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작성자; 손진길 목사)

창세기 강해 제167강(창31:44-49)(작성자; 손진길 목사)

손진길 2021. 12. 13. 13:58

창세기 강해 제167(31:44-49)

작성자; 손진길 목사(갈릴리한인교회 담임)

작성일; 주후 2014121()

 

라반이 상호불가침조약을 제의하자 야곱이 조약을 맺기 위하여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세우다(31:44-46).

 

야곱이 장인인 라반과 상호불가침조약을 길르앗에서 맺고 있습니다(31:44-53). 그런데 야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도 옛날에 블레셋의 왕중왕인 그랄 왕 아비멜렉과 각각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은 적이 있습니다(21:23-32, 26:28-31). 세 가지의 경우를 잠시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공통점입니다; 첫째, 세 사람은 모두 세상적으로 자기보다 훨씬 힘이 강한 자들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둘째, 그것도 자기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원해서 조약을 맺고 있습니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인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러한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큰 피해를 입을 것만 같아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자고 힘센 상대방들이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이 힘이 세다고 자랑을 할 일이 아닙니다. 사실 힘이 약한 존재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놀라운 일이 발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점을 명심할 때에 겸손하고도 온유한 대인관계와 신앙생활이 영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관심이 가는 대목은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 조약을 맺을 때에는 그가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고 있습니다(21:27). 그리고 암 양 새끼 일곱을 따로 놓고서 브엘세바의 우물이 아브라함에게 속하고 있음을 그랄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21:28-31). , 담보물을 주고 받음으로써 언약의 성립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삭이 아비멜렉 왕과 조약을 맺을 때에는 먼저 잔치를 베풀고 함께 먹고 마십니다(26:30). 다음날 새벽에 서로 불가침을 준수하자는 맹세를 하고서 헤어집니다(26:31). , 담보물을 주고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대신에 잔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셋째, 야곱이 장인 라반과 조약을 맺을 때에는 또 다릅니다. 야곱이 먼저 큰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웁니다(31:45). 그 다음에는 종들에게 지시하여 많은 돌을 모아서 기둥 주위에 돌무더기를 만든 후에 다 함께 먹고 마십니다(31:46). 잔치 후에 하나님을 증인으로 하여 상호불가침의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31:47-53). 그리고 야곱이 길르앗 산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또 서로 헤어지기 전에 라반 일행을 잘 대접하고 있습니다(31:46, 54).

정리를 해보자면, 야곱이 장인 라반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는 방법은 아버지 이삭의 경우 그리고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경우를 모두 합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독특하게도 돌기둥과 돌무더기를 만드는 과정이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일찍이 벧엘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 것입니다(28:11-16) 벧엘에서 야곱은 돌 베개를 기둥으로 세우고 기름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서원을 했습니다(28:18-22). 이제 그때의 서원이 조약에 대한 맹세로 바뀌고 있을 뿐입니다.

끝으로 야곱은 돌기둥 맹세와 하나님에게 위탁하는 제사의 과정 이외에도 라반 일행을 헤어지기 전에 다시 한번 푸짐하게 대접하고 있습니다(31:46, 54). 참으로 지극정성을 다하고 있는 조약의 체결이며 헤어짐입니다. 왜 그와 같이 야곱이 행동을 하고 있을까요? 이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야곱 일행을 편안하게 보내주고자 마음을 먹고 있는 라반입니다(31:24, 29-30). 야곱도 지난 20년 동안의 억울함과 원한을 한바탕의 소낙비와 같이 모두 토해놓고 난 이후입니다(31:36-42). 이제는 서로가 미워하지 아니하고 축복을 하면서 영원히 헤어져야만 합니다. 영원한 헤어짐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야곱의 나이가 벌써 97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장인 라반은 그 보다 훨씬 많은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라반의 누이동생인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을 가서 20년만에 낳은 아들이 야곱입니다(25:20-26). 그러므로 라반은 야곱보다 50살쯤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147세의 라반입니다. 그가 다시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살아 생전에 볼 수 있다는 것은 마치 꿈과 같은 일입니다.

라반이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친정에 데리고 있을 때에는 자기 욕심이 지나쳐서 머슴처럼 부려먹기만 했습니다(31:15). 이제 막상 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혈육에 대한 미안함과 슬픔이 밀려듭니다. 그래서 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에게 축복하고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하란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31:55).

 

언약의 장소의 이름을 세 가지로 부르고 있는 이유(31:47-49)

 

야곱이 벧엘에서 하던 형식으로 라반과의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자 합니다. 서원이든지 조약이든지 간에 모두가 맹세라는 차원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벧엘에서 해본 솜씨 그대로 큰 돌을 가져다가 세로로 세우고서 중심기둥을 만듭니다(31:45). 그리고 목동들에게 많은 돌을 주워와서 기둥 주위에 쌓도록 지시합니다(31:46). 그것이 일종의 증거의 무더기가 됩니다(31:48). 그 증거의 무더기를 기억하고 잊지 말자고 라반이 먼저 아람어로 여갈사하두다라고 부릅니다(31:47a). 그것은 마치 한국어로 여기에 쌓아두다라고 들립니다. 그러자 야곱이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히브리어로 갈르엣이라고 바꾸어서 부르고 있습니다(31:47b). 그것은 마치 이것을 증거로 하여 서로 갈라지자는 것처럼 들립니다.

야곱이 아람어 대신에 왜 자신의 히브리어를 사용하여 구태여 갈르엣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야곱과 동행하고 있는 처자식과 목동들은 히브리어를 모르며 가나안에서의 야곱의 조상의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그들이 이방인인 아람사람들처럼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들에게 히브리 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언어에서부터 불어넣어주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장인 라반이 야곱의 뜻을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의 딸들과 손주들에게 히브리 인으로 잘 살아가라고 하는 뜻으로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고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고 불러주고 있습니다”(31:48).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반은 자손들의 장래를 하나님의 장중에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묘사가 되고 있습니다;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31:49). 뒤늦게 두 딸과 손주들에 대하여 혈육의 정이 솟아나고 있는 라반입니다. 쓸쓸하고 외로운 노년의 모습이 물씬 풍기고 있는 대목입니다. 평생 자신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신의를 저버리고 혈육에게조차 인색하게 살아왔지만 그것이 노년에 갑자기 후회가 되고 있는 라반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