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제259강(창44:23-31)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년 4월 8일(화)
식솔들과 종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놓은 아버지 이스라엘의 사랑과 희생(창44:23-31)
야곱의 생각에 세상은 참으로 험악합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창25:24-26). 에서의 발목을 잡고서 함께 이 세상에 나왔지마는 야곱은 엄청난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단지 몇 분 차이로 태어났는데 에서는 장남이고 야곱 자신은 차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대 가부장 족장사회에서 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졌으며, 시간이 지나면 족장인 아버지 이삭의 모든 타이틀과 재산을 상속할 수 있는 대우를 받게 됩니다. 반면에 야곱 자신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습니다.
그 후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신부까지 바꿔치기를 하는 라반의 횡포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린 야곱입니다. 그를 공짜로 14년 동안이나 머슴으로 부려먹는 라반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한 많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믿고 의지할 수가 있는 분은 창조주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야곱입니다(창31:7-9). 하나님만이 야곱 자신의 미래를 밝음으로 인도할 수 있으며 잘못된 운명도 바꾸어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신 줄 그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창32:26). 그와 같은 야곱의 고백이 훗날 애굽의 황제인 바로 앞에서 있게 됩니다(창47:9).
그와 같은 야곱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나는(요셉은) 내게서 (가나안 땅 세겜으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베냐민도) 내게서 (더 큰 세상인 애굽으로) 데려가려 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음부세계)로 내려가게 하리라”(창44:28-29). 야곱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아들들은 세상에 나가게 되면 횡액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 때의 충격이 아직도 야곱의 머리 속에 박혀있는 결과입니다(창37:33-35). 그러므로 베냐민을 자신의 품에 꼭 끼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험악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야곱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일대의 흉년으로 굶고 있는 식솔들의 목숨을 살리자면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그와 같은 조건을 제시하고 있기에 그로부터 양식을 사기 위해서는 그의 말을 따르는 도리밖에 없습니다(창44:23-26). 그래서 마침내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기로 결심을 한 이스라엘입니다(창43:13-14). 여기서 복음의 원형을 다음과 같이 엿볼 수가 있습니다; “말씀의 기근으로 영적인 흉년을 겪고 있는 세상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의 계시의 총책임을 지고 있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야만 합니다(마11:27). 하나님의 아들을 험한 세상에 내보내고 싶지 아니한 것이 창조주의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들을 내려 보내지 아니하면 도저히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밝히고 생명의 양식을 완전하게 전달하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려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요3:16)”.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창44:30)이라는 유다의 진술을 듣고서 요셉이 마침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다(창44:30-31)
만약 베냐민이 가나안 아버지 야곱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어떠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까요? 첫째,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오겠다고 자신의 목숨과 영생을 걸고서 아버지에게 약속을 한 바 있는 유다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만 합니다(창43:9, 44:32). 둘째,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 충격으로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창44:22, 29, 31). 22년 전에 요셉의 사망소식을 듣고서 죽도록 애통했던 아버지 야곱이기에 분명히 베냐민까지 잃어버리게 되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창44:27-29). 셋째, 동생 요셉을 죽이려다가 이방 땅에 노예로 팔아먹은 형들이 이제 베냐민까지 해치게 되는 결과가 되므로 그들이 남은 인생 동안 그 비극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창37:20, 28, 44:31).
그와 같은 결과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고 유다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창44:30). 그 옛날 요셉을 해치고 아버지에게 짐승에게 찢겨서 죽었다고 허위보고를 했을 때에는 미처 몰랐던 사실입니다. 그 슬픔으로 죽음 직전에 이르게 되는 아버지 야곱을 보고서 드디어 깨닫게 된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베냐민만은 반드시 살려서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돌려주고 싶어하는 유다와 그의 형제들입니다. 똑 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유다 자신이 목숨과 영생을 걸고서 베냐민의 무사귀환을 담보했습니다. 따라서 그 순간부터 베냐민의 목숨과 유다의 목숨이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묶여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이 하나이며 동생의 생명과 형의 생명이 하나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스토리입니다;
첫째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아닙니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운명을 같이하십니다. 그렇게 창조주께서 사람을 잘못 만든 죄를 지시고 그 책임을 다하고자 십자가를 지시고 말았으니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험악한 인생살이를 만들었다고 하소연을 하던 사람들에게 그 불평과 원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 족속들이 19세기에 영국의 왕과 계약을 맺었는데 이제 만약 왕실이 사라지고 나면 계약의 이행을 호소할 곳이 없어지는 것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또한 제조자책임의 법에 따라 피조물의 제조자가 그 책임을 다하고자 스스로 운명하는 길을 택하고 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피조물 자신의 책임만이 남게 됩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책임을 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 모든 결과는 창조주 앞에서 오로지 피조물 자신만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복음의 시대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로, 오순절 날 하나님의 영이 나누어져서 모든 성도들에게 들어오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모든 성도들에게 나누어져서 들어오고 있습니다(행2:1-4). 따라서 이제는 같은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한 형제 자매가 되고 말았습니다. 공동운명체이며 하나의 유기체가 된 것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말았으니 아픔과 슬픔도 같이 느끼고 기쁨과 즐거움도 함께 누리는 것이 옳습니다(엡4:2-6). 그와 같은 이치가 유다의 입에서 진술이 되고 그 진리는 요셉의 원한을 풀어내고 있습니다(창45:1-3). 요컨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 유다와 요셉에게 임하고 있는 현장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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