있는 ‘5강’은 또 누구인가? 그와 같은 소문이 입에서 입을 통하여 가마꾼인 장무의 귀에까지 들리고 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장무가 또 관창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 귀한 정보가 고스란히 같은 가마를 운반하고 있는 조룡과 아룡 그리고 유장의 귀에 들어온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 “5강은 5선 다음으로 고려의 무예계에서 강한 무사들이다. 그 이름이 궁중의 무사장인 이견, 최우의 사병을 지휘하고 있는 무활과 김준, 그리고 충주의 사찰에 근거를 두고 있는 승병장 김윤휴와 개경의 거지떼의 두목인 기강태이다. 그들의 무예를 서로 비교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서열을 함부로 정할 수는 없다”.
참으로 흥미가 있는 이야기를 아룡이 공짜로 주워듣고 있다. 이제는 아룡도 고려의 무예계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다. 아니 사실은 누구보다 더 정확하게 그들의 무예의 근원을 이해하고 있다. 과거 종진국의 건설자인 대 영웅 서우진으로부터 흘러오고 있는 무예계의 족보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흘린 흔적 때문에 절대강자인 ‘5선’에 자신이 신비인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소문까지 간접적으로 듣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할 일은 따로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아룡은 한적한 곳을 찾아가서 자신이 수집한 책을 읽어본다. 그 제목이 하나는 악선의 책 ‘신검과 귀검’이고 또 하나는 그의 부하의 안주머니에서 얻은 일종의 ‘비망록’이다.
며칠간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아룡이 깜짝 놀라고 있다. 그 이유는 악선의 부하에게서 얻은 그 비망록에 서우진왕의 내공심법과 창술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어떻게 그 기록을 얻어서 필사한 것일까? 그 복면인은 이와 같은 놀라운 비급을 적은 비망록을 도대체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아룡은 당시 그 복면인의 복면을 벗기지 아니하였기에 그것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한가지 유추는 하고 있다; “그 자가 이 책자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익힌 자는 아니다. 만약 그 절기를 익히고 있었다고 한다면 나의 일격에 그대로 죽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망록은 어디서 얻은 것일까?... “.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아룡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그 책자의 비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열심이다. 단 5일 만에 그것을 습득하는 아룡이다. 그 다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악선의 책을 연구한다. 말이 신검과 귀검이지 실제로는 눈속임을 동반하고 있는 사술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사술과 아룡의 외공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사용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적들을 대항할 수가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술이 존재한다는 전모를 미리 파악해두는 것이 여러모로 유용한 것이다.
그렇게 지내는 사이에 3월이 된다. 그러자 최우의 저택에 있는 연병장에서 시합을 거친 호위무사와 가마꾼들이 새로 신참으로 들어온다. 아룡과 같은 가마를 메고 다니던 장무, 조룡, 유장이 모두 호위무사 시험에 합격하여 자리를 옮기고 있다.
그 대신에 신참 가마꾼으로 훈련과정을 마친 자들이 4월초에 배치가 된다. 그들의 이름이 곽현수, 김찬성, 박거력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령 아가씨가 그들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일군, 이군, 삼군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군이 없다. 그 대신에 보령 아가씨가 그냥 아룡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익숙하고 편한 모양이다.
그들 신참 3명과 호흡을 맞추어 가마를 메고 다니는데 어느 사이에 여름이 된다. 그때 신기한 일이 아룡의 주변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보령 아가씨의 시비인 사월이 언제나 가마를 따라 함께 움직이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보령 아가씨는 개국사의 습격사건이 처음 있자 한동안 별도의 호위무사 4명으로 하여금 가마와 동행하게 했다. 그러다가 대금에서 온 자객단을 모조리 소탕한 다음에는 호위무사의 동행을 그만 두게 했다.
그후 악선 부하들의 습격이 있었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자신의 시비인 사월을 동행하게 하고 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 아룡은 신참 가마꾼들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후위 우편의 가마채를 잡고 있다. 그 바로 앞에서 언제나 사월이 걸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괜히 신경이 쓰인다. 자신이 스스로 벙어리가 되어 있으므로 말을 하지는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고 있다. 그 모습을 가마에서 슬쩍 천을 젖히고 보령 아가씨가 보고서 혼자서 웃고 있다.
