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공화국(손진길 소설)

너와 나의 공화국26(손진길 소설)

손진길 2022. 7. 3. 10:53

너와 나의 공화국26(손진길 소설)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여 대선후보까지 지낸 정주영19932월에 탈당선언을 하고 정계를 은퇴하자 그와 함께 정계에 몸을 담은 연세대 철학교수 출신인 김동길 의원과 코미디언 이주일로 알려진 정주일 의원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신생정당 통일국민당의 재정을 시종 책임지고 있던 정주영 총재가 창당한지 1년 남짓 만에 손을 떼고 정계를 완전히 떠나고 말았으니 남은 당직자들은 당 살림을 꾸려갈 엄두가 나지 아니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남아 있는 30명의 국회의원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통일국민당 공천으로 수도권에서 당선이 된 초선의원 이민욱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이민욱 의원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선배의원이 홍사덕이다. 홍의원은 의원회관 옆방에 입주한 대학후배 이민욱 의원을 평소 눈여겨보고 있다. 따라서 시간이 나면 이민욱 의원의 방을 찾아가서 담소를 나누기도 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러한 친분이 있기에 하루는 이민욱 의원이 홍사덕 의원의 방에 찾아가서 은밀하게 자신의 정치적인 거취를 상의하고자 한다. 이민욱이 홍의원을 선택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중요한 문제를 상의하고자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따지고 보면 3가지나 된다;

(1)  첫째, 51세의 홍사덕 의원의 학력과 경력이 이민욱 자신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홍의원은 서울 문리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중앙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1981년에 제1야당인 민한당 후보로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한 인물이다. 요컨대, 이민욱 자신보다 8살 많은 홍사덕이 같은 대학 9년 선배일 뿐만 아니라 기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2)  둘째, 홍사덕 의원은 김영삼 총재가 3당합당에 찬성하자 그에 반대하여 꼬마 민주당에 남아 있다가 나중에 김대중의 정당과 합당하여 지금은 민주당 소속의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여곡절이 있으므로 고립무원의 처지인 이민욱 의원이 다시 진로를 결정하는데 도움말을 줄 수가 있는 것이다.

(3)  셋째, 고향으로 보아 같은 TK출신이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다.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국리민복을 위하여 국민의 대변인으로 의정활동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연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상문제를 논의한 결과 홍사덕 의원이 이민욱 의원의 입장을 헤아려서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이의원도 알다시피 나는 꼬마민주당에 있다가 DJ의 정당과 합당하여 지금은 민주당의 중진의원이 되어 있어요;

 1990년초에 노태우 대통령의 민정당과 3당 합당을 추진한 YS에게 반대하였기에 자연히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있는 DJ편에 서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의원도 차제에 나와 함께 제1야당인 민주당에서 정치활동을 같이 하도록 합시다”.

그 말을 듣자 이민욱이 말한다; “선배님, 그렇지만 DJ를 보좌하고 있는 정치인은 역시 조직에는 김상현, 재정에는 권노갑이라고 알려지고 있는 그대로 전부 호남 출신들이 아닙니까? 우리 영남 출신들이 크게 일할 수 있는 여지가 DJ의 민주당에서는 없을 것 같은데요?... “;

 

그 말에 홍사덕 의원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그렇지만 DJ가 호남의 표만으로는 절대로 대통령에 당선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요. 따라서 그는 타지역출신과 연대하려고 열심입니다. 그에 따라 고향은 다르지만 젊은 의원들 가운데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이 상당수 있지요. 예를 들면, 충청도 출신인 이해찬 의원, 경남 출신인 노무현 의원이 그러하지요… “;

그 말을 듣자 이민욱이 고개를 크게 끄떡이면서 말한다; “그렇다면, 저는 홍선배만 믿고서 민주당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선배님… “. 그 말에 홍사덕이 이민욱의 손을 잡으면서 말한다; “같은 마음입니다. 후배님, 잘 부탁합니다. 우리 한번 좋은 야당을 만들어봅시다!”.

이민욱 의원이 민주당으로 소속을 옮기기 위하여 통일국민당을 떠날 즈음에 그와 같은 이유로 탈당하여 다른 정당을 찾아가는 의원들이 많다. 따라서 31석으로 출범한 통일국민당이 그만 교섭단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군소정당으로 추락하고 만다.

