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하 주석

역대하 제3장 주석(요약자; 양인국)

손진길 2024. 1. 6. 10:17

역대하 제3장 주석(요약자; 양인국)

 

역대하3
 
3:1,2. “1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2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넷째 해 둘째 달 둘째 날 건축을 시작하였더라

솔로몬은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하심에 순종하여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던 곳이고(창22:2), 또한 다윗이 백성을 계수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였을 때 오르난으로부터 타작마당을 사서 그곳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그치게 한 곳이다. 그러므로 모리아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고백이 있는 산이다. 솔로몬은 바로 이곳에 성전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우리에게 “성전은 신앙의 고백 위에 세워 진다”는 것을 교훈 해 준다. 우리에게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전으로서 온전히 세워질 수 없고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신앙의 고백이 없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온전히 세워질 수 없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지 넷째 해 둘째 달 둘째 날에 건축하기를 시작했다. 그는 왕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우선해야 할 일이 바로 성전 건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왕이 된 후에 최대의 관심은 성전 건축에 있었던 것이다. 부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위하여 그토록 많은 것을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준비의 기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여기 사년은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성역(聖役)은 준비함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 등은 모두 준비함 가운데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즉 성역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 자체가 성역인 것이다.

3:3-14. “3 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놓은 지대는 이러하니 옛날에 쓰던 자로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며 4 그 성전 앞에 있는 낭실의 길이가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백이십 규빗이니 안에는 순금으로 입혔으며 5 그 대전 천장은 잣나무로 만들고 또 순금으로 입히고 그 위에 종려나무와 사슬 형상을 새겼고 6 또 보석으로 성전을 꾸며 화려하게 하였으니 그 금은 바르와임 금이며 7 또 금으로 성전과 그 들보와 문지방과 벽과 문짝에 입히고 벽에 그룹들을 아로새겼더라 8 또 지성소를 지었으니 성전 넓이대로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도 이십 규빗이라 순금 육백 달란트로 입혔으니 9 못 무게가 금 오십 세겔이요 다락들도 금으로 입혔더라 10 지성소 안에 두 그룹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금으로 입혔으니 11 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왼쪽 그룹의 한 날개는 다섯 규빗이니 성전 벽에 닿았고 그 다른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오른쪽 그룹의 날개에 닿았으며 12 오른쪽 그룹의 한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성전 벽에 닿았고 그 다른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왼쪽 그룹의 날개에 닿았으며 13 이 두 그룹이 편 날개가 모두 이십 규빗이라 그 얼굴을 내전으로 향하여 서 있으며 14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고운 베로 휘장문을 짓고 그 위에 그룹의 형상을 수놓았더라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먼저 기초를 놓았고(3:3), 다음으로 현관을(3:4,낭실), 전을 짓고(3:5) 마지막으로 지성소를 지었다(3:6).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대해서는 본문 외에 열왕기상 6장에 보다 더 자세히 언급 되어 있다. 성전의 길이는 육십 규빗, 너비는 이십 규빗 그리고 높이는 일백 삼십규빗이다(왕상6:2). 이것은 성막 규모의 두 배의 크기다. 그리고 전의 성소 앞에 낭실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길이는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일백이십 규빗이라고 했다. 열왕기상6장 3절은 광은 십규빗이라고 했다. 이처럼 낭실의 길이와 너비에 비하여 높이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학자들은 높이가 오기(誤記)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전은 정금으로 입혔고, 전의 천정은 잣나무로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며 그곳에 종려나무와 사슬 형상을 새겼다. 지성소 안을 정금으로 입혔고 지성소 안에 있는 두 그룹들도 정금으로 입혔다. 두 그룹의 날개 길이가 모두 이십 규빗이고 좌.우편 그룹의 각 날개는 다섯 규빗이니 각 전의 전 벽에 닿았다. 그룹의 얼굴은 외소(성소)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해 주는 문장(門帳)은 청색 자색 홍색실과 고운 베로 만들고 그 위에 그룹의 형상을 수놓았다.

3:15-17. “15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16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 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17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성전 앞에 두 기둥을 세웠는데 각각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기둥의 정확한 의미와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성전의 신성과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 앞에 세운 두 기둥에 대해서는 왕상7:15-22에도 언급하고 있다. 솔로몬은 두 기둥을 성전의 낭실 앞에 세우고 우편의 기둥 이름을 야긴이라고 했고 왼편의 기둥을 보아스라 했다. 야긴의 뜻은 “저가 세우리라”이고 보아스의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였다. 그레이(Gray)는 적절하게 제안하기를 “이 이름들은 하나님과 왕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긴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리키고, 보아스는 왕의 의존성을 가리킨다”고 했다. 이 두 기둥들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윗에게 영속하는 왕조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성공적인 통치를 위해 하나님을 의뢰할 것을 겸손히 증거 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비였을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이 기둥들은 후대의 왕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정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통치하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 안에 그들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시켜 주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엑스포지스터 성경주석).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교훈 받는다. 하나는 성전은 순서에 따라 점진적으로 지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먼서 지대를 놓고 다음으로 현관을(3:4,낭실), 전을 짓고(3:5) 마지막으로 지성소를 지었다(3:6). 이것은 성전을 짓는 일에는 비약(飛躍)이 있을 수 없고 처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완성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지어진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의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는 교사의 배움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장하고, 좀 더 성장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환경 등을 통하여 신앙의 인격으로 훈련되어가며, 성숙한 신앙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들어간다. 이 단계에 이르면 신령한 체험이 있고 특별한 응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은 아직도 이런 영적 성장의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의 비약을 체험하기 원한다. 즉 교사로부터 성실히 배워야할 시기에 오히려 신령한 체험이나 특별한 기도의 응답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은 정상적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앙에 대하여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성전은 모든 과정을 거치며 점진적으로 세워져 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보석, 정금 등으로 모든 기구들을 장식했다. 특별히 금으로 성전과 기구들을 입힘으로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한 재료가 어떤 것이든 모두 금처럼 귀하게 보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연약하고 무가치한 존재들이지만 은혜로 옷 입혀졌을 때 귀한 존재가 된다. 또한 성전을 정금과 보석으로 장식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각 사람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내적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성전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또한 교회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전 내부는 여러 가지 형상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형상들은 신앙과 경건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개인적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야하고 교회의 생활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해 주는 상징이 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