나이로 따지면 보령 아가씨와 사월 그리고 아룡이 모두 21살로 동갑이다. 그런데 다 큰 처녀가 앞장서서 걷고 있으니 아룡이 죽을 맛인 것이다. 자연히 시비 사월에게 신경이 쓰이고 있는데 한번은 아룡이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사월은 언제나 작은 활을 하나 손에 쥐고 다닌다. 그것을 보고서 보령 아가씨가 개국사로 가는 산길에서 가마를 잠시 멈추게 한다. 그리고 사월이만 데리고 숲 속에 들어가서는 그 활을 사용하여 사냥을 해보라고 말한다.
다른 가마꾼들은 잠시라도 편하게 다리를 쉬기 위하여 길가에 그냥 앉아 있다. 그러나 아룡의 경우에는 전혀 지치지 아니했다. 그리고 보령 아가씨의 안위에 마음이 쓰여서 조심스럽게 두사람이 간 쪽으로 진행을 했다.
바로 그때 아룡이 놀라운 광경을 본 것이다. 사월이 쏜 작은 활의 화살이 하늘로 치솟아 산비둘기를 맞추는데 귀신이 곡할 명궁의 솜씨이다. 그 광경을 본 이후 아룡이 사월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그녀의 걷는 모습과 몸씀씀이를 유심히 관찰한다.
시비 사월이 자신의 몸을 치마와 저고리 그리고 장옷 등으로 빈틈없이 가리고는 있지만 분명히 그 몸은 무예수련으로 다져진 무인의 몸이다. 여자가 그것도 처녀가 엄청난 무예를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호위무사 대신에 시비 사월이 아가씨를 수행하고 나선 것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어째서 아룡이 같은 초절정의 고수가 진작에 눈치재지 못한 것일까? 그 이유는 뻔하다. 그는 여자에게 관심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창과 장무, 조룡과 유장 등의 동료가 선을 보고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아룡만은 초연했던 것이다.
그러했던 아룡이 이제는 시녀 사월을 다른 눈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해본다; “분명히 보령 아가씨가 내 앞에 시비 사월을 투입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별로 좋은 의도는 아니다. 지난번 개국사에서 돌아오는 산길에서 발생한 습격사건의 전말에 대하여 그녀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다. 내가 혼자서 그 많은 암살자들을 상대하였으니 의심하는 것이 당연하지… “.
그 점을 눈치챈 아룡이 더욱 철저하게 자신을 위장한다. 그래서 시비 사월 앞에서는 자신이 하수라는 사실을 티 나게 하려고 애를 쓴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사월이 일부러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척하면서 뒤쪽에 있는 아룡이 쪽으로 몸을 쓰러뜨린다.
순간적으로 아룡이 기지를 발휘한다. 그가 자신도 돌부리에 걸린 것처럼 위장하고서 스스로 앞쪽으로 넘어진 것이다. 결국 뒤로 넘어지던 사월이의 몸을 아룡이 받쳐주는 형국이 된다. 그것을 보고서 가마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보령 아가씨가 깔깔 웃으면서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백주 대낮에 청춘남녀가 서로 몸을 부딪혔으니 이거 예사일이 아니다. 사월아, 들어라. 너는 혹시 아룡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냐?... ”.
그 말을 듣자 사월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역시 처녀는 처녀인 모양이다. 그러나 아룡은 그것이 아니다. 그 말을 듣자 마자 땅바닥에 철버덩 엉덩방아를 찍고 만다. 그리고 벙어리의 괴이한 소리를 낸다; “어어어… “.
그 소리를 듣자 기어코 가마 안에서 보령 아가씨가 한마디를 하고 만다; “오늘 아룡이 사월에게 혼이 났구나. 사월아 이제 아룡이를 그만 놀리거라. 그러다가 정말 정분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
그 말을 듣자 사월이가 보령 아가씨에게서 얼굴을 돌린 다음에 혼잣말로 아주 약하게 중얼거린다; “자기가 한번 아룡이 진짜 무예가 얼마나 대단한 지 슬쩍 알아보라고 시켜 놓고서는 이제 딴 말씀을 하시는구나!... 아가씨도 참 너무 심계가 깊어서 탈이야!... “.
그 말을 다른 사람들은 일체 알아듣지를 못한다. 하지만 귀와 눈이 비상하게 밝은 아룡이의 이목을 가릴 수는 없다. 그래서 아룡이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모셔야만 하는 보령 아가씨도 보통이 아니구나.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내가 지난번 개국사에서 오는 길에 떨어뜨린 흔적이 이렇게 발목을 잡고 있구나!... “.
