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출애굽기 강해 제112강(출27:1-8)(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3. 4. 26. 11:42

출애굽기 강해 제112(27:1-8)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916()

 

제단의 치수와 양식의 특징(27:1-8)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제단의 크기가 작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사각형이며 치수를 살펴보면,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5규빗 곧 2.25미터나 됩니다(27:1). 예컨대, 제단의 규모는 더블침대 킹 사이즈보다 폭이 더 넓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높이도 상당합니다. 3규빗이므로 1.35미터나 됩니다. 그 제단은 성소로 들어가는 휘장 앞 성막의 뜰에 설치가 됩니다(40:29). 그곳 제단에 바치는 제물은 번제가 기본입니다(29:17-18). 따라서 일명 번제단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30:28). 그리고 조각목으로 만들지만 그 바깥을 놋으로 둘러싸고 있으므로 놋 제단으로 불리기도 합니다(27:2).

제단의 소재는 기본적으로 아카시아 조각목입니다. 아카시아 목재의 최고 크기가 널판의 규모입니다. 길이 10규빗에 너비 1.5규빗 정도입니다. 그런데 제단은 정사각형이며 길이가 각각 5규빗입니다. 널판 서너 개를 붙여야 만들 수 있는 넓이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27:8). 킹 사이즈 침대보다 큰 것을 원목으로 만들게 되면 그 무게가 상당할 것입니다. 그것을 어깨에 메고서 운반해야만 하는 가마 꾼과 같은 레위인 고핫 자손들의 뼛골이 빠질 것입니다(3:31, 7:9).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처를 하시고 계십니다. 얇은 널판을 서너 개 붙여서 위에 한 겹, 아래에 한 겹으로 제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위판과 아래 판 사이에는 그 변두리와 중간에 적당히 가로 대를 넣어서 무게를 감당할 것입니다.

아카시아 조각목 널판을 짜맞추어서 제단을 만들지만 그 바깥은 놋으로 싸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물의 피가 제단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의 네 모퉁이에는 뿔을 조각하여 만들고 있습니다(27:2). 그것은 제물의 많은 피를 제단에 흘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네 뿔에만 제물의 피를 상징적으로 바르도록 한 것입니다(29:12). 한 마디로, 제물의 피를 별로 좋아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가급적이면 생명의 피는 폐쇄회로를 돌면서 사람과 동물의 생명을 살리는데 사용이 되기를 원하시고 있다고 하겠습니다(9:4-6). 같은 의미에서 무죄한 아벨의 피가 땅으로 흘러내리면서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 있다고 하는 대목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하겠습니다(4:10-11).

다음으로 완전히 놋으로만 제작하는 제단용 기물들이 있습니다; 재를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를 거는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기타 제단용 그릇은 전부 놋으로 만들고 있습니다(27:3). 그리고 특별히 사각형 놋 그물을 하나 제작하고 있습니다. 네 모퉁이에 놋 고리 네 개를 만들어 그것을 제단의 중간높이에 매달아 두고서 사용합니다(27:4-5). 사용중인 물건과 도구를 잠시 보관하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끝으로, 제단을 운반할 수 있도록 고리를 만들고 그것을 채로써 꿰도록 장치하고 있습니다(27:7). 채는 조각목으로 만들고 역시 그것을 놋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27:6).

 

번제단과 분향제단과 진설병 상과 증거궤와의 관계(25:20-23, 30, 30:1-2, 6, 10)

 

성막에는 제단이 두 개입니다; “번제단과 분향제단입니다”(27:1, 30:1). 그리고 상이 하나 있으며 궤가 하나 있고 또 등잔대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한 성물들은 각각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기능은 어떠한 의미를 저희 성도들의 삶에 전달해주고 있을까요? 이왕 번제단에 대한 기록이 나타났으므로 차제에 모두를 연결하여 묵상을 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제단은 하나님께 희생을 바치는 곳입니다. 희생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용서를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당사자를 대신하여 제물을 번제로 드리니 부디 사죄를 받아주시고 화평함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제물의 피는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12:7, 13). 그 피를 볼 때에 죄의 결과인 사망의 심판이 그냥 넘어가게 되고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12:21-24).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무덤 속 부활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하나님 아들의 그 제사로 말미암아 더 이상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가 소용이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7:27).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부탁하여 성령을 보내어주심으로 초대교회의 시대가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14:16, 2:1-4). 그 결과 성도들이 드릴 수 있는 제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성도의 거룩한 삶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지상명령의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28:18-20, 2:42). 그것이 가능하도록 영적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이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십니다(1:8). 그리고 성막에 있는 성물들의 기능과 역할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셋째로, 성막의 뜰에서 번제를 드리듯이 성도들은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며 영적인 예배라고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습니다(12:1). 그것은 성막의 번제단이 없어진 마당에 물리적인 제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은 인생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알고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적인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고 하는 권면입니다(고전6:19-20). 그 일을 위해서는 쉬지 말고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살전5:17, 6:18, 5:8). 그 기도는 마치 분향제단의 향 내음과 같이 지성소로 스며들고 마침내 하나님께 상달이 될 것입니다(2:23, 30:6-8).

넷째로, 진설병 상과 등잔대의 의미도 각별합니다. 그것들은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의 기능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증거궤와 속죄소를 통하여 울려 나오고 있습니다(25:22).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고 있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뜻이 말씀으로 흘러나오게 되면 그것은 대제사장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선포가 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일상생활에 실천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말씀 사이에 갈등이 있고 충돌까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가운데서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12:2). 그 일을 성령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진리 가운데로 성도들을 인도해주십니다(16:13). 매일같이 그와 같은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문도 매일의 양식을 얻듯이 영적인 양식을 얻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6:11).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4:4). 그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진설병 상이라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부뚜막의 소금도 입에 집어넣어야 짜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실천을 해보아야 세상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행동하지 아니하는 양심과 지성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듯이 그러합니다. 캄캄한 세상에 조그마한 등불이라도 밝히자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는 성도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와 같은 삶이 있을 때에 성소의 등잔대가 환히 어두운 공간을 밝히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 빛이 어두워지게 되면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께서 그것을 치워버리실 것입니다(2:5).

결론적으로, 성막의 성물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오늘 날 성도들의 삶에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기록이 오래된 옛날의 것이라고 하여 무시하거나 그냥 버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대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미 탈색이 되거나 희미해져 버리고 있는 종교적인 용어와 의식과 개념들에게 원시적인 생명력을 공급해주고 있는 것들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하여 그 원초적인 개념을 다시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성막의 지루한 설명조차 소홀히 할 수가 없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