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260강(창44:32-34)(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2. 2. 2. 07:29

창세기 강해 제260(44:32-34)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49()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옴으로써 가족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했던 유다의 진술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다(44:32).

 

유다는 양식이 떨어진 가나안 식구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다시 애굽에 가서 곡식을 사오고자 합니다. 그런데 막내 동생 베냐민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야면 양식을 사올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야곱이 막무가내로 베냐민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찌하면 좋습니까? 마침내 유다가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과 영생을 걸고서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애굽의 총리인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방법이기에 창세기에서 두 차례나 수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43:9),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44:32).

훗날 유다의 맹세와 유사한 담보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구약과 신약에 각각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달라고 자신의 영생을 걸고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역시 자신의 영생까지 언급하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록이 다음과 같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1-32),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9:3).

그들의 간구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첫째, 요셉이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45:22-23). 둘째,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잘못 제사를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소한의 징벌로써 용서함을 받고 있습니다(32:34). 셋째, 사도 바울의 친척들이 많이 구원함을 받습니다(16:7, 11, 21). 나아가서 이방인들의 구원에 이어서 유대인들의 구원이 있을 것임을 사도 바울이 기도의 응답으로 받아서 로마서에 기술하고 있습니다(11:25-26).

 

동생 베냐민의 죄를 대신하여 애굽 총리의 종이 되고자 하는 유다의 마음이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다(44:33)

 

유다가 동생 베냐민의 죄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그 방법은 베냐민 대신에 애굽 총리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44:33). 그것은 속죄양과 동일한 뜻입니다(16:10, 21). 그리고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제물과 같습니다(16:6). 훗날 그 방법으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게 됩니다. 제물을 대신 바치는 속죄의 제사가 하나님의 용서를 얻게 되듯이 유다의 결심이 애굽 총리인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동일한 원리가 십자가의 대속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완벽하고 영원한 제물이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29, 7:27). 만민과 만물의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스스로 대속의 제물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죄 사함의 용서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입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에서는 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애굽 총리의 종이 되겠다고 자청하는 유다의 결심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이복 형들을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44:33, 45:1-3).

 

베냐민과 아버지를 모두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유다의 진심이 요셉에게 큰 감동을 주다(44:34)

 

유다는 베냐민을 살림으로써 아버지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합니다(44:34b). 그 두 사람은 하나의 생명으로 연결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44:30). 그러므로 베냐민을 데리고 가지 못하면 자기 혼자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44:34a). 그 마음은 다른 형제들도 똑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베냐민을 애굽에 남겨두고 가나안으로 떠나갈 수가 없어서 모두들 애굽 총리의 집으로 되돌아 왔기 때문입니다(44:13-14). 형제들을 대표하여 유다가 부디 자신들과 함께 베냐민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선처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44:34). 유다의 말과 간청이 어째서 요셉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그것이 복음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있는 형제들을 찾아가야만 합니다(15:4). 그들을 세상의 종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주어야만 합니다(15:21-24).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지상명령의 요체입니다(28:19-20). 물론 그 작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서 모든 천하의 권세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뒷받침을 할 것입니다(28:18, 1:22-23).

창세기에서 요셉은 예수님의 예표로 등장을 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 이복 형들의 의도와 행동은 당연히 요셉을 감동시키게 됩니다. 유다의 말이 끝나자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복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의 방성대곡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4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