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만난 신구약의 인물들(손진길 작성)

47. 느헤미야(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3. 22. 14:36

47. 느헤미야

 

(1)느헤미야는 에스라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페르샤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인물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

 첫 째로, 에스라는 명문인 대제사장 가문의 자손이었으나 느헤미야는 평범한 유대 인 하가랴의 아들로 기록되고 있다(7:1-5, 1:1).

 둘 째로,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했으며 두루 학식을 갖춘 학자였으므로 아닥사스다 왕의 총애를 받았다(7:6,12). 그러나 느헤미야는 수산 궁의 관리로서 출세하여 왕의 술을 책임지는 최측근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1:1,11). 이 자리는 조선 시대 상선 벼슬에 해당되며 오늘 날 차관급 대통령 비서 겸 부속실장이라고 볼 수 있다.

 셋 째로, 에스라는 성전에 바치는 왕의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 갔으며 그 곳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유대 인 총독으로 정식으로 임명받아서 예루살렘에 부임한 것이다.

 넷 째로, 에스라는 BC 458년 약 이천 명의 동족들을 이끌고 귀환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14년 늦게 BC 444년쯤 총독의 수하와 군사들을 이끌고 입성했다(2:9-11, 5:14-16).

 

(2)느헤미야가 이 같이 높은 자리로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느헤미야의 뛰어난 자질이다. 청렴결백하며(5:14-19) 인내심이 있고(6:1-19) 때로는 담대하며(4:1-23) 설득력 까지 갖춘(5:1-13) 인물이 느헤미야였다. 다음으로 아닥사스다 왕의 부친이었던 아하수에로 왕의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유대 인 모르드개를 재상으로 중용했을 뿐아니라 유대 인 출신 왕비 에스더를 총애하고 신임했던 것이다(5:2, 8:1-2, 15-17).

 여러 이방 족속 가운데 정직하고 성실하기로는 유대 족속을 따를 만한 민족이 없었다. 더구나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백성이었다. 그래서 페르샤 제국에서는 초창기 고레스 왕 때부터 다니엘이 재상이었으며 모르드개가 그 뒤를 이었고 드디어 느헤미야가 왕의 독살을 예방하는 자리로서 가장 충직한 신하가 맡는 자리인 상선 벼슬에 임명된 것이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신하로 가진 아닥사스다 왕은 예루살렘 성과 성전에 대한 관심이 컸던 인물이었다(7:15-28, 2:2-10).

 

(3)십사 년전에 예루살렘의 유대 인들에게 율법 공부를 제대로 시키겠다고 고향으로 돌아간 에스라가 곤경에 빠진 사실을 느헤미야가 그의 친동생인 하나니(7:2)를 통해서 들었다(1:2-3). 유다 백성들이 이방 인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우상을 섬기게 된 잘못은 일찌기 에스라가 대 회개 운동을 일으켜서 근절시킨 바 있다(10:7-17). 그렇지만 십여 년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대제사장 엘리아십(3:1, 예수아의 손자, 12:10-11) 과 그의 자손들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타락함으로써 백성들은 다시 이방 민족의 눈치만 살피게 되고 예루살렘 성은 아직도 훼손된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딱한 소식이었다(1:3). 에스라 혼자의 힘으로서는 시정할 엄두도 못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기도했다(1:4). 아닥사스다 왕 20(BC 445) 기슬로 월(11-12, 1:1) 부터 니산 월(이듬해 3-4, 2:1) 까지 느헤미야는 끈질기게 기도했는데 그 내용은 유다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믿음의 공동체를 유대 땅에 완성시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는 것이었다(1:9-11, 2:5-8). 느헤미야의 이 기도는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들어 주셨다. 하나님의 뜻과 완벽하게 일치되는 기도였던 것이다.

 

(4)예루살렘 성벽을 BC 443년 부터 중수하자 이웃 민족들의 반발이 거세었다. 특히 북쪽 사마리아의 실력자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2:10, 4:1-3) 그리고 아라비아의 지도자 게셈(6:1)은 무력적인 위협과(4:11) 더불어 유대 인들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유언비어까지 만들어서 페르샤 제국내에 퍼뜨리고 있었다(2:19, 6:6-7).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한 손으로는 병장기를, 다른 한 손으로는 건축일을 계속하자고 호소했으며(4:13-23) 마침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놀랍게도 오십이일만에 성벽이 완성되었다(6:15).

 그러자 느헤미야는 학사 에스라의 협조를 얻어서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8:13-9:3). 초막절 지키기(8:14), 예루살렘 거주자 선정(11:1-9), 성전 봉사자 임명(11:10-36), 십일조 규정 제정(12:44-47), 고리대 금지(5:10) 등이 개혁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런데 십이년 동안 유대 총독을 지내고서 느헤미야가 BC 433년 잠시 페르샤 수도로 돌아간 사이 대제사장 엘리아십 가문은 옛 날 버릇으로 되돌아 갔다. 암몬의 지배자 도비야와 제휴하여 그 세력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고(13:4-6) 사마리아의 지배자 산발랏과는 아예 사돈을 맺었다(13:28). 이에 따라 백성들은 성전세를 떼어 먹었으며 생계가 막연해진 성전의 봉사자들은 근무지를 이탈해버렸다(13:10). 그리고 다시 암몬과 모압 여인들과 결혼하여 유다 말조차 못하는 자식을 낳고 있었다(13:23-24).

 이에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느헤미야는 이와 같은 잘못에 대하여 강력하게 시정했다. 그리고 역사책 느헤미야서를 저술하면서 아예 민족 지도자 명단에서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을 빼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죄상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 결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그의 아들 요아김만이 민족 지도자 명단에 에스라, 느헤미야와 함께 등재되어 있는 것이다(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