다음달이 되자 보령 아가씨의 가마가 자주 황궁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는 후궁 경화가 너무 심심하여 절친인 보령을 후궁으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세상 물정에 밝은 보령 아가씨가 말동무로는 최고이다. 하지만 그 사이 가마꾼들은 심심하기 그지없다.
그러자 한번은 시비 사월이 일부러 황궁의 대문간 별채에 머물고 있는 곳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아룡에게 말한다; “아가씨 말씀이 오늘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니 가마꾼들이 하루 종일 푹 여기서 쉬고들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아룡이 너는 별로 지친 기색이 없으니 나를 따라오너라”.
아룡이 다소 얼떨떨하다. 그래서 속으로 생각한다; “어째서 또 사월이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가? 아직도 내게서 탐지할 것이 남아 있는가?... “. 하지만 따라가지 아니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시비 사월이 자신을 데리고 간 곳이 뜻밖에도 황궁에 있는 큰 서고이다. 수만권의 서적이 비치가 되어 있다. 그것을 보고서 아룡이 나오지 아니하는 소리로 ‘우아… ‘하고서 비명을 지른다. 사월은 그 모습이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웃는다.
그러더니 조용히 아룡에게 말한다; “이곳 황궁의 서고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아가씨를 통하여 후궁마마로부터 출입패를 받았다. 그러니 차제에 아룡이 너도 보고 싶은 서적을 마음껏 보도록 해라. 나는 네가 글을 아는 줄 벌써 알고 있다. 말을 못하는 대신에 글이 아주 명필이더구나!... “.
그제서야 아룡이 속으로 ‘아차’한다. 전번에 최우의 주치의에게 글로써 의사표현을 했는데 그때 급히 쓰느라고 평소의 필체가 그만 나와버렸다. 그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몇 사람이 돌려서 본 모양이다. 사월이가 알고 있다면 보령 아가씨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쩔 도리가 없다. 이미 엎어진 물이다. 그래서 아룡은 배짱을 두둑하게 먹고서 황궁의 서고에서 하루 종일 보고 싶은 책을 꺼내서 마음껏 읽는다. 그 모습을 안 보는 척하면서 사월이 유심히 살피고 있다.
사월의 성씨는 경주 최씨이다. 그러므로 최사월이다. 그녀의 선조는 최충헌의 부친인 최원호가 살고 있던 황해도 금천 우봉에 가까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충헌이 무신정권의 실세가 되자 자신의 부친을 시조로 하는 우봉 최씨의 족보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 근방에 살고 있는 경주 최씨가 같은 뿌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최충헌은 이웃인 경주 최씨의 어린 딸들을 인질로 삼아 개경으로 데리고 왔다. 그녀들에게 문객과 검객을 붙여서 어린 시절부터 특별훈련을 시켰다. 훗날 최우가 부친의 권력을 승계하자 그 가운데 얼굴이 반반하고 가장 영리한 최사월을 골라서 금지옥엽인 최보령의 시비로 삼은 것이다.
그와 같은 내력이 있기에 사월이의 글 읽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 그런데 그날 사월이 경악을 한다. 자신보다 서적을 읽는 속도에 있어서 아룡이 두배나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슬쩍 아룡에게 접근한다. 그때 그녀가 본 것은 그림이 많은 서적이다. 그것을 보면서 아룡이 히죽 웃고 있다. 어떤 서적은 춘화도 비슷하기도 하다.
그녀가 슬쩍 지나치면서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한 그림을 찾아서 보고 있으니 책 읽는 속도가 빠른 것이야!... 설마하니 어릴 때부터 각종 서적을 통달한 나를 따라올 수가 있으려고… 괜히 오해를 했구만… “.
아룡이 그러한 반응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여러가지 책을 골라다 놓고서 사월이 접근하자 얼른 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아룡과 사월 사이에 지모의 경쟁이 시작되고 있다.
물론 머리가 더 좋은 아룡이의 판정승이기는 하지만 입맛이 쓰다. 그래서 아룡이가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일까? 최우의 저택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더이상 얻을 것이 없다면 독립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자신에게는 지난번 악선과 그의 부하들에게서 얻은 은전이 충분하다. 이제 아룡은 은밀하게 그 시기를 점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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