더구나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이 사용하던 건물마저 폐쇄하여 버리자 남은 의원과 당료들이 천막을 치고서 당의 간판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이름하여 정치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천막당사인 것이다;

한편 정치를 포기하고 재계로 되돌아간 정주영 회장은 통일국민당과 선을 끊기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지만 YS 정권의 포화를 모두 피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선거법 위반,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계속 수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현대계열사들도 세무사찰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한때 제2야당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할 기세를 보이던 통일국민당이 그렇게 꼬리를 말고 있는데 비하여 1야당인 민주당은 대여투쟁에 효과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들은 신군부 출신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아무리 대통령을 지냈다고 하더라도 1979년말에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5월에는 광주민주화투쟁에 대하여 군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진압하고, 민주인사를 탄압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정권을 차지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난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은 아직 정계에 복귀하지 아니하고 있지만 그의 정당인 제1야당 민주당은 강력하게 정부여당을 압박하고 있다. 김영삼 정권이 진정한 문민정부라고 하면 반드시 신군부의 리더들을 처벌하여야 한다고 원내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여론몰이를 위하여 원외투쟁을 병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정치적인 총공세에 직면하게 되자 김영삼 대통령은 나름대로 결단을 내리고자 한다. 이제 어느 정도 군부내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던 하나회를 제거하였기에 전직 대통령 두사람을 비롯하여 쿠데타와 무력진압에 참여한 인물들을 색출하여 사법처리를 하고자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김영삼 정권이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조사를 검찰의 손에 넘기게 된다. 그에 따라 검찰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지고 있다.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전직이 되고 나면 일개 검사보다 그 권력이 못하다고 하는 인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한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 공안부장의 자리에 있는 나아문 검사야 말로 엄청 콧대가 높아지고 있다. 그는 이제 국회의원 정도는 자신의 발아래로 보기 시작한다. 현직의원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한국의 정계에 남기게 되는 그 역사적인 사법처리의 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해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고 하겠다;

(1)  야당의 정치적인 공세가 거세어지자 김영삼 대통령은 1993513일에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그 내용이 두가지인데 하나는, 19805월의 비극적인 광주사태를 광주 민주화 의거라고 규정한 것이다. 또 하나는, 진상규명은 훗날의 역사에 맡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2)  김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있은 지 꼭 1년후 1994513일에 5.18 광주항쟁연합 상임회장인 정동년을 비롯하여 5.18 피해자들이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 및 군지휘관 35명을 내란 목적 살인혐의로 검찰에 고소, 고발을 한다. 그에 따라 검찰이 6개월 후인 1121일부터 본격 수사에 나선다.

(3)  수사에 착수한지 6개월이상이 지나 검찰은 1995718일에 공소권 없음이라고 5.18관련자 처벌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대하여 국민들이 의아해하면서 시중에서는 성공한 강도는 처벌할 수가 없는 것인가? 그것이 한국의 법치인가?라는 야유가 터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상 시효가 만료된 것도 사실이다.

(4)  여론에 민감한 것이 정치이다. 그와 같은 국민의 여론을 보고서 김대중이 얼른 정계에 복귀하여 재빨리 새정치국민회의라는 신당을 만들고 기존의 야당인 민주당과 함께 19959월에 5.18 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한다;

 그것은 두가지 내용인데 하나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의 제정이고 또 하나는,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의 제정인 것이다. 그것을 보고서 김영삼 대통령이 2달간 고심하다가 11월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여당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5)  그와 같은 정치권의 움직임을 보고서 검찰이 움직이고 있다. 먼저 123일에 전두환 전 대통령부터 구속하고 있는데 그것은 7월에 검찰이 발표한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론과는 상이한 것이다. 그 법적인 뒷받침은 사실 뒤늦게1219일에 국회에서 통과한 5.18 특별법이기 때문이다.

(6)  그 다음 검찰의 공소유지와 사법부의 판결은 정해진 수순이다. 그해 1221일에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황영시, 정호용, 허화평, 이학봉 등 신군부 핵심 16명이 모조리 기소되고 있다. 그 다음해인 19963월에는 소위 ’12.12 5.18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다. 8월에 1심재판이 종결되는데 그 선고내용이 반란죄와 내란수괴죄를 적용하여 전두환에게는 사형, 노태우에게는 징역 226월에 처한다는 것이다;

(7)  9611월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을 강제로 구인하여 법정에서 증언하게 하려고 검찰에서 조치하였으나 최규하는 이에 불응하면서 증언거부에 관한 입장을 작성하여 낭독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8)  정치적인 사법처리에 대해서는 훗날 감형이 되고 국민화합의 차원에서 대통령의 사면조치가 통상 있게 된다. 이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9612월에 벌써 전두환은 무기, 노태우17년형으로 감형이 된다. 그리고 이듬해 974월에는 대법원에서 감형이 된 그대로 최종심으로 확정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하여 971222일에 특별사면을 하게 된다.

(9)  그 이유는 971218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DJ 김대중이 당선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호남 출신인 DJ는 광주사태의 주범에 대한 사면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부담을 취임 이전에 영남 출신인 현직 대통령 YS에게 떠넘긴 셈이다. 게다가 YS는 영남 출신인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하였다고 하는 정치적인 후련함을 임기말에 맛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이 소위 정치 10단인 YSDJ의 합작의 결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